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계에 보내는 "만가"
  • 서명숙 정치·경제부장 (sms@e-sisa.co.kr)
  • 승인 2001.12.2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설명 서명숙 : 시사저널 정치·경제부장

어디에서 보더라도 노을은 늘 아름답고 서글프다. 떠나는 이의 뒷모습이 언제나 애잔하고 쓸쓸한 것처럼.

동교동계의 맏형 권노갑 최고위원이 사퇴 성명을 내고 평당원으로 돌아갔다. 2선 퇴진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거역할 수 없는 자신의 비통한 심경을 '순명(順命)'이라는 종교적 어휘에 담아서 남기고. 그 그늘이 워낙 길고 짙었던 탓일까. 비록 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동교동계가 뒷전에서'우리가 어떻게 만든 정권이고, 어떻게 세운 당인데''왜 늘 권위원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라는 볼멘 소리도 하는 모양이다.

어찌 그런 소회(所懷)가 없겠는가. 서슬 퍼런 군사 정권 밑에서 DJ 뒤를 따른다는 것은 곧 고달픈 호구지책, 목을 죄어오는 감시, 처자식과 일가붙이들의 시련, 믿었던 동지의 배신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추운 겨울 발이 시릴세라 구두를 가슴에 품었다가 내미는 정성으로 주군을 모셨고, 모진 고문 끝에 중앙정보부에서 풀려나자마자 자기 집보다 먼저 동교동을 찾았던 그들이다. 마피아나 폭력 집단을 연상케 하는 동교동계 특유의'형님 동생'문화도 따지고 보면 그 엄혹한 시절에 서로를 핏줄보다 더 끈끈하게 얽어매는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철권 통치 아래 다들 숨 죽여 지내던 1985년 DJ의 쓸쓸한 귀국을 맞이한 이들도, 1997년 12월19일 DJ의 동교동 자택 거실에 모여앉아 주먹을 불끈 쥐고 흐르는 눈물을 훔쳤던 이들도 다름아닌 동교동 가신 그룹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였던가. 주군을 향한 동교동의 아름다운 헌신과 복종은,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잘못되고 무능한 보좌로 이어졌다. 주군의 집권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던 동교동계의 무욕은 대통령 직을 제외한 모든 자리와 이권을 챙기는 탐욕으로 채워졌다.

그뿐인가. 역경을 거치면서 싹튼 애틋한 동료애는 다른 정치 집단이나 영입파들을 완강하게 배척하는 특권 의식으로 변질했다. 불우한 시절을 함께 돌파한 동료애의 표현이었던 '형님 동생'은 다른 이들의 침범을 허용치 않는 폐쇄적인 이너서클의 구성원임을 과시하는 용어로 받아들여졌다. 당 안팎에서 동교동계를 정치 개혁의 걸림돌로 받아들이게 된 소이연이다.

한 시대를 연 세력이 새로운 시대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마는 패러독스. 이는 일본 에도(江戶) 시대의 무사 집단 하타모토(旗本)에서도 확인된다. 하타모토는 일본 전국 시대의 영웅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순명했던 가신 그룹이었다. 의리를 천하보다 무겁게 여기고 목숨을 먼지보다 가볍게 여겼던 그들은, 자기 집에 몸을 의탁한 사람은 도둑과 살인자라도 절대로 내주지 않는 독특한 문화를 자랑했다.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면 배라도 가르는 할복 문화가 이들로부터 유래했다고 하던가. 그들은 칼끝 하나에 생사가 갈리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일본 전국 시대의 살아 있는 신화였던 셈이다.

그러나 신화는 세월 따라 퇴색하기 마련. 천하를 양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의 첫 쇼군(將軍)으로 등극하자, 이들 하타모토도 막부의 행정에 진출했으나 새 역할에 적응하지 못해 주변의 비판과 원성이 드높았다. 그때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세운 막부인데'라며 크게 반발했지만, 법과 제도를 완비한 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 시대에 이르러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했다. 동교동계와 하타모토. 두 집단은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격동의 시대에 목숨을 걸고 주군에게 충성했다는 점에서 닮았다. 정권 획득 과정에서 일등 공신이었지만 수성 과정에서는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점에서도 닮은꼴이다. 투쟁기 무사에서 통치기 행정가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 또한 비슷하다.

세월은 늘 무심하고 시대는 언제나 가파르다. 무정한 역사의 흐름은 거스를 수도 없거니와 , 굳이 서러워할 일도 아니다. 일세를 풍미했던 하타모토가 스러지듯이, 한 시대의 소임을 다한 동교동계도 무대에서 퇴장할 수밖에 없다. 21세기의 첫해가 그렇게 저물어 간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