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 벗는 독일의 '기자 첩보원'
  • 프랑크푸르트·허 광 통신원 ()
  • 승인 1998.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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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부 분석 작업 활발… 슈미트 엔봄, 저서에서 협력자 명단·행태 고발
분단과 냉전의 전초 기지, 그 음지에서 암약하던 독일정보부(BND)를 분석하는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다. 독일 통일로 인해 미·소 두 나라의 입김과 이념적 제약에서 벗어나면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던 독일정보부가 다양한 시각에서 해부되고 있는 것이다. 그간의 연구 성과로는 시사 주간지 <슈피겔> 기자 코흐가 동·서독 정보부 요원들과 면담해서 펴낸 <카인과 아담, 동·서독의 간첩들>(93년), 그리고 베를린 주재 CIA·KGB 책임자를 역임한 두 인물, 데이비드 머피와 세르게이 콘트라초프가 지난해 공동으로 펴낸 <보이지 않는 전선>, 또 같은 해 독일의 역사학 교수 볼프강 크리거가 펴낸 <냉전과 동·서독의 정보부>를 들 수 있다.

자진해서 ‘정보부 나팔수’ 된 기자 수두룩

이같은 연구 성과와는 다른 차원에서 독일의 역사학자들은 지난해 정보부에 통일 전의 문서를 공개하라고 요구하며, 무엇보다 과거 동독에서의 반정부 투쟁사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서독 정보부의 비밀 문서 공개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보부가 지금까지 공개한 문서는 단 두 가지, 과거 동독의 군사 시설 위치,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집한 소련군 관련 정보에 불과하다. 이 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코블렌츠 연방 사료청의 평가에 따르면, 역사적 사료로는 별 의미가 없는 자료다. 독일 정보부는 동독측으로부터 넘겨 받은 방대한 자료를 정리할 인력과 예산이 부족하다는 구실로 문서 공개를 거부하고 있는데, 실제 이유는 정보부와 비밀리에 협조해 온 첩보원들의 신분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출간된 슈미트 엔봄의 저서 <언더카버>는 정보부의 공작 정치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면서도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던 ‘첩보원’문제를 다루었는데, 그중에서도 정보부와 끈을 대온 기자들의 행태에 초점을 맞추어 출판 전부터 독일 언론계를 술렁이게 했다. 슈미트 엔봄이 책을 쓰면서 참고한 자료는 70년 3월 독일 정보부가 작성한 내부 문서인데, 바로 여기에 언론계 내부 협력자 명단이 들어 있었다.

정보부는 왜 이런 문서를 만들어놓았을까? 그 배경은 이렇다. 69년에 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 사민당 당수는 전후 20여 년간 유지된 보수 연정의 경직된 냉전 외교 노선을 수정해 동·서독의 교류를 확대하고 서독 내부의 민주화를 추구했다. 사민당은 이같은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으로 과거 보수 정권 밑에서 국내 정치 개입과 언론 공작을 일삼던 정보부를 지목하고, 1차 정리 대상으로 당시 언론계 내부에서 정보부 협조자들로 거론되던 인물들의 명단을 내놓도록 정보부에 요구했다.
그런데 정보부가 마지못해 내놓은 자료에는 사민당 지지 세력이라고 알려진 인물들까지 포함해서 현직 언론인 2백30명이 들어 있어 사민당을 놀라게 했다. 이 자료를 그대로 믿는다면, 독일의 여론을 주도하는 유수 일간지·주간지로부터 텔레비전·라디오 방송국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언론 기관에 포진한 언론인들이 정보부에 협조했다는 것이다.

물론 정보부가 진짜 협조자들의 신상 공개를 막는 수법으로 실제 자기들과 접촉하지 않은 인물이나 접촉 후보자들까지 끼워 넣어 물타기 작전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정보부의 이같은 의도를 모를 리 없을 사민당은 일단 문서 공개를 유보하고 서서히, 요란하지 않게 언론계 정리 작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브란트가 74년 동독 첩보원 사건에 책임을 지고 총리 직을 사임한 뒤 사민당내 우파인 슈미트가 총리 직에 오르면서 개혁 노선은 중단되고 언론계 정리 작업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후 82년 기민당과 기사련 그리고 자민당의 연립 정부가 지금껏 16년이 넘게 집권해 오는 과정에서 정보부와 언론계 일부의 유착 관계 역시 커다란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슈미트 엔봄은 70년 3월 정보부가 작성한 이 문서에 이름이 오른 언론인들의 행태를 추적한 것이다.

