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원유 수출 재개로 OPEC비상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6.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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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안보리案 수용해 석유 수출 길 열려…공급 과잉돼도 속수무책
걸프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90년 7월 말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석유장관 회담에 참석한 이라크 대표가 목청을 높였다. 당시 배럴당 14달러이던 국제 원유 가격을 25달러 선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다른 회원국 대표들에게 묵살되었다.

그로부터 6일이 지난 8월2일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쿠웨이트 침공 명령을 내렸고, 국경을 넘은 이라크군은 가장 먼저 쿠웨이트 유전 시설을 접수했다. 세계 유가는 갑자기 배럴당 32달러로 폭등했다. 하지만 이라크는 유가 급등에 따른 혜택을 조금도 누리지 못했다. 이라크군은 미국이 주도한 다국적 연합군에 궤멸되었고, 유엔의 금수 조처로 인해 이라크 경제는 파산 위기에 빠져들었다. 반면 석유수출국기구의 나머지 회원국들은 이라크가 빠진 틈을 타서 원유 생산을 늘리며 이익을 취했다.

그런데 지난 5월20일 이라크가 유엔 안보리 결의 986호를 받아들임으로써 원유 수출 길이 열렸다. 안보리 결의 986호는 원래 지난해 4월에 통과되었지만, 이라크 정부가 부대 조건을 문제 삼아 수용을 꺼려 왔던 것이다. 이 결의의 골자는 이라크의 원유 수출을 부분적으로 허용하는 것이다. 걸프전이 발발하기 전에 이라크는 하루 3백20만 배럴씩 원유를 수출했는데, 이번 조처로 앞으로 6개월간 20억달러어치, 즉 하루 70만 배럴씩 원유를 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 있다. 우선 원유 수출 대금의 30%를 이라크의 핵 및 화학무기 개발 상태를 조사하는 유엔조사단의 활동비와, 걸프전 피해 배상에 지출하도록 되어 있다. 특히 유엔에 신청한 걸프전 피해 배상은 총 2백50만 건, 1천6백억달러에 이른다. 이밖에도 수익금의 13∼15%를 송유관이 통과하는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을 위해 써야 한다. 따라서 이라크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전체 원유 수출 대금의 55% 정도밖에 안된다. 그것도 식량과 의약품 등 인도주의적인 물품을 구입하는 데만 쓸 수 있다. 이라크는 결국 이런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현재 녹슨 송유관을 손질하며 수출 채비를 갖추고 있다.

이 때문에 몸 달게 된 것은 나머지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들이다. 이들은 석유수출국기구 내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원유 수출 2위이던 이라크가 원유 수출을 재개함에 따라 유가가 폭락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사태를 낙관하는 사람들은 원유 가격이 1∼2달러 정도 떨어지는 데 그칠 것이라고 보지만, 86년처럼 유가가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비관적 시각도 만만치 않다.

값 하락 뻔히 알면서도 양 못 줄여

대표적 인물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야마니 전 석유장관이다. 10년 전만 해도 세계 언론의 조명을 한몸에 받아가며 석유수출국기구 석유장관 회담을 이끌던 그는 지난 4월 초 런던에서 열린 세계에너지연구센터(CGES) 제6차 회의에 참석해, 현재 상황이 ‘폭풍 직전의 고요’와 같다고 진단했다. 85년 말 세계 유가는 배럴당 30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겨우 석 달 만에 유가는 11달러로 곤두박질쳤다. 원유 가격이 높게 형성되자 산유국들이 생산을 늘린 반면 수입국들이 수입을 줄임으로써 과잉 공급이 발생해 가격이 폭락했다. 세계 원유 시장에 정통한 야마니는 이라크가 원유 수출을 재개함으로써 석유수출국기구가 위기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지난 6월5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석유수출국기구 석유장관 회담이 열린 것도 바로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번 회담에서 관심을 끄는 대목은 과연 각국 대표가 이라크의 원유 수출 재개에 따라 실효성 있는 대책을 세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현 상황에서 합의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각국의 원유 생산량을 줄이는 것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석유수출국기구의 전체 원유 공급량을 현 수준으로 동결해 가격 하락을 막는 것이다.

그러나 석유수출국기구 회원들이 그런 결정을 내리기는 힘든 상황이다. 우선 석유수출국기구내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생산량을 줄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사우디는 걸프전이 발발한 후 하루 수출량을 4백50만 배럴에서 7백66만 배럴로 늘렸는데, 이것은 이라크가 수출하던 물량의 대부분을 넘겨받은 것이다. 하지만 현재 사우디는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원유 생산을 줄이기 힘들다. 다른 회원국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베네수엘라는 할당량보다 50만 배럴을 더 생산하고 있고, 알제리·가봉·카타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각국은 현재의 생산량을 유지하는 수준에서 합의를 볼 수밖에 없다.

현재 석유수출국기구는 하루 3백50만 배럴씩 원유를 더 생산할 수 있지만 시설을 묵히고 있다. 그런데도 원유 시장은 공급 과잉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현상은 2000년대 초반까지 그대로 이어질 전망이다. 현재 전세계의 하루 원유 수요량은 7천만 배럴인데, 2000년에는 6백20만 배럴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반면 같은 기간 산유국들의 하루 원유 공급량은 8백20만 배럴이 추가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라크에 대한 원유 수출 규제가 완전히 풀리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세계에너지연구센터가 예측한 바에 따르면, 이라크는 금수 조처가 해제되면 즉시 하루 1백50만 배럴씩 원유를 생산할 수 있으며, 2년 안에 3백50만 배럴, 3년 뒤에는 4백만 배럴까지 공급량을 늘릴 수 있다. 이럴 경우 원유 시장의 공급 초과 현상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고, 원유 가격이 떨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석유수출국기구의 위상이 약해지자 국제에너지기구(IEA)의 기능도 변했다. 이 기구는 1차 오일 쇼크가 발생한 1년 뒤인 74년에 세계 주요 원유 수입국들이 모여 설립했다. 이 기구의 최대 목적은 석유수출국기구의 자원 무기화에 맞서 원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80년대 중반 이후 원유 공급에 문제가 없어지자 그 역할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고, 에너지의 효율을 높이는 것에 중점을 두게 된 것이다.

최근 미국 정부는 석유수출국기구 와해 가능성까지 점치면서 국제에너지기구에서 탈퇴하려고 하고 있다.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못되는 석유수출국기구에 맞서 국제에너지기구를 주도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자기 부담을 일본 정부에 떠넘기려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석유수출국기구의 영향력은 무시하기 힘들다. 현재 석유수출국기구가 원유 수출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0%도 안되지만, 전세계 원유 매장량의 77%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유를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석유수출국기구, 특히 중동 국가들과 관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산유국에 대한 전문 연구인력을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 에너지경제연구원 이문배 정보분석실장의 충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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