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길 위에 또 다른 세상 있었네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3.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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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때 가볼 만한 ‘옛길’ 여행지 / 때 묻지 않은 비경 곳곳에
빨리빨리 달려야 하는 ‘직선 도로’가 늘면서 길 위에서 맛보는 정취가 사라지고 있다. 지금도 도처에서 길을 새로 닦는 공사가 한창이다. 새 길들은 사람과 물건을 빨리 나르기 위해 ‘옛길’보다 넓고, 옛길보다 더 곧다. 그러나 여행객에게 새 길은 마약과 같다.

한순간 속도감에 취할 수 있으나 길 위에서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처 급하게 달릴 수 밖에 없는 새 길 위에서는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갈 뿐이다.

하지만 느리게 넘어가는 고갯길과 구불구불한 옛길은 다르다.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볼거리가 지천이다. 특히 동해 쪽으로 넘어가는 ‘느린 길’ 주변에는 볼거리가 풍성하다. 휴가 중에 눈을 씻어주고, 마음을 살찌울 만한 ‘꼬부랑길’을 몇 곳 소개한다.



동해를 향해 가면서 영동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국도를 택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멀리 에돌고, 시간이 훨씬 더 걸린다. 남원주에서 중앙고속도로로 옮겨 탄 뒤 제천-영월-태백을 거쳐 동해로 가는 길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길은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 빼어난 풍광과 심금을 울리는 역사를 함께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월에 도착하는 순간 여행객들은 ‘어느 것부터 볼까’ 하고 머리가 복잡해진다. 곤충박물관(033-373- 5888)과 책박물관(033-372-1713), 단종의 묘가 있는 장릉과 단종이 어려서 감금되었다는 섬 아닌 섬 청령포는 필수 코스. 시간 여유가 있다면 더 에돌아서 어라연과 동강, 정선 소금강을 ‘훑고 지나가도’ 좋다.

강원랜드 카지노 탓에 한 집 건너 한 집이 전당포인 고한을 지나면 ‘남한에서 가장 높다’는 싸리재(1268m)가 나온다. 싸리재는 요즘 슬프다. 가슴에 터널이 뻥 뚫린 탓이다. 터널 오른편 길로 싸리재를 오른다. 차량 통행이 뜸한 길에는 쑥과 작은 나무들이 길섶까지 나와 자라고 있다. 굽이진 길은 마치 ‘인생은 쉬엄쉬엄 사는 게야’ 하고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정상 휴게소(함백산쉼터)에서는 한낮인데도 퀴퀴한 술 냄새와 함께 <카츄사> 같은 유행가 자락이 애절하게 흘러나왔다. 휴게소 주인은 지지난해 가을에 터널이 생긴 뒤 고개를 넘는 차가 20분의 1도 안 된다며 울상을 지었다.싸리재에서 태백으로 넘어가는 길가에 있는 3억년 전 용연동굴과,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추전(싸리밭)역도 볼거리이다. 8월1∼8일 태백 쪽을 지나는 여행객이라면 영화 상영과 각종 문화 행사를 여는 ‘태백산 쿨 시네마 페스티벌’에 끼어도 근사할 것 같다. 각종 영화와 함께 문화 행사가 펼쳐지기 때문이다(문의 033-550-2081).

태백에서 임계로 올라가는 35번 국도 초입에 있는 피재(920m)는 높이에 비해 전망이 답답하다. 그러나 왼쪽 매봉산 쪽으로 올라가면 딴세상이 펼쳐진다. 드넓은 산마루에 고랭지 채소밭을 일구었는데, 마치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구겨놓은 듯 독특하고 아름답다. 임계와 삼척 사이에 있는 백봉령(780m)은 그 옛날 동해안의 소금이 정선으로 넘어오던 고개다. 그곳에서는 삼척과 동해의 파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과거에는 소금 지게를 진 사람들이 고개를 넘었지만, 지금은 80%가 덤프트럭이었다. 산은 트럭들의 난폭한 질주와 석회암 탄광 탓에 흉하게 망가져 가고 있었다.

