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복표 믿었다 발등 찍혔네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2.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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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토토(주), 파산 위기…월드컵 재원 마련 등 정부 구상 ‘공염불’


서울 강남역 네거리에 자리 잡은 타이거풀스 빌딩은 올해 초까지만 해도 젊은 화이트칼라들이 출근하고 싶은 회사 가운데 하나였다. 체육복표 시장이 내년이면 연 1조원 규모로 성장해 스포츠토토(주)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체육복표 사업은 시행한 지 1년도 안되어 벌써 파산 상태나 다름없다. 스포츠토토(주)의 대주주인 송재빈 타이거풀스인터내셔널(TPI) 대표는 구속되었고, 회사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지난 4월부터 월급이 지급되지 않자 2백명을 헤아리던 직원 가운데 절반 가량이 회사를 그만두었다. 직원은 물론이고 중견 간부나 홍보실 임원까지 보따리를 쌌다. 한 직원은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게이트에 오르내리다 보니 자식 보기가 민망해 일할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전했다.



스포츠토토(주)에 필요한 월 평균 운영비는 최소 24억원. 그러나 현재까지 월 10억원 수준의 매출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자본금 5백50억원은 벌써 까먹은 지 오래되었고, 지난해 10월 복표 발행 이후 현재까지 겨우 89억원 매출을 기록했다. 기대치의 10분의 1 수준에도 못미친다.



곳간은 텅 비었건만 갚아야 할 돈은 산더미다. 최근 체육복표 사업 시스템과 소프트웨어를 스포츠토토(주)에 제공한 이탈리아 회사 ‘스나이SPA’사는 타이거풀스를 상대로 6개월 동안 밀린 돈 97억5천만원을 갚으라며 민사 소송을 냈다.



국가대표 축구팀 공식 응원단인 ‘붉은 악마’의 마케팅 대행사도 ‘캠페인 지원비로 약속한 1억원과 티셔츠 비용 미지급금 2억5천만원 등 3억5천만원을 지급해 달라’며 약정금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스포츠 신문들에 밀린 광고비만도 5억원이나 된다.



스포츠토토(주)는 조흥은행으로부터 5백억원을 긴급 대출받기 위해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지불 보증 약속을 받아냈지만 그나마 무기 연기되었다. 한마디로 회사의 존립이 바람 앞의 등불이다.



스포츠토토(주)가 실낱 같은 기대를 걸었던 월드컵 붐도 썰렁하기만 하다. 스포츠토토(주)가 발매 중인 ‘월드컵 16강 알아맞히기’ 복표의 베팅 액수는 5월17일 현재 겨우 1천5백76만원이다. 애초의 기대치 2백52억원에 턱없이 모자란다. 스포츠토토(주)의 한 간부는 “예상 매출액의 10%나 유지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라고 걱정했다. 한 직원은 “월드컵을 계기로 큰돈을 벌어 보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될 것 같다”라며 울상을 지었다.







체육복표 실패로 난 구멍, 경륜으로 메울 판



체육복표 사업자인 스포츠토토(주)의 사업이 이처럼 지리멸렬하자 월드컵 붐을 업고 축구 발전을 도모하려던 정부 구상도 큰 차질을 빚고 있다. 우선 월드컵 경기장 건립 비용으로 10개 자치단체에 지원한 1천8백3억원을 갚을 길이 막막해졌다. 기획예산처는 지난해까지 국민체육진흥공단이 조성한 체육진흥기금에서 자치단체에 경기장 건립비를 50%씩 보조했다. 스포츠토토(주)의 매출 수익금에서 갚아가기로 하고 먼저 지원한 것이다.



사실 체육복표 사업은 정부가 월드컵 재원을 마련하려고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0개 도시에 경기장을 건설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지만, 정부는 체육복표 사업에서 나올 수익만을 믿고 밀어붙였다. 그러나 지난해까지 경기장 건립지원비로 배분된 금액은 10개 도시를 합해 2억8천4백여 만원에 불과하다. 구멍 난 기금을 채우려면 현재로서는 사행성 짙은 경륜사업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다.



