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관청이 훼손한 월북 시인 시비
  • 전남 영광 · 나권일 광주 주재기자 ()
  • 승인 2000.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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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군 교육청, 월북 시인 조 운 시비 훼손해 물의
북한 문인과 예술가 들이 남쪽에 있는 가족의 생사 여부를 묻고 직접 방문하겠다는 마당에, 한 월북 시인의 문학성을 기리는 시비가 제막식을 하루 앞두고 교육기관에 의해 훼손된 사건이 발생해 지역 문단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7월21일 밤 9시께. 전남 영광군 교육청(교육장 이상배)은 이튿날 열리기로 되어 있는 시비 제막식을 막기 위해 교육청 직원과 굴삭기를 동원해 교육청 입구 화단에 세워진 '조 운 선생 시비'의 기단석을 파헤치고 조경수를 뽑아냈다. 교육청은 또 경찰을 불러 시비 훼손을 제지하는 문인 정설영씨(53)를 격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시비 건립에 동의 했던 영광교육청은 "관공서 안에 특정인의 기념비를 세울 수 없다는 전남도 교육청의 지시가 있었고, 월북 시인의 시비 건립과 관련해 군민 전체의 합의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라며 시비 훼손을 정당화하고 있다. '조 운 기념사업회'(회장 나두종)가 천만원을 들여 완성한 시비는 제막식도 치르지 못한 채 보기 흉한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다.

1949년 가족과 함께 월북한 조 운 시인(1900~?은 근대 문학 여명기에 빼어난 서정시와 시조를 발표하며 민족혼을 고취한 큰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역 문인과 인사 들은 지난 3월 영광읍 도동리 출신인 조 운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7월 22일 시비 제막식을 중심으로 학술토론회 ·백일장 ·시낭송회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그의 시세계를 재조명하고자 했다. 이 가운데 시비 제막식을 제외한 여타 행사는 예정대로 치러졌다.

기념사업회는 <조 운 시조집>을 발간하면서도 시인의 월북 이후 행적이나 북한에서 발표된 작품은 수록하지 않았고, 시비 역시 대표작인 <석류> 전문만 새기는 등 신중하게 추진했다. 그런데 뒤늦게 전남도교육청과 일부 지역 인사들이 반대 의사를 표명하자 시비 훼손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기념사업회는 교육청의 사과와 시비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등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전남 영광 지역은 한국전쟁 때 좌우익이 격렬하게 충돌한 곳이다. 당시 전체 인구 10만여 명 가운데 무려 3만6천여 명이 이념 대립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을 정도여서, 이에 대한 기억이 지역 정서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볼썽사납게 방치되어 있는 조 운 시인의 시비는, 남북이 새로운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지만, 분단이 남긴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새삼 확인시켜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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