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 ‘샌드위치’ 신세
  • 남문희 기자 (bulgot@sispress.com)
  • 승인 2003.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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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부시의 ‘고집불통 행보’에 치여 곤욕…실무자들 “북한이 명분 줘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있었던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 회의(6월12∼13일)는 한·미·일 세 나라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비록 마약 거래나 위조 지폐 등 북한의 불법 행위에 국한했지만 한국 정부가 미국·일본과 더불어 대북 압박 정책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언론 보도를 둘러싸고 촌극이 벌어졌다. 6월13일 발표된 공동 보도문 내용을 접한 일부 언론이 즉각 ‘한국 정부가 대북 봉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식으로 보도하자 정부 당국이 부랴부랴 해명하고 나선 것이다. 6월14일 외교통상부 석동연 대변인은 “마약 밀매와 위폐 등 위법 행위 관련 부분은 불법 행위에 대한 법 집행이다.

국가나 국제기구가 다른 국가에 대해 취하는 제재 조처에 해당하지 않는다. 북한 핵 문제와도 무관하다”라고 말했다. 16일에는 당시 협상 대표로 참석했던 외교통상부 이수혁 차관보가 또다시 라디오 프로에 참석해 똑같은 해명을 되풀이했다.정부 대표단 일원으로 이 회의에 참석했던 정부의 한 당국자는 최근 “정부가 대북 압박에 동참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기존 입장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은 사실이다”라고 속내를 밝혔다. “언론이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오케이다”라고 그는 덧붙이기도 했다.

부시 행정부의 미국과 김정일 위원장의 북한. 두 고집불통 사이에서 한국 외교는 샌드위치 신세다. 최근 부시 행정부가 대북 봉쇄망을 더욱 넓고 촘촘하게 짜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입지는 한층 축소되었다. “우리도 사력을 다하고 있다. 북한이 우리보고 압박 정책에 동참했다고 비난하는데 우리로서는 억울한 측면도 있다”라고 이 당국자는 해명했다. 실제로 국제 외교 무대에서는 한국이 북한의 처지를 대변하기 위해 무척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 회의 결과도 그런 노력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미국은 훨씬 더 강력한 압박책을 제시했다고 한다.

최근 일련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의 말은 사실인 것 같다. 지난 6월21일자 일본 <아사히 신분>에 따르면 지난번 회의 때 미국은 원래 ‘6월 말까지 유엔 안보리 의장의 대북 비난 성명 채택을 추진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이 적극 반대해 관철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북한 외무성이 지난 6월18일 5자회담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대변인 성명을 발표하자 이를 재추진하면서 쟁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이 명분을 줘야 하는데 오히려 있는 명분도 없애 버릴 때가 많아 힘들다.” 정부의 또 다른 외교당국자는 국제 무대에서의 고충을 이렇게 토로했다. “지난해 핵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 외교의 목표는 미국과 북한을 접합하는 것이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미국은 지난해 대북 특사로 원래 잭 프리처드 한반도 담당 대사를 파견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직급이 높은 제임스 켈리 차관보를 보냈다. “당시 미국은 북한이 핵 의혹을 해명하고 스스로 벗어나기를 기대했는데 오히려 도발적인 자세로 나와 충격을 받았다”라는 것이다.

그 뒤로도 정부는 마찬가지로 고집불통인 ‘엉클 샘’을 졸라 3자회담을 성사시켰다. 그런데 북한은 또다시 재처리도 끝나가고 핵무기도 가지고 있다며 판을 깼다. 이 당국자는 “핵 문제가 제기된 이후 북한은 핵 봉인 개봉, 사찰관 추방, 재처리 돌입 등 설마설마하던 일들을 다 했다. 그래서 이제 미국이나 일본 그리고 유럽 등 국제 사회가 북한을 달래기만 해서는 어려운 게 아니냐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라고 결론지었다.

한국 외교의 어려움은 국제 사회의 강경 목소리를 잠재울 만한 명분이 뚜렷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당사자인 우리 정부가 ‘남들’과 똑같이 행동할 수는 없다. “현재 북한과 공식으로 대화 채널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한국과 중국뿐이다. 압박 강도가 높아질수록 대화 채널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 커진다.” 통일부의 한 당국자는 압박과 대화라는 상충하는 수단 사이에서 힘들더라도 줄타기를 하면서 버텨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 바깥에서는 참여정부가 과연 국민의정부의 햇볕정책을 계승하고 있는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당국자들은 주로 상황의 차이를 거론한다. 즉 국민의정부와 달리 참여정부는 북한 핵 문제라는 돌발 상황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북한 핵 동결이 유지되고 있던 상황과 붕괴된 상황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특히 핵 문제가 국제화해 있는데 우리만 몰라라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당국자들은 주장한다. 따라서 대화와 교류·협력을 중시하는 햇볕정책의 기본 정신은 계승하되 그 구체적인 적용은 상황과 현실을 고려해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평화번영정책 그 자체가 햇볕정책에 대한 문제 의식을 깔고 있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정세현 통일부장관이 지난 5월27일 ‘북한 전문가 100인 포럼’ 창립식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평화번영정책은 △통일·외교·안보 정책의 외연을 동북아 차원으로 확대한다는 점 △남북 경협과 군사 문제의 상호 균형 △국민적 합의 △상호 신뢰와 호혜 원칙 등을 새롭게 강조하고 있다. 햇볕정책 정신은 계승하되 적용 과정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정세현 장관은 지난번 남북장관급 회담이나 경협추위 회담에서 남측이 새로운 회담 문화를 주장하며 과거에 비해 훨씬 원칙적이고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것을 예로 들었다.

평화번영정책은 강조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햇볕정책과 차별화될 수 있는 요소를 이미 그 논리 구조에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북 경협과 군사 문제 균형’이라는 논리 역시 햇볕정책에 대한 보수 세력의 비판을 수용한 결과다. 북한 핵 문제 등 군사 현안이 터졌을 때 역으로 균형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다. 한·미 관계와 남북 관계의 균형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민의정부는 이 양자 관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참여정부에서는 한·미 동맹 관계 강화 쪽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이 정부에서 한·미 관계는 핵 문제뿐 아니라 경제 문제까지 좌지우지하는 키워드로 등장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한·미 동맹 강화와 미국의 영향력 확대에 대해서는 정부 내에서도 입장의 편차가 여전히 큰 상태이다. 우선 미국의 영향력 강화가 반드시 핵 문제라는 상황 때문인가에 대한 비판론도 존재한다. ‘어려움은 항상 있어 왔다. 현재의 문제는 특검제 수용 등으로 우리 내부가 균열됨으로써 자초한 측면이 있다’는 주장에서부터 ‘주한미군 재배치는 결국 대북 선제 공격을 하기 위한 미국의 포석이 아닌가’라고 의심하는 목소리도 여전하다. 반면에 ‘미국이 우리와 협의 없이 북한에 어떤 조처를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과 거리가 멀어질수록 우리와 상의 없이 단독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현실론도 팽팽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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