국내 스포츠 발전에 기여한다는 계획도 차질을 빚고 있다. 체육복표 사업은 매출액의 50%만 당첨금으로 지원하고 나머지 50% 가운데 25%를 체육진흥기금으로 쓰도록 되어 있다.
체육진흥기금 수익금 가운데 40%가 월드컵경기장 건립 비용, 30%가 체육진흥기금 출연, 10%가 축구와 농구 경기 지원, 10%가 월드컵 조직위 경비, 나머지 10%가 문화관광부장관이 정하는 문화·체육 사업에 지원토록 되어 있다. 그러나 스포츠토토(주)는 지난해 28억원 매출에 그쳐 겨우 7억1천만원을 기금 수익금으로 지원했다. 지금 한창 돈이 필요한 월드컵조직위 운영비로는 고작 7천1백만원이 배분되었다.



체육복표가 부실해지자 △프로 축구 2부 리그 도입 △유소년 축구학교 설립 △여자 축구 지원 등 앞으로 추진될 축구 발전 프로그램도 차질을 빚게 생겼다. 체육복표 사업을 통해 월드컵 성공 개최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고 축구 발전을 이루려던 구상이 다 틀어진 셈이다.



체육복표 사업의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리라는 것은 출발 때부터 예고되었다. 우선 유럽이나 일본과 달리 국내 축구팬이 경기의 점수나 승패를 알아맞히는 데 익숙하지 않은 문화 차이를 간과했다. 스포츠토토(주) 관계자는 “한·일전 등 빅게임에는 열광하지만 차근차근 경기의 흐름을 분석하고 즐기는 축구 인구가 적은 것이 매출 부진으로 이어졌다”라고 시인했다.



실질적인 오너인 송재빈 타이거풀스 대표의 부실 경영도 한몫을 했다. 송재빈 대표의 시장 조사와 마케팅 실패는 직원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송대표는 사업 기간인 5년 동안 수익을 무려 2조3천억원 올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의 한 간부는 “경영을 모르는 젊은 기업인 송씨에게 복표 사업을 맡긴 게 화근이었다. 체육복표 사업만 벌이면 떼돈을 벌 줄 알았던 모양이다”라고 뒤늦게 후회했다.



스포츠토토(주)가 파산할 경우 국민체육진흥공단은 계약 기간 5년 동안 1천6백억원 수익금을 지불 보증한 조흥은행을 압박해 돈을 받아내려 할 것으로 보인다. 국민체육진흥공단 체육복표사업단 이해연 사업총괄과장은 “은행이 고정 수익을 지불 보증했기 때문에 공단은 손해볼 것이 없다”라며 느긋해 했다. 국민의 저축으로 조성된 돈이 체육복표 사업 실책을 메우는 데 지불되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반성은 없다.





사업자 교체도 쉽지 않아



국민체육진흥공단은 스포츠토토(주)가 파산하면 사업자를 교체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스포츠토토(주) 임직원은 여전히 사업 회생에 기대를 걸고 있다. 신영대 홍보팀장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체육복표 사업이 활황을 맞고 있다. 우리도 조금 더 쉽게 즐길 신상품을 개발하면 매출액이 늘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체육복표 사업자를 교체해 사업 자체를 재개하기도 쉽지는 않아 보인다. 사업 실패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체육복표 사업은 프로 축구 출범 2년째인 1984년 축구복권 형태로 시행되었다가 판매가 부진해 2년 만에 중단된 사례가 있다. 시행 첫해에는 판매 이익을 1억2천9백만원 냈지만 1985년에는 이익이 3천3백만원으로 뚝 떨어졌다. 프로 축구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실패 요인이었다. 이번의 실패 역시 월드컵 대목만 바라보고 시장 여건이 성숙하지 않은 것을 고려하지 못한 탓이 크다.



월드컵 붐을 일으킬 효자 상품으로 출발했던 체육복표 사업은 오히려 월드컵에 찬물을 끼얹는 ‘애물’이 되었다. 입법에 동의한 국회의원과 법을 추진한 문화관광부 모두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스포츠토토(주)는 사업 추진과 관련해 모든 사항을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사전 승인을 받은 뒤 시행했기 때문에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책임이 더 크다. 월드컵이 끝난 뒤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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