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현실]''근대화''의 참담한 최후
  • 李文宰ㆍ魯順同 기자 ()
  • 승인 1998.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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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자들이 진단하는 'IMF 충격의 본질’/‘회사 인간’ 시대 마감…“정신적 황폐 극복할 철학 나와야”
최고 속력만 보고 자동차를 사는 사람은 없다. 경험이 많은 운전자는 제동 장치에 섬세한 신경을 쓴다. 자동차를 오래 탄 운전자일수록, 속력보다는 브레이크 성능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있다. 자동차는 달리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제 때에, 원하는 곳에 멈추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멈추지 않는 자동차, 멈출 수 없는 자동차가 멈추는 곳은 죽음이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라는 비유만큼 위험한 경고도 흔치 않다.

최근 정신적 공황이라고까지 규정되고 있는 IMF 충격은, 한국 사회가 지난 30년, 길게는 백 년 동안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를 타고 질주했음을 새삼 확인케 한다. ‘박정희 모델’로 불리면서, 동남아와 중국으로 수출되었던 박정희의 근대화 기획은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 수출 목표 초과 달성 등 다양한 통계 수치를 앞세워 국민들에게 ‘중단 없는 전진’을 유일한 가치로 받아들이게 했다. 이‘코리안 특급’앞에서 브레이크는 미덕이 아니었다.

코리안 특급을 멈추게 한 것은 내부의 브레이크가 아니라 IMF 구제 금융이라는 외부의 제동 장치였다. 모든 경제 주체들을 일순간 정신적 공황 상태로 몰아넣은 IMF 구제 금융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국민들은 허탈과 분노, 치욕과 억울함,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흔히 정신적 공황을 패닉(panic)이라고 표현하는데, 사전은 패닉을 ‘원인을 알 수 없는 당혹, 공포’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는 말 그대로 패닉이다.

주가와 원화 가치가 폭락하고, 기업들이 무너지는 한편, 실업자들이 거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정치가 어떻든, 사회가 어떻든 ‘나 몰라라’하고 일만 하면 먹고 살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한국 경제는 물론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 삶까지 국제 금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현실은 난데없는 것이었다. IMF 한파 앞에서 대다수 서민이 느끼는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들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억울함·분노·허탈은 공포로 이어지는데, 특히 실직이 가장 큰 공포이다. 일과 직업(회사)이 그 사람을 규정하던 시대에, 실직은 곧 죽음이다. 지난 30년 동안 보통 사람들의 삶은 회사 이전(교육 기간), 회사(일), 회사 이후(노년)로 구분되었다. 이른바 ‘회사 인간’이었다. 그들의 전부였던 회사의 시대가 사라지고 있는 사태 앞에서 회사 인간들은 망연자실, 낙담하고 있다.

IMF 한파, 박정희 시대가 배태했다

이와 같이 ‘거울 앞에 선 한국인의 얼굴’은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참담한 모습이다. 재미 언론인이며 목사인 김민웅씨는 이 시기가 “지난 시절, 풍요로 가득했던 자신감과 오만에 가까운 자기 과시가 얼마나 허무한 토대 위에 서 있었던 것인가를 확인하는 고통스런 과정이다”라고 말한다. 국가 신인도라는 외부의 평가 앞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갖지 못하는 혼란에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까지 무너지고 있다고 김씨는 말했다.

문학 평론가 도정일 교수(경희대·영문학 )는 한국 사회가 표피적으로도, 그리고 근원적으로도 이 정신적 공황의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충격이 더 크다고 지적한다. 도교수가 보기에 이 정신적 공황의 발원지는 박정희 시대이다. 박정희 시대는 문화의 변화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움은커녕 몰합리화를 가져와 근대화에 필요한 최소한의 합리주의조차 뿌리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이다. 도교수는 “자본주의가 근본적인 합리주의는 아니다. 하지만 경영 차원에서의 합리주의는 필수이다”라고 말했다.

IMF 한파에 대한 비판의 화살은 박정희 시대를 향한다(지난 대통령 선거 기간에 박정희 신화가 거세게 부활한 바 있다). 문학 평론가 서영채 교수(한신대·국문학)는 이번 충격의 원인을 ‘상명 하복 시스템 붕괴’에서 찾는다. 자기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예측하던 이들이 이 시스템, 즉 박정희 시대를 지탱하던 기본 구조가 무너지면서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들에게 이 시스템은 영구불변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이 붕괴하는 데 정권 교체가 겹쳐 불안함과 통쾌함이 이중으로 작용하고 있다”라고 서교수는 말했다.

내부의 개혁까지 억압해온 박정희 시대를 제조업 중심 사회라고 파악하는 문화 평론가 김용호씨는 IMF 시대가 제조업 시대를 마감시켰다고 본다. 제조업 사회의 엔진은 기계이며, 그 기계를 다루는 사람들은 ‘회사 인간’이었다. 김씨는 IMF 시대에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될 세대가 40대라고 본다. 조직의 명령을 떠받들던 ‘예스맨’들. 김씨는 이 40대 예스맨들을 성장 위주의 정치 시대에 적합한 인간형이라고 말한다. 개인의 주체성이나 창의성이 필요없는 수동적 인간형을 이끌었던 대기업들도 경제 조직이 아니라 정치적 조직이었다.