삽답령(680m)은 임계에서 강릉으로 가는 5번 국도에 있다. 19년째 삽답령을 지키고 있다는 송순난 할머니(75)는 입담이 구수했다. 송할머니에 따르면, 삽답령은 소금과 해산물을 져나르던 옛 사람들이 삽으로 길을 내며 오르내려서 붙은 이름이다. 송할머니의 입심 덕일까. 좁고 침침한 휴게소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옥수수를 갈아 천연 누룩으로 만든 동동주, 산에 묻은 갓김치를 둘둘 말아 부친 전병, 3년 묵힌 열무김치가 송순난 할머니가 자랑하는 메뉴.
삽답령을 넘어서자 왼편으로 아담한 정자가 나타난다. 왕산면 도마2리에 있는 금선정(琴仙亭)이다. 앞쪽 계곡으로 맑은 물이 호탕하게 흘러내렸다. 계곡을 따라 조금 올라가자 뜻밖에도 민박집이 떡 버티고 서 있다. 민박집 뒤란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널따란 화강암 반석 위로 맑은 물이 콸콸콸…. 주인 최연옥씨는 방 2개가 있는데 “하룻밤 빌려주는 데 3만원씩 받는다”라고 말했다(문의 033-647-3025). 이제 강릉이 코앞이었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곧장 나아가면 쪽빛 바다가 있는 강릉과 주문진이 나온다. 그러나 속사 인터체인지에서 31번 국도로 운전대를 돌리면 전혀 다른 바다가 펼쳐진다. 감자밭·옥수수밭·배추밭으로 이루어진 초록 바다. 그 바다 위로 1km쯤 달리다보면 오른쪽에 방아다리약수터(약수터) 표지판이 나타난다.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가며 손을 내미니 한여름 바람인데도 서늘하다. 차에 달린 온도계를 보니 21℃. 서울이 30℃라니까 9℃나 차이가 나는 셈이다. 해발 900m. 그 고개 너머에 약수터가 있었다. 약수터 입구는 하늘을 찌를 듯한 아름드리 전나무숲이었다. 그 우거진 숲속에 약수터와 약수산장이 있었다. 산장 뒤쪽으로는 마루가 있고, 그 밑에 장작을 가지런히 쌓은 집이 서너 채 흩어져 있었다.

아마도 아직까지 군불로 방을 데우는 모양이었다. 방문을 열어보니 절간처럼 깨끗한 방에 이불 두 채가 가지런히 개켜 있고, 천장에 작은 형광등 하나가 달랑 걸려 있다. 일흔이 넘어 보이는 주인은 하루 숙박비가 3만원이고, 성수기에도 변동이 없다고 말했다(문의 033- 335-7480).

규산·라듐·칼리·탄소·산화철이 들어 있다는 약수는 진했다. 한 모금 쭉 들이켜자 몸 속이 짜르르하다. 안내판에 따르면, 이 곳 약수는 위장병·피부병에 효험이 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이 함경남도 삼방약수와 함께 (조선의) 으뜸 약수로 꼽기도 했다. 약수터 입구 그림판에는 월정사와 상원사가 가까이 있었다. 잠시 그곳에 들를까 하다가, 결국 31번 국도로 되돌아 나왔다. 운두령(1089m)은 고속도로와 달리 한갓졌다. 고개는 소리 없이 서로 다른 마을을 연결해주고 있었다. 양쪽에서 헉헉거리며 올라온 차들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미끄러지듯 이내 반대쪽으로 사라져 갔다.

한쪽으로 계방산(1577m)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었다. 왕복하는 데 드는 시간은 3시간 반 정도. 계방산은 산삼이 많기로 소문난 산이며, 우리 나라에서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다음으로 높다.

창촌으로 내려와 56번 국도로 갈아타자 길이 텅 비었다. 그곳에서는 시간도, 구름도, 촌로의 걸음걸이도, 꽃을 찾아다니는 나비의 날갯짓도 모두 느려 보였다. 텅빈 길을 달려 빨려 들어가듯 계곡 안쪽으로 나아간다. 너와집을 지나고, 삼봉산 자연휴양림 팻말을 지나는데 구룡령쪽 기상이 심상치 않다. 운무가 뽀얗게 산머리를 뒤덮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구룡령(1060m)은 짙은 운무에 휩싸여 있어서, 그야말로 오리무중이었다. 7년째 휴게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김귀자씨(44)는 1년 365일 가운데 반 정도를 안개에 묻혀 산다며 웃었다. 그리고 근처에 구룡·갈천·불바라기 약수터가 있는데, 그중 구룡약수터 물맛이 가장 낫다고 말했다.

구룡령 주위에는 아직 때묻지 않은 곳이 많다. 양양 쪽으로 내려오다가 서림에서 418번 지방도를 타면 두메 중의 두메로 알려진 아침가리골과 진동리에 닿는다. 그리고 구룡령 허리춤에서 446번 지방도를 타면 그 유명한 삼둔 사가리가 나온다. 그 외에도 미천골 휴양림이나 방태산 휴양림도 하룻밤 묵어 갈 만하다. 애잔한 느낌을 전하는 미천골의 선림사지도 빼놓지 말고 들러야 할 곳.

이 외에도 백두대간에는 고갯길이 많다. 북으로는 진부령 한계령 미시령, 중부 이남에는 고치령 죽령 하늘재 새재 화령…. 이들 고개 역시 수많은 볼거리와 사연을 간직한 채 ‘느긋한여행객’을 기다리고 있다. 이 여름, 그 길을 따라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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