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과거 치유하는 ‘풍자’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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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반도 현대 미술가 14인의 전시회 <새로운 미래>
붉은 깃발이 꽂힌 건물 앞을 사람들이 한가롭게 거닐고 있는, 코소보 출신 미술가 알베르트 헤타의 사진 속 이미지는 지극히 평온하다. 그런데 이 작품이 왜 올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센티네비엔날레에서 전시 도중 강제 철거되었을까.

사진이 옛 세르비아 대사관 건물에 알바니아인들의 국기를 내걸어 코소보 공화국 대사관 건물로 바꾸는 일종의 퍼포먼스였고, 이것이 세르비아인들의 비위에 거슬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작품이 달리 보인다. 코소보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안에 있는 지역으로, 1997년 독립을 주장한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발생한 곳이다.

2층 전시실 구석에는 붉은 정방형 실크스크린화 석 점이 있다. 왼쪽 패널의 미키마우스 문양에는 옛 소련의 마크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 패널에는 별 안에 미키마우스가 들어 있다. 가운데 패널에는 ‘혁명의 아이들을 업신여겨서는 안된다’는 글씨가 새겨 있다. 주크박스에서는 1970년대 록 밴드 클래시의 이나 존 레논의 같은 노래가 연신 흘러나온다. 이 정치색 짙은 작품을 만든 이는 크로아티아 출신 이고르 그루비치. 자신의 조국을 지배했거나 지배하는 두 이데올로기를 희화적으로 대비한 그는 “정작 필요한 것은 영혼의 혁명이다”라고 말한다.
당대의 정치적 명암 짙게 깔린 작품들

12월3일부터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 교류전 <새로운 미래>는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발칸 지역의 현대미술전이다. 발칸 반도, 구체적으로 옛 유고 지역에서 온 미술가 14명이 온갖 기묘한 상상과 해학을 동원해 만든 회화·영상·설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전시를 제대로 보려면 약간의 ‘예비 학습’이 필요할 듯하다. 대부분 작품이 정치적 메타포를 담고 있는 데다가, 보스니아 내전이나 코소보 사태 같은 이 지역의 근년 역사가 과거 세계사 시간에 배운 실력으로는 가늠되지 않을 만큼 현재진행형이기 때문. 예전에는 한 국민이었을 작가들 또한 지금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코소보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작품에는 이들이 겪은 민족 갈등·내전·종교 갈등 같은 아픔이 그대로 묻어난다.

전쟁 미망인들과 함께 만든 자수 작품을 선보인 세르비아 미술가 그룹 슈카르트, 성기를 드러낸 흑인 옆에 웅크리고 있는 히틀러의 모습을 몽환적인 점묘 기법으로 그린 연작을 통해 우주에 비하면 티끌 같기만 한 인간의 오만을 질타한 마케도니아 화가 알렉산더 스탄코프스키 등 발칸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에는 당대의 정치적 명암이 짙게 깔려 있다. 하지만 작품 대부분은 선동이나 구호 대신 은유와 풍자를 택하고 있다. 작가들이 과거를 끊임없이 호출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의도는 분명하다. “기억은 또 다른 치유의 기술이 될 수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스파크를 일으키며 어느 한순간 조우한다.” 수석 큐레이터 백지숙씨의 말이다.

전시는 내년 2월3일까지. 미술관측은 전시 기간에 매일 오후 2시, 4시 두 차례 설명회를 연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아빠는 출장중>(에미르 쿠스트리차 감독), <율리시즈의 시선>(테도로스 앵겔로풀로스 감독) 등 발칸 영화도 상영된다. 문의 02-760-4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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