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동맹’도 못 말리는 ‘독재 본색’
  • 조홍래 편집위워 ()
  • 승인 2007.11.12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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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 비상사태 선포…‘테러 전쟁’ 의식한 미국은 우물쭈물

 

파키스탄은 1999년까지는 촉망되는 민주 국가였다. 그러나 1999년 10월12일 운명의 날이 왔다. 페르베즈 무샤라프가 쿠데타를 일으켜 나와즈 샤리프 총리의 민선 정부를 전복하고 스스로 대통령과 군 최고 사령관에 취임했다. 그로부터 8년간 철권 군부 통치가 시작되었다. 극단주의 이슬람 노선을 배격하고 스스로를 온건한 진보주의자로 표방한 무샤라프의 행적은 온건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결국 그는 지난 11월3일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헌법을 정지시켰다. 명분은 국가의 ‘진정한’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극단주의 세력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으나 속셈은 달랐다. 그는 군복을 벗지 않은 채 5년 임기의 대통령에 재출마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합법 여부를 가릴 대법원의 판결을 무산시키고, 내년 1월로 예정된 총선거를 무기한 연기함으로써 사실상 장기 집권을 도모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파키스탄 헌법은 군인의 공직 출마를 금지하고 있다. 그는 대법원장을 파면하고 헌법을 정지시키는 한편 비상 조치에 항의하는 수백 명의 정치인·법률가·인권운동가들을 체포했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에 전폭적으로 협조한 무샤라프의 파키스탄을 ‘가장 중요한 동맹’의 하나로 보고 9·11 이후 거의 10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제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졌다. 파키스탄 북부에서 준동하는 알 카에다, 탈레반, 오사마 빈 라덴과 싸우기 위해서는 무샤라프를 계속 지지해야 하지만 세계 전역에서 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신장한다는 2기 취임 선서의 대의는 퇴색했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는 비상 사태 선포 다음날 엉거주춤한 성명을 발표했다. 파키스탄이 민주주의의 길로 순탄하게 전진하기를 원하며 선거도 예정대로 실시하기를 바란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원조를 중단한다는 말은 없었다. 미얀마 군부에 강력한 제재를 경고한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이다. 부시와 무샤라프는 처음부터 동상이몽의 동거 관계였다. 부시가 무샤라프에게서 가장 기대하는 것은 테러리스트 소탕이다. 무샤라프는 다른 흑심을 가졌다. 겉으로는 테러 분자들을 소탕하는 척하면서 미국으로부터 최대한 원조를 얻어내 군부 집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을 방문 중인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를 재고할 것이라고 말했으나 부시의 최대 관심 사항이 테러와의 전쟁임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전면적 원조 중단은 없을 것임을 시사했다. 베이징을 방문 중인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도 원조는 재검토하되 미국에 대한 파키스탄의 전략적 중요성과 테러와의 전쟁에서 주요 파트너로서 파키스탄의 존재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두 장관의 발언에 부시의 진심이 묻어 있다. 미국이 이번 사태에서 취한 가장 강력한 조치는 기껏 양국 안보협의회 개최를 연기한 것뿐이다. 이것도 영구히 연기한 것이 아니라 사태가 호전되면 다시 개최할 예정이다. 미국이 파키스탄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제재의 한계와 고뇌를 보여주는 처사이다. 

 
  
무샤라프의 측근들은 미국이 과잉 반응을 보이는 것에 불만이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왜 난리를 치느냐는 투이다. 이들은 심지어 미국이 속으로는 민주주의보다 안정을 더 바라면서 국제적 시각을 의식해 법석을 떨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의 판단은 사실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만 찾다가 파키스탄이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손에 들어가는 사태를 미국은 바라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 무샤라프 정권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끔찍하다. 우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테러와의 전쟁이 어려워진다. 더욱 가공할 일은 파키스탄에 극단주의 정권이 들어설 경우 이 나라의 핵무기가 이스라엘과 인도를 겨냥할 수도 있다. 게다가 북한 등 불량 국가들에게 핵 물질을 제공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이 나라가 핵을 마구 확산할 경우 대책이 없다. 부시가 파키스탄의 민주주의보다 무샤라프의 존재와 그의 협조를 더 중시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한 마디로 부시의 자업자득이다. 백악관 관리들도 이를 비공식적으로 인정한다. 파키스탄에 대한 정책에 관한 한 미국 조야의 목소리는 한결 같다. 좋게 말하면 국익 앞에서 단결하는 미국 외교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나쁘게 보면 강대국의 편의주의 혹은 이중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국무부 관리들은 심지어 내년 1월로 예정된 총선이 한 1년 더 연기된들 뭐 그리 대수이냐는 태도까지 보인다. 워싱턴 관리들은 파키스탄의 민주주의와 혼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보다는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데 주력한다. 사실 부시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파키스탄이 극도의 혼란에 빠져 오사마 빈 라덴이 활개를 치면서 테러를 자행하는 상황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미국은 파키스탄에서조차 유사한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강대국의 편의주의·이중성 그대로 드러나

그러나 비상사태 선포 이후의 상황을 가볍게 취급할 수 없는 것 또한 미국의 고민이다. 8년간의 망명 끝에 귀국한 부토 전 총리는 이번 사태를 ‘제2 쿠데타’로 규정했다. 비상사태를 초래한 촉매제였던 그녀로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어느 때보다 격렬한 국민의 저항에 자신도 놀라고 있다. 외교관들은 그동안 암살 음모, 신임 투표, 계엄 등 많은 위기를 극복한 무샤라프가 집권 기간 중 최악의 저항에 직면했다고 입을 모은다. 미얀마 군부를 향해 강력한 응징을 선언했던 부시가 무샤라프에 대해서는 계속 침묵을 지키는 모습에서 그의 딜레마를 엿볼 수 있다. 앞으로 군부 통치에 대한 저항이 더 거세지고 무샤라프의 입지도 좁아지면 부시의 선택도 어려워진다.
테러 분자 소탕보다는 독재 강화에 더 열중하는 사태에 대한 부시의 인내가 얼마나 갈지도 변수이다. 일부 미국 관리들은 무샤라프가 애당초 테러와의 전쟁에는 관심이 없다고 불평했다. 파키스탄 북부의 이슬람 부족 세력은 알 카에다 및 탈레반과 밀접한 유대를 형성하고 무샤라프 전복을 노린다. 파키스탄 군부 내 일부 세력은 북부 저항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설도 있다. 더욱 비극적인 상황은 파키스탄 내에서 오사마 빈 라덴의 인기가 무샤라프보다 높다는 점이다. 북부 부족 지역은 사실상 무샤라프의 통제 밖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지난 6년간 눈먼 돈을 퍼부었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는 9·11 이후 미국이 파키스탄에 제공한 원조 100억 달러 중 테러와의 전쟁에 투입된 액수는 60%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나머지 돈은 군부 독재 유지에 사용되었다.
무샤라프 측근들은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비상사태 선포로 정부 입지가 강화되어 테러 분쇄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미국은 계속 무샤라프를 밀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2~3년간 선거와 민주주의는 잊어버려라. 그것이 알 카에다를 이기는 유일한 길이고 그것을 실행할 사람은 무샤라프뿐이다.” 무샤라프 측근의 이 말은 파키스탄 사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익명을 요구하는 워싱턴의 외교관은 비상사태 선포의 진짜 속셈은 무샤라프가 쇠락하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사실라면 종점으로 가는 권력자에게 무조건적 지원을 계속하는 부시의 정책도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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