위와 같이 충격과 함께 시작된 IMF 시대의 원인은 거시적으로 보면 박정희 시대의 패러다임이었다. 그 인식 체계는 각 개인에게 스며들어 삶의 방식과 삶에 대한 생각을 획일화시켜 왔다. 정신과 전문의이며 <프로이트를 알면 영화가 보인다>를 쓴 김상준씨는, 그동안 멈추지 않았던 고도 성장 신화가 한국인들을 외부 지향 인간형으로 만들었다고 풀이한다. 이 외부 지향성은 정치인에서 재벌,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거의 예외가 없었다. 재벌의 크기는 외형의 크기로 통했다. 개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근대화 시기를 ‘졸부와 잡탕의 시대’로 압축하고 있는 소장 철학자 김영민씨(한일신학대 교수)는 최근의 정신적 공황이 근대화 백년이 낳은 폐해에서 비롯했다고 해석한다. 요컨대 근대화의 성과와 변화의 이면을 비판하고 보완하는 문화적인 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문화적 힘의 한 요체가 법고창신(法古創新)인데, 지난 백년 동안 한국인에게는 이 법고창신 정신이 부재했다고 김교수는 지적했다. 전통과의 맥락은 끊기고, 실체를 밝히지도 않은 채 외부와 미래만을 추구해온 나머지 극소수 재벌을 제외한 모든 서민을 졸부로 만들고 말았다는 비판이다.

IMF 충격의 원인을 더 깊은 곳에서 발견하려는 시각도 있다. <녹색 평론> 발행인 김종철씨(영남대 교수)는 “많은 사람이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안해 한다”라고 말했다. 김종철 교수는 태국인들이 바트화 위기에 부닥쳤을 때와 한국이 겪고 있는 IMF 충격을 견주면서, 한국인들의 정신적 충격이 더 큰 까닭을 농촌의 붕괴에서 찾았다. 태국은 산업화가 덜 진행된 대신 농촌이 살아 있기 때문에 태국인들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는 반면, 한국인들에게는 돌아갈 농촌이 없다. 근대화가 낳은 엄연한 현실이다.

전례 없는 대전환기, 위기인가 기회인가

IMF 시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대전환기 이다. 그렇다면 그 전환의 성격은 어떤 것일까. 한형조 교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는 이 전환기를 사상사적 관점에서 규명한다. 즉, 이 변화는 유교적 패러다임에서 도교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한교수에 의하면, 박정희 패러다임이 통용되던 최근 시기까지를 유교 시대로 구획짓는데, 유교 시대는 ‘가르칠 수는 없어도 이끌고 갈 수는 있다’는 공자의 말로 대표되듯이 엘리트 관료가 주도하는 시대였다.

한교수는 “IMF 시대가 도가적 패러다임과 어울릴 수도 있다”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개인의 주체성과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유가 시대에 견주어 도가 시대는 자율과 창의를 우선한다. 자율적이고 주체적이며 창의적인 개인들이 유기적 연관 관계를 맺는 것이다. 또한 폐쇄된 세계가 아니라 열린 세계를 전제로 한다는 측면에서도 도가적 세계는 IMF 시대의 개방 정책과 맞아떨어진다는 지적이다.

IMF 시대가 낳은 정신적 공황의 또 다른 원인은 IMF 시대가 과연 어떤 시대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국제통화기금이 요구하는 구조 조정과 개혁 정책은 한마디로 세계화이다. 김영삼 정권이 주창해온 세계화가 ‘장밋빛 환상’으로 가득했다면, 국제통화기금이 이끌어 가려는 세계화는 명실상부한 자본주의 체제이다. 그러니까 지난 3년 동안 세계화가 제대로 추진되었다면 IMF 사태는 오지 않았거나, 오더라도 현재와 같은 충격은 없었을 것이라는 비판이 가능한 것이다.

‘시장은 좋은 것이고, 국가의 개입은 나쁜 것’이라고 요약되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냉혹한 자본주의가 바로 IMF 체제이고 세계화 시대이다. 독일 시사 주간지 <슈피겔> 편집위원을 역임한 한스 피터 마르틴과 하를드 슈만이 함께 지은 <세계화의 덫>(강수돌 옮김·영림카디널)은 미국과 국제통화기금 등이 주도하고 있는 세계화의 실체와 지향성을 비판적으로 해부했다. 세계화는 민주주의와 삶의 질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은, 세계화 시대는 ‘20 대 80의 사회’라고 단정한다. 세계화 시대는 일자리를 가진 자 20%와, 일자리를 갖지 못한 자 80%로 구성되는 사회이다. 게다가 이 시대는 국가의 정치력이 세계화를 주도하는 경제 논리를 통제할 수 없는 ‘무정부 시대’라고 위 책은 비판한다.

문제의 원인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일이 문제를 극복하는 첫 단계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정신과 전문의 김상준씨는 우울증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김씨는 우울증과 경제적 공황이 같은 영어 단어(depression)를 사용하는 것에 주목하면서, 우울증에도 미덕이 있다고 말했다. 우울증과 같은 절망적인 상태에 도달해야 의식이 어느 쪽에 편중되었는지를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음을 통해 우울증 상태에서 빠져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반성과 내핍만으로는 극복 안돼

허탈과 분노, 공포와 불안은 이제 내핍의 생활로 모아지고 있다.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내핍을 생활화해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무한한 고용, 혹은 무한한 소비를 보장하지 않는다. 도정일 교수는, 30년대 대공황을 겪은 미국인들이 육화한 것은 다름아닌 ‘자본주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고 말한다. “당시 미국인들은 자본주의가 위험한 체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라고 도교수는 말했다. 구미의 근검 절약 정신은 그와 같은 고통스런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내핍의 담론만으로 이 위기를 이겨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김영민 교수는 “반성과 내핍만으로는 부족하다. 내핍을 수용하고 유지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이론이 제시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김교수를 비롯한 인문학자들이 보기에, 이 절체절명의 위기는 왜곡된 근대화가 그 원인이다. 근대화가 낳은 정신적 황폐를 극복하는 철학이 공유되지 않는다면, 이같은 위기는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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