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한글.한자 문자 전쟁, 제3의 해법 찾자
  • 魯順同 기자 ()
  • 승인 1999.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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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병용 논란, 해결책은 없는가
‘50년 문자 전쟁’이라는 표현은 적절했다. 최근 문화관광부(문화부)가 공문서와 도로 표지판에 한자를 병기한다는 계획을 내놓자마자 전쟁을 방불케 하는 기세로 논쟁이 재연하기 시작했다. 항의 시위가 잇따르자 문화부는 부랴부랴 해명에 나섰다.‘전용 원칙은 확고하다. 입시 교육에 밀려 들러리가 되어 버린 한자 교육을 내실 있게 하자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한글학회를 비롯해 한글 관련 시민 단체 10여 개는 ‘한자 병용 반대 투쟁 전국 비상대책위원회’(대표 원광호)를 발족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언론 또한 한자 병용을 환영하는 쪽과 이 조처의 파장을 염려하는 쪽으로 엇갈린다.

때아닌 난상 토론에 문화부는 난감한 기색이다. 국어정책과 위옥환 과장은 2월9일 내놓은 안이, 필요할 경우 공문서와 일반 도로에 한자를 표기할 수 있도록 길을 트겠다는 것일 뿐 현재 법률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해명한다.

표기 원칙 싸고 50년 소모전

문제는 이러한 혼란이 단순한 오해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양한 논점을 헤쳐 보면 그 바닥에는 표기 원칙에 대한 이견이, 더 근본적으로는 국어의 정체성에 대한 시각차가 자리잡고 있다. 한글 전용파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문화부의 조처가 한글 전용의 대원칙을 뒤로 돌리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말 살리는 겨레 모임’의 이대로 공동 대표는 자신들의 염려가 결코 기우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번 조처를 환영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라. 그들은 단순히 한자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한자 혼용이다.” 그는 한 사례로 지난해 11월 궐기 대회를 가진 ‘전국 한자 교육 추진 총연합회’(총연합회)의 편지 글을 인용했다.‘尊體 安寧하심을 祝願합니다. (중략) 貴下를 發起委員으로 推戴하오니 公私間 多忙하시더라도 國家와 民族의 將來를 위하여 承諾하여 주시기 仰望합니다.’

여기서 용어의 혼란을 막기 위해 ‘한글 전용’ ‘한자 병기’ ‘국한문 혼용’의 말뜻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글 전용은 ‘횡단 보도를 건넌다’‘건널목을 건넌다’와 같이 고유어든 한자어든 한글로 표기하자는 것이다. 한자 병기(병용)는‘횡단보도(橫斷步道)를 건넌다’라고 괄호 안에 한자를 쓰는 것이고, 국한문 혼용은 ‘橫斷步道를 건넌다’와 같이 한자를 드러내는 표기법이다(48년에 제정된 한글전용법은 공문서를 한글로 표기하되 당분간 병기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씨가 말한 대로 현재 한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논의의 초점이 교육이라고 말하면서도, 현재의 표기 원칙을 문제 삼고 있다. 지난해 2월 한국어문교육연구회(어문회)는 이례적으로 한글전용법을 폐기하라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어문회는 전신인 국어국문학회 시절부터 한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청원서를 수십 차례나 제출했다. 하지만 전용법을 폐기하라는 제목을 내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용론자들이 바짝 긴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어 지난해 11월 총연합회는 한글 전용 원칙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완곡하게 드러냈다.

