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탁한 국어’를 사랑한다
  • 고종석 (에세이스트) ()
  • 승인 1998.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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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자어와 외래어가 마구 섞인 한국어 문장에서 풍요와 세련을 느낀다. 언어 순결주의, 즉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장애인 멸시, 외국인 노동자 박해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모든 순결주의가 그렇듯 언어 순결주의도 파시즘(또는 집단주의나 전체주의 일반)에 정서의 탯줄을 대고 있다. 국어순화운동의 그 ‘순화’는 옛 전체주의 사회들의 이런저런 재교육 캠프들이나 5공 초 삼청교육대가 목표로 삼았던 순화 교육의 ‘순화’이다.

18세기 이래의 독일어순화운동이 한때 잦아들었다가 히틀러 치하에서 발작적인 동력을 얻은 것이나, 지난 세기말 이래의 조선어순화운동이 특히 분단 뒤 북한에서 크게 융성했던 것은, 언어 순화에 대한 열정과 전체주의 사이의 친연성을 암시한다.

언어 순결주의는, 이상주의적 통일운동이 그렇듯, 항진(亢進)된 민족주의의 증세다. 그런 점에서 한글학회와 범민련은, 역대 정권에 대한 그들의 상반된 입장과 상관없이 형제 단체다. ‘우익’ 한글학회와 ‘좌익’ 범민련은 실상 한국 사회 이데올로기 지형의 맨 오른편에 나란히(그리고 물론 사이좋게) 자리잡고 있다. 그들은 둘 다 ‘국수(國粹)’의 보위자이기 때문이다.

순결주의는 전체주의에 대한 옹호

언어 순결주의자들은 국어의 혼탁을 걱정한다. 그들은 국어의 어휘가 외래어에 감염됨을 걱정하고, 국어 문체가 번역 문투에 감염되어 있음을 걱정한다. 나는 국어가 혼탁하다는 그들의 진단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 혼탁을 걱정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국어의 혼탁을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은 국어의 혼탁이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외딴섬에 이상향을 세우고 쇄국의 빗장을 지르지 않는 한 국어의 혼탁을 막을 길은 없다.

순결주의자들은 우리말 어휘가 외래어에 감염되었다고 개탄한다. 특히 그들은 일본제 한자어에 대해서 히스테리를 부린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말 한자 어휘의 상당수는 그 원산지가 일본이다. 특히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문화 어휘’ 대부분은 일본인들이 서양말의 개념을 옮겨 만든 한자어가 19세기 말 이래 수입된 것이다. 펜을 집어던지고 입을 꼭 다문 채 살기로 작심하지 않는 한, 그 일본제 한자어들을 우리말에서 솎아낼 수는 없다. 무리해서라도 그 말들을 ‘순수 한국계’ 신조어로 대치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실용성은 차치하고라도 그런 작업 역시 번역 차용, 즉 일종의 베끼기일 따름이다.

순결주의자들은 또 우리말의 문체가 서양말이나 일본말에 감염되어 있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사정을 알고 보면 우리말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근대 독일어가 루터의 성경 번역문에서 출발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유럽의 다른 많은 언어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말도 예외는 아니니, 실은 서양말 번역 문투나 일본어 번역 문투 이전에 한문 번역 문투가 있었다. 한글이 창제되어 그 이전까지 단순한 ‘입말’로만 사용되던 한국어가 알량하나마 비로소 ‘글말’의 자격을 얻게 되었을 때, 그것의 출발점은 언해(諺解), 즉 중국 문헌을 번역·해설한 글이었다. 한국어 문장의 탄생·발전·정착 그 자체가 이렇듯 번역 과정이라면, 번역투 문장이 아닌 한국어 문장이 어떤 것인지 나는 상상할 수가 없다. 혹 완전한 언문일치 문장, 즉 철저한 구어체 문장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말처럼 복잡하고 정교한 경어 체계를 지닌 언어에서 완전한 언문일치는 당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국어의 혼탁을 걱정스러워하지 않는 더 중요한 이유는 내가 불순함의 옹호자이기 때문이다. 불순함을 옹호한다는 것은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의 단색 취향·제복 취향을 혐오한다는 것이고, 자기와는 영 다르게 생겨먹은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른바 토박이말과 한자어(중국산이든 한국산이든 일본산이든)와 유럽계 어휘(영국제든 프랑스제든)가 마구 섞인 혼탁한 한국어 속에서 자유를 숨쉰다. 나는 한문 투로 휘어지고 일본 문투로 굽어지고 서양 문투로 닳은 한국어 문장 속에서 풍요와 세련을 느낀다. 순수한 토박이말과 토박이 문체(그런 것이 만일 있을 수 있다면 하는 말이지만)로 이루어진 한국어 속에서라면 나는 질식할 것 같다.

언어 순결주의, 즉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박해, 혼혈인 혐오, 북벌(北伐)·정왜 (征倭)의 망상, 장애인 멸시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화’의 충동이란 흔히 ‘죽임’의 충동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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