70년의 문서를 보면 정보부는, 협조적인 언론인들을 두 부류로 분류하고 있다. 정기 접촉해 정보부가 신뢰할 수 있는 인물들, 그리고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나 부정기 접촉하는 인물들로 나누어 놓았다. 이 명단에 있는 언론인 개개인에 대해서는 담당자가 배정되어 있다. 이들과의 접선은 주로 정보부가 해외 공작 활동용으로 세워놓은 위장 회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정보부가 기자들에게 접근한 이유는, 정보를 다루는 기자 특유의 직업 감각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외국 정보 당국의 감시망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정보원들은 자기들의 신분이 드러나기 쉬운 일에 해외 특파원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 사례로 71년에 <슈피겔> 편집부 룰만 기자가 유고슬라비아에서 간첩으로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받은 사건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슈미트 엔봄의 기록에 따르면, 70년대부터 독일 기자 중에는 정보부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제 발로’ 정보부에 접근하거나, 정보부가 신뢰하는 인물에 끼지 못해 안달한 인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개중에는 아예 정보부의 나팔수를 자처하는 자들도 있었는데, 슈미트 엔봄은 그 가운데 한 인물로 일간지 <디 벨트> 기자 람베크의 사례를 소개했다.

96년 가을, 유고 분쟁 지역에 파견된 유럽 감시단 중에 독일 정보부 요원이 섞여 무기를 밀매하고 있다는 텔레비전 보도가 나오자 그는 독일 정부의 공식 해명이 있기도 전에 이같은 보도가 세르비아의 선전에 이용될 뿐이라는 논지를 폈다. 그러나 유고에서의 정보부 활동을 처음으로 보도한 텔레비전 시사 프로그램 <모니터>는 후속 보도를 통해 이 사실을 재확인했다.
정부 비판 앞장선 <슈피겔>도 정보부에 협력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독일의 역대 정부에 대해 어느 매체보다도 비판적인 논조를 보여온 주간지 <슈피겔>도 오랫동안 정보부와 협력했다는 것이 슈미트 엔봄의 분석이다. 이 협력 관계는 정보부 요인들이 퇴직 뒤 <슈피겔> 기자로 충원되거나, 현직 <슈피겔> 기자들이 정보부와 접촉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유지되었는데, 정보부의 70년 문서에는 당시 <슈피겔> 기자 5명의 이름이 들어 있다. 정보부의 비밀 활동을 최초로 공개해 70년대에 베스트 셀러로 떠올랐던 책들은 실은 <슈피겔> 기자들과 정보부의 사전 협의를 거친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카인과 아담, 동·서독의 간첩들>을 쓴 코흐는 자신의 저서가 정보부의 청탁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는 이런 식의 조율 작업이 통일 후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슈피겔>이 정보부와의 협력 관계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보부를 비판·감시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최근의 실례로는 94년 8월의 플루토늄 밀수 사건 보도를 들 수 있다.

여론이라는 무기로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과, 비밀 활동을 통해 권력 유지에 기여하는 정보부는 물과 기름같이 어울릴 수 없는 존재이다. 지난해 5월 독일 언론노조는 언론인과 정보부의 협력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직업 윤리와는 양립할 수 없음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 정부의 생각은 다르다. 가이거 독일 정보부장은 올해 초, 어떤 언론인을 정보원으로 선택할지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결정하게 된다는 발언을 했다. 무분별한 정보원 모집은 시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발언은 언론인이 정보 수집 활동의 ‘마지막 수단’으로 필요하다는 독일 정부의 기본 원칙을 다시 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슈미트 엔봄의 <언더카버>는 역대 독일 정부와 일부 언론인들이 이 ‘마지막 수단’에 얼마나 유혹을 느껴 왔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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