한글 전용파의 위기감을 부추긴 것은 한글전용법 폐기 청원서에 국회의원 1백51명이 찬성했다는 점이다.‘한글전용법 지키기 천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우리 말 살리는 겨레 모임’의 공동 대표 이오덕씨는 이같은 국회의원들의 몰표가 청원의 속뜻을 알아채지 못한 탓이라고 지적한다. 이 문제에 관한 양쪽의 인식차를 좁히기는 어려워 보인다. 청원서를 기초한 어문회 연구원 박광민씨는, 전용법을 폐기해야 하는 정황 증거로 법 제정 과정의 폭력성을 꼽았다. 48년 제정된 한글전용법이, 건전한 협의 과정 없이 밀어붙이기 식으로 통과되었다는 것이다.“초대 국회에서 통과된 이 법률을 이후 군사 정권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관철했다. 국어가 빈사 상태에 빠졌지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찍어 누르는 분위기에서 파행이 고쳐지지 않았다. 이제는 바로잡아야 한다.”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진태하 위원장(명지대 교수·인문학부)는 막무가내로 한자를 몰아낸 정책이 사회의 지적 토대를 하향 평준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전문 용어 대부분이 한자어인 현실에서 한자를 모르는 학생들은 뜻도 모른 채 내용을 주워섬기게 된다는 것이다. “말에는 일상 생활에 필요한 것이 있고, 전문 지식을 전개하는 데 유용한 언어가 있다.” 진교수는 또 “쓰기 쉽고 읽기 쉬우면 된다는 전용파의 주장은 사회적인 책임을 망각한 무책임한 태도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지난 50년간 두 진영의 싸움은 어느 문자가 더 우월한가에 대한 논쟁으로 치달아 왔다. 전장을 방불케 하는 그 곳에서 고종석씨와 같은 입장은 차라리 이단적이다. 양 진영이 긋는 평행선 사이에 ‘한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과 한글 전용 표기 원칙이 길항하지 않는다’는 그의 인식이 설 자리는 비좁다. 고종석씨는 양쪽의 주장에서 일리 있는 지적과 부정직한 태도를 고루 집어낸다. 우리말에서 한자어의 비중이 높다고 해서 전용 원칙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동음이의어 문제나 한글 맞춤법 등 한자와의 관계 속에서 풀어야 할 국어의 특수성을 무시하는 것 모두 부정직한 태도라는 것이다.

그가 대책 없는 양비론을 펴는 것은 아니다. 그는 현실이 바로 답을 일러 준다고 보았다. 한글 전용이 확대되는 현실이 바로 문자 체계를 통일하고자 하는 언중(言衆)의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그는, 한글이 한자와 싸워 온 과정을 민주주의가 봉건주의와 싸워 온 과정으로 보았다. 한글이 우리글이어서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부합하기 때문에 써야 한다는 것이다. “정직하게 언어 대중의 뜻부터 헤아려라”

표기 문제만 놓고 볼 때 그의 결론은 명확하다. 사적인 글을 쓸 때 한글만 쓰든 한자를 섞어 쓰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교과서는 한국의 모범적인 글쓰기 체계에 따라 씌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한자의 매력을 상찬하는 그는 한자 교육에 관한 한 전용론자들에게 눈총을 받을 만하다. 그는 “한자어를 이해하는 데 한자 지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한자 지식이 한자어 이해를 돕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 어휘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자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2천 자 안팎의 학습이 부당한 뇌 혹사는 아닐 것이다”라면서, 초등학교에서의 한자 교육을 지지했다.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깊은 불신 탓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전은 죽기살기 식의 상대방 몰아붙이기가 되기 일쑤다. 이대로씨는 “50년 동안 그들(혼용론자)이 국어 발전을 위해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우리가 허허 벌판에서 우리말을 기려 쓰자고 여러 방안을 내놓으면, 그들은 비웃기만 했다. 한자의 우수성을 들먹일 뿐 한글을 갈고 닦는 데 관심이나 있었나”라고 비판한다.

이와 반대로 전용파에 대한 불신도 만만치 않다. 독재 정권의 비호를 받아 교육 과정에서 한자를 몰아내 한자 문맹을 양산했는가 하면, 엉터리 신조어로 말을 혼탁하게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지금, 공세를 펴는 국한문 혼용론자들이 한글 전용파를 국어를 빈사 상태에 이르게 한 원흉이라고 지목하는 한, 전용파가 불법적인 서당을 단속하라고 즉자적으로 반발하는 것 또한 불가피하다.

논쟁이 50년 동안 지속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50년 전과 똑같은 모양새여서는 곤란하다. 고종석씨의 관전평은 이렇다. “나라의 언어 정책을 결정할 때, 국어의 특수성에 대한 정직한 판단과 언중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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