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평-김소희 · 김봉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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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2.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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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볼
심오함과 섹시함
양다리 걸치기-김소희



제목이 <몬스터 볼(Monster’s ball)>이라고 해서 괴물들이 공놀이를 하거나 파티를 벌이는 장면이 영화 속에 나오지는 않는다. 원래의 뜻은 사형수가 처형되기 전날 지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뜻하는 속어라고 한다. 그렇다고 사형 제도가 옳은지 그른지 생각해보라는 영화도 아니니 미리 입장 정리를 할 필요는 없겠다.


<몬스터 볼>은 심오함과 섹시함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우선 심오한 이야기부터 살펴보자면, 이 영화는 편견이 인간을 얼마나 부패시킬 수 있는가를 끔찍할 정도로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굳이 괴물과 비슷한 인물을 꼽으라면 주인공 행크의 아버지인데 인종 차별, 증오와 의심, 여성에 대한 무시, 부드러움에 대한 경멸 등으로 똘똘 뭉쳐 있다. 자신의 상황에 대한 성찰 없이 평생을 살아온 노인의 영혼은 몹시 황폐해져 있다. 그 악취가 아들과 손자를 물들인다.


또 한 축으로는 피부 색깔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주인공 레티샤는 흑인이고 남편은 교도소에서 사형을 당했으며 아들은 제 한 몸 가누지도 못할 만큼 뚱뚱하다. 비만한 흑인 아이의 미래가 어떨지 뻔히 아는 레티샤가 아들을 위해 하는 일이라곤 “이 돼지야, 그만 좀 먹어!”라고 소리 지르는 것뿐이다. 그녀 자신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 바쁘고 점점 술에 중독된다. 이쯤 해서 행크와 레티샤가 우연히 만난다.


<몬스터 볼>을 보다 보면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레티샤처럼 늘씬하고 예쁜 여성, 행크 정도의 분위기와 카리스마를 가진 남성이 그렇게 징징거리며 인생을 산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멜로 코드가 진행될수록 드라마의 심오함이 삐거덕거리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특히 레티샤와 행크의 정사 장면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이 영화의 의도 하나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레티샤 역의 할리 베리로 하여금 관객 서비스를 확실히 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녀의 몸은 무척 멋지다.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무대 인사차 나선 할리 베리는 “인생의 어려움을 다룬 영화들에 대해서 할리우드는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었다. 할리우드에 대해 반감과 우월 의식을 가진 유럽 관객에게 부린 애교가 적중한 것일까. 여우주연상이 할리 베리에게 돌아갔다. 그 후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도 받았는데 이 때 그는 “흑인 여성이 이 자리에 서기까지 74년이 걸렸다”라는 말로 또 한번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 영화의 심오함은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속죄와 용서 문제인데, 행크의 비밀을 알게 된 레티샤가 어떻게 했을까. ‘정답이야 뭐 사랑 아니겠어?’라고 생각하는 분은 영화를 직접 보면서 자신의 예지력을 검증해보시는 것이 좋겠다.






어긋난 삶에 대한
연민과 응시-김봉석



흑인 여배우의 첫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빌리 보브 손턴과 할리 베리의 5분 간에 걸친 노골적인 정사 장면. <몬스터 볼>이 일찌감치 화제에 오른 것은 그런 이유다.


하지만 정사 장면은 에로틱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남편과 아이를 차례로 잃은 레티샤는 유일하게 다정히 대해주던 행크에게 부탁한다. 나를 그냥, 기분이라도 좋게 해 줘요. 모든 것을, 삶의 목적까지도 잃어버린 레티샤는 즐거움이나 기쁨 같은 것이 자신에게 과연 남아 있는지 알고 싶어한다. 행크도 그 순간 알게 된다. 아직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기쁘게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행크와 레티샤는 다시 세상을 바라본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심정은 욕정이나 호기심이 아니라 연민과 응시다.


<몬스터 볼>은 관객을 숨막히게 한다. 이 영화에는 음악이 거의 없다. 주변이 시끄럽지도 않다. 그들의 말소리와 아주 작은 생활 소음들만이 귀를 간지럽힌다. 음악이 먼저 관객의 감정을 이끌어가는 경우도 전혀 없다. 관객은 숨을 죽이고 <몬스터 볼>을 볼 수밖에 없다. 이야기들도 그렇게 흘러간다. 눈앞에서 아들이 자살하고, 바로 장례식 장면으로 바뀐다.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마크 포스터 감독은 관객이 사건에 몰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주의 깊게 그들의 삶을 바라보기만을 원한다.


<몬스터 볼>의 인물들은 인연으로 얽혀 있다. 레티샤의 남편을 사형집행한 교도관은 행크와 소니 부자다. 심리적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행크가 아들 소니를 폭행하고, 행크에게 대들던 소니가 자살한다. 그 일로 행크는 교도관을 그만두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없었다면 레티샤가 행크와 가까워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행크와 레티샤는 수없이 많은 실로 엮여 있다.


행크의 삶은 천장에서 맴도는 선풍기 같았다. 아버지가 요구하는 대로 묵묵하게 따랐다. 흑인을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인종차별주의자인 아버지처럼 흑인을 경멸하고 적대시했다. 교도관을 한 것도 아버지 때문이다. 하지만 소니는 다르다. 소니는 흑인 아이들과도 친하게 어울리고, 교도관을 하기에도 마음이 너무 여렸다.

소니의 길은 할아버지와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행크는 아버지가 그랬듯 소니에게 같은 길을 강요했다. 총을 겨누며 소니는 말한다. 나를 미워하죠? 그래, 언제나. 나는 언제나 아버지를 사랑했어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소니는 자살한다. 소니는 죽음으로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행크는 그 가르침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몬스터 볼>은 그 변화를 보여주는 것에 만족한다.


<몬스터 볼>은 전혀 극적이지 않다. 극적인 사건들도 아주 담담하게 그려낸다. 뭔가 흥미진진한 사건이나 격정적인 감정을 원한다면, <몬스터 볼>은 어울리는 영화가 아니다. 그저 담담하게 세상의 진실을 바라보고 싶은 사람들이 볼 만한 영화다. 현재의 삶이 무엇인가 어긋나고 있다거나,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는 생각을 강하게 한 적이 있다면 충분히 <몬스터 볼>에 공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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