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발판 삼아 재기 노리지만…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4.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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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81)이 재기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풍문이 나돌고 있다. 칩거하던 정씨가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보철강 입찰이 진행되던 지난 5월20일. 그는 국민 경제에 해를 끼친 것을 사과하며, 정부에 결자해지 차원에서 입찰 참여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보철강은 7월 말 현대자동차그룹의 아이앤아이스틸 컨소시엄에 넘어갔다.

정씨측은 즉각 ‘본계약 금지 가처분신청’을 서울중앙지법에 냈지만 8월 말 기각 결정을 받았다. 정씨는 이에 불복해 고등법원에 항고하는 등 여전히 한보철강 인수에 강한 집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정부와 재계의 중론이다. 그런데도 정씨가 재기하리라는 풍문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정씨, ‘러시아 기득권’ 상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정씨가 러시아 인맥이 살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재기 발판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고 관측했다. 정씨가 그런 움직임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는 지난 7월 말~8월 초 정부 요로에 진정서를 냈다. ‘러시아 정부가 추진하는 송유관 사업에 한국 기업 참여를 성사시켜 한국 경제 발전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요지였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정부 차원에서 정씨의 제의를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라고 일축했다. 정씨는 1997년 한보철강 불법대출 사건으로 1999년 8월 15년형이 확정되었으나, 5년5개월 복역한 끝에 2002년 6월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법원이 정씨의 대장암 선고를 인정한 것인데, 정씨는 그해 말 특별 사면되었다.

정씨가 에너지 사업을 재개하기 위해 암중모색하고 있다는 관측을 뒷받침하는 단서는 더 있다. 그는 지난해 11월 모스크바를 방문해 이르쿠츠크 가스전 개발권을 가지고 있는 러시아 석유회사 루시아석유(RP)의 발레리 아나톨리예비치 사장과 만났다. 하지만 이때 정씨의 행보는 별다른 눈길을 끌지 못했다. 한국가스공사와 러시아 RP, 중국국영석유공사(CNPC) 등 3개국 대표가 이르쿠츠크 가스전 개발과 이르쿠츠크~중국~서해~평택을 잇는 가스관 건설 사업에 합의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씨의 핵심 측근 이용남 동아시아가스 사장은 “그 자리에서 정총회장이 가스전 관련 사업 가능성을 타진했고 RP 사장으로부터 내년(2004년) 4~5월께 다시 협의하자는 전향적인 대답을 들었다”라고 주장했다. 이사장은 또 정총회장이 지난 3월 말 한보철강 입찰 공고가 나와 정상화 방안을 마련하느라 러시아를 다시 방문하지 못한 것이라며, 현재 정총회장만한 러시아 인맥을 가진 국내 기업인은 없다고 말했다.

인맥은 살아 있을지 몰라도, 정씨가 활용할 수 있는 러시아 기득권은 사실상 상실한 상태다. 1996년 한보철강 자회사인 동아시아가스가 에너지 사업을 벌이려고 루시아석유(RP) 지분 27.5%를 2천5백만 달러에 사들였으나 이듬해 10월 20%를 영국계 다국적 석유회사인 BP 등에 매각했고 나머지 7.1% 지분도 2000년 말에 처분했던 것이다. 1997년 한보철강 부도 때문이었다.

‘정씨 역할론’이 나오는 까닭

러시아에 교두보를 상실했음에도 재계에서 정씨 역할론이 조심스레 불거지는 것은 노무현 정부가 러시아와 에너지 협력을 강조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오는 9월19일 노무현 대통령은 러시아를 공식 방문하는데, 북한 핵 문제·시베리아 횡단 철도(TRS) 건설 외에도 가스전·유전 개발과 가스관·송유관 건설 등 에너지 협력 사업이 주요 의제로 잡혀 있다.

정씨가 언급한 송유관 건설 사업의 경우 에너지 전문가들은 족히 100억~1백50억 달러짜리 대형 프로젝트가 되리라고 보는데, 일본 정부가 이미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 일본은 러시아 정부에 70억 달러 차관을 제공하고 자국 기업이 참여하며 나홋카를 경유하는 노선을 제의했다. 나홋카 노선은 사실상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는 현재까지 공식 제의를 하지 않았으며 진출하겠다고 나선 기업도 없는 상태이다. 장영희 기자 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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