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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런치 모드와 파랑새 증후군

[권상집 교수의 시사유감] 4차 산업혁명 창의성 시대에 노동 근면성만 강조하는 대한민국

권상집 동국대 경영학부 교수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7.03(Mon) 16:4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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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연구에 의하면 취업에 힘들게 성공했더라도 근무시간이 길면 결국 구성원들은 더 나은 직장을 꿈꾸는 ‘파랑새 증후군’을 겪을 확률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근무시간이 길수록, 그리고 현 직장 외에 다른 조직에서 근무한 사람일수록 파랑새 증후군이 더 많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건 우리나라 노동 현실을 다시 한 번 날카롭게 꼬집는 것 같아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사실 파랑새 증후군은 2000년 이후 해마다 언론에 단골로 등장한 키워드이다. 뚜렷한 질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지치는 만성피로 증후군과 현재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더 나은 탈출구를 희망하는 파랑새 증후군은 현재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삶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노동생산성과 연간 노동시간은 선진국 대비 최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연평균 국내 노동시간은 2113시간으로 OECD 평균인 1766시간보다 무려 347시간이나 많다. 쉬지 않고 하루 평균 1시간 정도를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선진국보다 더 많이 근무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에 비해 노동생산성은 2015년 기준으로 31.8달러에 그쳐 OECD 평균인 46.8달러의 70%에도 못 미치고 있다. 해당 통계수치만 보더라도 국내 직장인들이 얼마나 눈치 보기 야근을 많이 하는지 또는 국내 기업들이 생산성이나 기업 성과와 무관한 방향으로 얼마나 노동 강도를 높이고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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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등 유럽 강소 국가들은 평균 65달러를 상회하는 노동생산성을 보이고 있다. 노동생산성이 높은 국가의 공통된 특성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확대, 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고용 보호 합리화, 비정규직에 대한 안전망과 높은 최저임금 등이 꼽히고 있다. 국내에서도 2100시간이 넘는 살인적인 노동시간이 주는 생산성 저하를 막기 위해 연 1800시간 미만 노동시간 상한제, 노동시간 축소와 신규 일자리 창출 등을 각종 시민단체에서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기업들은 인건비 부담을 호소하며 노동 유연성을 강조해왔고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신규 일자리는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만을 호소하고 있다.

 

국내 경제가 50년도 안 걸리는 짧은 기간에 세계 경제규모 10위권에 해당하는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동자들의 근면성실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 차원에서는 산업역군을 육성한다는 미명 아래 1963년 노동법 개정과정에서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명칭까지 변경했다. 노동(勞動)이라는 단어는 한자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일하다’라는 단순 개념을 내포하고 있지만 근로(勤勞)라는 개념은 ‘일하다’라는 의미 앞에 ‘부지런하다’를 강조함으로써 ‘힘을 들여 부지런히 일함’을 국가 차원에서 산업역군의 필수 요건으로 부각시켰다. 부지런히 일하고 남들보다 더 오래 일해야만 선진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패러다임이 지난 50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것이다.

 

1963년 이후 강조하기 시작한 ‘근로’의 개념이 지난 50년간 우리 사회를 지탱해 왔고 실제로 성공한 국내 기업의 CEO들 역시 자신의 성공담을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며 회사를 위해 자신이 얼마나 희생해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치열하게 젊음을 바쳤는지를 강조하며 젊은이들에게 보다 열정 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역설해 왔다. 그러나 이미 선진국은 근면성실에서 벗어나 창의성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고, 실제 글로벌 기업에서도 구성원들에게 더 많은 복지와 근무시간 단축을 제공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키워드인 인공지능, 빅데이터 분석, 사물인터넷 등 창의성 기반 경쟁은 근면성실로는 결코 이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장기간의 노동시간을 통한 성과 창출은 1900년대 초반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론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 개념이다. 테일러가 사람을 기계로 보고 노동자들에게 돈만 더 주면 성과를 낼 수 있다고 강조한 기계적 사고는 안타깝게도 여전히 국내 기업 CEO들의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다. 과거 제조업 시절 그리고 창의성이 중요한 요소가 아닌 시기에 강조됐던 노동시간 연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인 이 시점에도 일부 기업가들이 공공연하게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고 서비스업, IT업종 등 미래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분야에서도 ‘크런치 모드(Crunch Mode)’라는 업계 은어를 통해 조직 구성원들의 근로를 부추기고 있다.

