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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강한 색 ‘블랙’, 영화계 주류로 떠오르다

최초의 흑인 슈퍼 히어로 다룬 마블의 도전 《블랙 팬서》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3.02(Fri) 15:00:00 | 14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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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를 열광케 하는 흑인 슈퍼 히어로의 등장. 검은 옷을 입은 전사 《블랙 팬서》의 흥행세가 거침없다. 한국에서 지난 2월14일 개봉해 이틀 만에 100만, 일주일 만에 350만 관객을 돌파하며 연일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북미에서는 19일에 개봉해 이틀 만에 이미 2억4000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 흥행 양상보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이 영화를 둘러싼 사회적 반응이다. 마블의 첫 흑인 슈퍼 히어로인 이 영화는 블랙 필름(Black Film)의 계보 안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지금 《블랙 팬서》는 단순히 잘 만든 한 편의 슈퍼 히어로 영화를 넘어 하나의 현상이 되고 있다.

 

 

슈퍼 히어로 영화까지 나간 ‘블랙 필름’

 

블랙 필름의 정의는 다양하다. 일반적으로는 흑인 제작진과 배우가 출연하고, 흑인의 역사와 생활양식을 그린 영화를 의미한다. 인종이 다른 제작진이 만든 흑인 이야기도 넓은 의미에서 블랙 필름에 포함된다. 과거 스파이크 리 감독의 《똑바로 살아라》(1989)나 《말콤 X》(1992)처럼 치열한 투쟁사를 그린 작품이 주를 이뤘다면,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된 2010년대 들어서는 보다 다양한 결의 영화들이 쏟아지며 ‘뉴 블랙 시네마’의 전성기가 열렸다.

 

1952년부터 34년간 백악관에서 대통령의 곁을 지킨 흑인 집사 세실 게인즈의 일생을 다룬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2013), 메이저리그에서 등번호 42번을 달고 활동했던 흑인 야구 선수 재키 로빈슨의 일대기를 담은 전기영화 《42》(2013, 국내 미개봉), 재즈 거장 마일스 데이비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마일스》(2015) 등은 실화에서 건져올린 감동 드라마이자 2010년대에 등장한 대표적 블랙 필름이다. 이 흐름의 중심에는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노예 12년》(2013)이 있다. 흑인 감독 스티브 매퀸이 1840년대 노예로 납치돼 살았던 솔로먼 노섭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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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실화 소재 영화만 줄을 이은 게 아니다. 장르적으로도 한층 다양해졌다. 북미에서 흥행한 코미디 시리즈 《라이드 어롱》(2014~16, 국내 미개봉), 지난해 국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던 호러 《겟 아웃》(2017) 같은 영화도 등장했다. 흑인 소년 리틀의 성장 스토리를 그린 드라마 《문라이트》(2016)는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이 영화를 연출한 베리 젠킨스 감독은 차기작으로 인종차별에 맞서 남편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할렘가 여성이 주인공인 멜로 《이프 빌 스트리트 쿠드 토크(If Beale Street Could Talk)》를 준비 중이다.

 

일련의 흐름은 드디어 슈퍼 히어로 장르와도 맞닿았다. 앞서 마블은 흑인 영웅의 단독 영화를 선보이기 위해 차곡차곡 준비해 왔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에서 첫 등장한 티찰라(채드윅 보스만)는 눈앞에서 일어난 테러로 와칸다의 왕이자 아버지 티차카(존 카니)를 잃었다. 와칸다 왕조 전통에 따라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와칸다를 수호하는 영웅 ‘블랙 팬서’로 거듭나야 한다. 《블랙 팬서》는 티찰라가 에릭 킬몽거(마이클 B 조던) 등 왕좌를 노리는 숙적들의 음모와 도전을 이겨내고 진정한 왕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극 중 와칸다는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안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비브라늄을 다수 보유하고, 이를 발판으로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국가로 묘사된다. 현대 과학과 의학은 와칸다의 기술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다. 동시에 와칸다 사람들은 선조들로부터 내려온 전통과 법도를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세계로부터 자발적으로 숨은 것으로 그려진다. 그간 할리우드가 아프리카를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풍부하게 가진 국가들의 대륙으로 묘사한 적이 거의 없음을 상기할 때, 이 같은 묘사는 고무적이다.

 

인종 차별에 저항했던 흑인들만의 탱크부대 이름이 ‘블랙 팬서’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각각 마틴 루터 킹과 말콤 X를 연상시키는 티찰라와 킬몽거의 대립 등을 떠나서라도, 제작진과 배우 대부분이 흑인으로 구성된 이 영화는 아프리카와 흑인 역사의 뿌리를 잊지 않고 영화에 녹여내고 있다. 극 중 와칸다에 전해 내려오는 흑표범 신화 및 부족들 간 관계 묘사는 실제 아프리카 역사에서 비롯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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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히어로 영화가 시대와 조응하는 법

 

타임지와 CNN 등 북미 주요 언론은 《블랙 팬서》가 단순한 영화가 아닌 하나의 저항이자 운동(movement)이라 보고 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 유저들 사이에서는 이미 ‘나에게 블랙 팬서란’이라는 뜻의 해시태그 ‘WhatBlackPantherMeansToMe’가 유행하고 있다.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이 새로운 영화를 본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미셸 오바마 등 오피니언 리더들의 발언도 큰 지지를 얻는 중이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 “당신들(《블랙 팬서》 제작진) 덕분에 젊은 세대가 드디어 극장에서 자신과 닮은 영웅을 마주하게 됐다”며 “이 영화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자신만의 서사를 지닌 영웅으로 거듭나는 용기를 발견케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흑인 배우 옥타비아 스펜서는 미시시피주에 있는 상영관을 빌려 영화를 볼 기회를 얻지 못한 어린이 관객들에게 티켓을 선물했다. 사업가, 시민단체들이 추진하는 단체관람 움직임도 잇따르고 있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블랙 팬서》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블랙 팬서를 연기한 채드윅 보스만은 “아프리카엔 왕조(empire)가 없고, 건축학이 없으며, 예술이 없고, 과학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이 영화를 보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킬몽거를 연기한 마이클 B 조던은 “이 영화가 앞으로 나아갈 우리(흑인) 문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이 영화에는 나키아뿐 아니라 전사 오코예(다나이 구리라), 왕국의 공주이자 뛰어난 테크니션 슈리(레티티아 라이트) 등 강렬한 여성 캐릭터들이 다수 등장한다.

 

《블랙 팬서》가 흑인 문화와 역사 그리고 강인하고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활용하는 방식은 근사하다. 이 영화는 인종과 젠더, 차별과 혐오 등 현시대가 가장 예민하게 안고 있는 이슈들에 대해 오늘날의 슈퍼 히어로 영화가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모범 답안이다. 이야기 자체는 수십 년 전 코믹북 안에서 태동했으되, 그것을 단순히 스크린에 불러오는 것을 넘어 시대와 적절하게 조응하는 영화로 재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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