법적 근거 없는 권력의 횡포
  • 고제규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2.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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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좌제, 갑오개혁 때 ‘공식’ 소멸했다가 일제 때 부활


중국에서 비롯한 연좌제의 뿌리는 조선 시대에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조선 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죄형에 따라 연좌의 범위를 규정했다. 삼족을 멸한다는 의미가 바로 연좌제다. 모반과 대역죄가, 연좌제가 가장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중형이다. 대구대 김영범 교수는 “왕조 시대부터 연좌제는 정치 권력자가 경쟁자를 제압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라고 규정했다. 이런 연좌제는 1894년 8월 갑오개혁 때 공식으로 소멸했다. 개혁안에는 연좌제와 관련해 ‘한 사람의 죄인도 자기 외의 연좌율은 일절 시행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연좌제는 일제 식민 시대에 부활했다. 부활한 연좌제는 사상범에 초점을 맞추었다. 물론 법적 근거는 없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연좌제는 한층 강화되었다. 월북자 가족이나 부역 가족은 모두 ‘신원 특이자’로 분류되었다. 제주도 지역이 연좌제 피해가 가장 심했다.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의 여파로 수많은 사람들이 일찌감치 국가 공무원이 되는 꿈을 접었다. 해외 여행도 포기해야 했다. 취업을 하더라도 경찰의 신원 조회에 걸렸다.


월북자 가족을 심층 면접해 논문을 발표한 조성미씨(이화여대·사회학과)에 따르면, 신원특이자들의 직업은 대부분 자영업이다. 고정우씨(가명·57)는 “중학교 때 처음 월북자 가족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법 고시 꿈을 접었다. 군 장교도 될 수 없었다. 은행에 들어간 것은 행운이다. 숨겨서 가능했다”라고 말했다. 연좌제 폐지는 대통령 선거 때마다 나온 단골 공약이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그만이었다. 1980년 5공화국 헌법에서 처음으로 폐지했다. 그러나 법 조항만으로 연좌제 망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1998년 차정원씨(당시 27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남편 때문에 교사 임용을 거부당했다. 2000년 8·15 이산가족 상봉과 함께 연좌제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시작되었다. 북측 방문단 대부분이 월북자였기에, 남한에 있던 신원 특이자들이 처음으로 당당히 나설 수 있었다. 이때 언론은 연좌제 악몽에서 벗어나자고 합창했다. 그것이 불과 2년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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