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여성학계, 반쪽짜리 정치학 다시 쓴다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9.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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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계, 여성 소외시킨 국가·제도·성 연구 앞장… 여성운동의 ‘이론 공급 기지’ 자임
만약 어떤 사안이 투표에 의해 51 대 49로 결정났을 때, 이를 ‘다수결 원칙’에 따라 민주주의를 완벽하게 구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똑같은 사안에 대해 49 대 51로 정반대 결과가 나온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얼핏 보아 말장난 비슷해 보이는 질문이 주로 여성들에 의해 ‘매우 진지한’ 어조로 제기되고 있다. 그것도 이제까지 ‘남성의 학문’으로만 여겨져 온 정치학에 대해서이다. 여성들은 이같은 질문을 통해 기존 정치학 개념의 허점을 예리하게 짚어내며‘여성의 관점으로’ 정치학을 다시 쓰고자 한다.

정치학은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의 권력 관계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정의된다. 권력 관계는 남녀노소, 다수와 소수, 개인과 집단, 성별 차이를 불문하고 두루 형성되어 존재하는 것이므로, 기존 정치학은 그것이 자유주의 정치학이든 마르크스 정치학이든 ‘무성적(無性的)인’ 것이었다. 그런데 여성들이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기존 정치학은 어떤 형태로든 여성들을 소외시켜 왔으며, 그 결과 여성이 남성에 비해 항상 ‘불평등한 위치’에 놓이는 현실을 합리화했다는 것이다.

여성학 이론이 달라지고 있다. 77년 대학 강단에 여성학 강의가 처음 등장한 때부터 지금까지, 여성학자들이 주로 치중했던 분야는 여성의 권리 신장 문제였다. 80∼90년대 여성학은 독재·민주화·노동·분단 문제와 얽히면서 뒷전으로 물러서 있었다. 그러던 여성학이 이제야말로 ‘여성 자신’의 문제를 규명하는 데 역량을 총동원하겠다고 선언했다.

대표적인 것이 이영애 교수(단국대·정치학)가 최근 펴낸 〈국가와 성〉(81쪽 책 소개 참조)이다. ‘성 변수’를 도입한 정치학 개론서로는 국내 학계에서 처음인 〈국가와 성〉은, 여성·남성에서의 ‘성(性)’을 ‘사회학적 성’을 의미하는 ‘젠더(gender)’로 가정하고 논의를 진전시켰다. 이에 따른 이교수의 결론은 ‘여성의 불평등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국가와 제도에 의해 끊임 없이 보완되어 왔으며, 궁극적으로 인종·민족·계급간 불평등 관계와 동일한 방식으로 여성이 소외되어 왔다’는 것이다. 결국 기존 정치학의 이같은 취약점이 보완되지 않으면 ‘모두가 함께 살기’를 추구하는 정치학 논의는 사실상 ‘반쪽짜리 학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이교수는 주장한다.

궁극적으로는 같은 목적을 추구하지만, 다른 시각으로 성 정치학 논의를 진전시키는 곳도 있다. 최근 〈여/성 이론〉(오른쪽 책 소개 참조)이라는 반연간 이론서를 창간한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도 그중 한 곳이다. 97년 해외 유학파 여성학자들이 모여 만든 여이연의 주요 관심사는 생물학적 성을 의미하는 ‘성성(섹슈얼리티)’에 집중해 있다. 한동안 활발하게 진행되다가 논의가 중단된 여성의 정체성·섹슈얼리티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 정확하게 분석해 보자는 것이다.
여성이 역사 주체 되는 정치학 재구성

똑같이 ‘성 정치학’으로 번역되어도 이른바 젠더 정치학이 국가·제도 분석 등 거시적인 방법론을 추구하고 있다면, 여이연이 채택하고 있는 섹슈얼리티 정치학은 일상성·친밀성 안에서 여성 문제를 분석하는 미시적 방법론을 추구한다. 여이연이 이같은 작업을 통해 노리는 것은 ‘여성이라는 현재의 정체성을 만든 역사에 균열과 틈새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여이연 소장 고갑희 교수(한신대·영문학)는 “이론서 제호의 ‘여’와 ‘성’ 사이에 빗금을 그은 이유도 이같은 의도이다. 이론화 작업을 통해 여성 자신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정치학을 재구성하는 데 기여하겠다”라고 밝힌다.

여성학계 또는 여성주의(페미니즘) 진영에서 성 정치학이 논의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성 계급 논의’는 이미 80년대에 국내에서 시작되었으며 ‘섹슈얼리티 연구’도 ‘탈근대(또는 후근대) 논의’의 물결이 본격 상륙했던 90년대 초반 함께 묻어 들어왔다. 문제는 이때의 논의가 집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해 사회적으로 주목할 만한 반향이 없었다는 것이다.

젠더 정치학이든 섹슈얼리티 정치학이든 여성학계에서 최근 두드러지는 현상은 과거의 시행 착오를 거울 삼아 일선 운동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이론 차원에서도 집단화를 이루려는 시도가 번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젠더 정치학에 무게를 둔 일단의 여성학자들은 한국정치학회 여성분과를 중심으로, 매년 또는 매월 발표회를 여는 등 집단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현재 한국정치학회 여성분과에는 여성정치연구소 손봉숙 소장을 비롯해 장공자(충북대·정외과)·이영애 교수 등 여성 정치학자 20∼30명이 연구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섹슈얼리티 정치학에 무게 중심을 둔 여성학자들 역시 여이연의 사례가 보여주듯 ‘새로운 이론 공급 기지’를 자임하고 있다. 본격 가동 2년째에 접어든 여이연에는 고갑희 교수 외에 임옥희(경희대·영문학) 태혜숙(효성가톨릭대·영문학) 노승희(전남대·영문학) 교수와 이숙인씨(성균관대 강사·동양철학) 등 소장 여성학자 30여 명이 포진해 활동 중이다.

이론·개념 낯선 것이 한계

관점은 비록 갈릴 수 있지만 이들 신진 여성학자들을 한데 아우르는 가장 큰 공통점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이들 모두가 ‘당당하게’ ‘도전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장 여성학자로 90년 국내 처음으로 성 정치학 관점에서 학위 논문을 썼던 이승희 박사(새정치국민회의 전문위원)는 “세계 여성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급진적 여성주의’(래디컬 페미니즘)의 경우, 국내에서는 90년대 초반까지도 용어 자체를 입에 올리는 일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 성(姓) 함께 쓰기 운동’이 벌어지고 ‘안티 미스 코리아 행사’가 열릴 정도로 공격적인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이제서야 겨우 여성들은 자신의 성을 자신의 관점에서 말할 수 있게 됐다”라고 말한다.

물론 이론 틀 자체가 해외에서 수입된 데다가 이들이 구사하는 개념들도 아직은 낯설어,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적지 않은 점은 최근 여성학 논의의 가장 큰 한계로 꼽힌다. 그럼에도 이들은 대안 찾기 작업에서 차지하는 이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구조라는 큰 틀에서 여성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여성 문제의 본질을 놓치기 쉽다. 우리는 이론 생산에 주력해 밖으로는 인식 체계를 바꾸고, 안으로는 여성운동의 교량 노릇을 할 것이다”라고 고갑희 교수는 말한다. 여성이 ‘감성의 동물’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임을 이제야말로 입증해 보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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