 

게임업계의 화두였던 ‘크런치 모드’는 쉽게 말하면 중요한 게임 출시를 앞두고 일정 기간 동안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 근무에 있어서 강행군을 지속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지난해 한 게임 회사에서 장기간 크런치 모드가 진행되면서 일부 구성원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가운데 크런치 모드라는 용어가 더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게임업계의 은어라기보다 일반 IT업계에서도 보편적으로 부르는 용어로 간주하는 것이 조금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IT업계에서도 이미 크런치 모드를 진행하고 있는 기업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창의성이 가장 필요한 IT업종에서 오히려 제조업 마인드인 근면성실을 강조하는 상황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비단 크런치 모드로 화제가 되고 있는 업종이 게임 또는 IT업계뿐인가. 국내 대기업 사옥은 불이 꺼지지 않는 빌딩으로 외국에서도 이미 유명하다. 1990년대 후반, 국내 D그룹의 회장은 임원들에게 ‘위기가 극복될 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말 것’을 선포했고 2000년대 중반 모 그룹의 총수는 경쟁사 사옥이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데 본인 회사의 사옥은 일찍 불이 꺼져 있는 점을 발견해 구성원의 안일함을 질타하며 당분간 조건 없는 야근을 명령했다. 여전히 국내 대기업의 CEO와 임원들은 별을 보고 출근하고 별을 보고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고생했으니 퇴근해”가 아니라 “씻고 와”라는 말이 모 기업 임원들 사이에 일상적으로 통용됐던 말이다.

 

경영학 연구에서 구성원들의 야근이나 과로가 기업의 성과, 직무만족도, 창의성과 혁신을 창출하거나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논문은 단 한편도 없다. 특히, 4차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현 시기에는 글로벌 기업가들 역시 더 많은 자율성과 근무시간 단축, 활발한 의사소통, 일과 삶의 균형(Work and Life Balance)을 강조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구성원들에게 근면성실을 요구하는데 비해 글로벌 기업들은 왜 위의 사항들을 보편타당하게 제공할까? 모든 경영학, 심리학 연구에서 구성원들이 자율성과 소통, 일과 삶의 균형을 경험할수록 긍정적인 감정과 자신감이 형성되고 그 결과 창의성과 혁신을 더 높이 발휘할 수 있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부 기업들의 야근과 과로를 대변하는 크런치 모드를 해소하기 위해 법적, 제도적 절차를 손질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지만 실제 효과를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게임 및 IT산업을 특례업종으로 신설하거나 근무시간 축소와 일자리 창출 등의 정부 대책은 단기적 관점에서만 효과적일 뿐이다. 실제 크런치 모드의 한 가운데 있는 구성원들은 언제나 ‘경영자의 철학과 생각’이 바뀌길 기대하고 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경영자의 생각이 바뀌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아는 모 중견기업 경영자는 “근무시간을 축소하라고 정부에서 명령해도 빠져나갈 구멍은 많다. 본인 경험상 야근해야 성과도 더 창출할 수 있다”는 점을 지금도 주장하고 있다.

 

인간존중경영이라는 패러다임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지 벌써 40년이 다 돼간다. 1980년대 초반 이후 우리나라의 모든 경영학 교과서에 인간존중경영이라는 키워드가 반영됐지만 여전히 현실은 인간외면경영만 진행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 창의성과 혁신을 활발히 창출하는 이유는 인간을 존중하고 배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한 명 한 명의 구성원이 자신의 숨겨진 잠재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주관적 견해가 아니라 글로벌 경영학자가 수십 년간 연구해서 내린 보편적인 결론이다. 파랑새 증후군에 시달리는 국내 근로자들은 경영자의 인재관이 바뀌길 지금도 절박하게 호소하고 있다. 경영자들이 열린 귀로 그들의 숨죽인 호소를 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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