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바치고, 전쟁 찬양하고…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09.12.0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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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 바치고, 전쟁 찬양하고…

▲ 1. 1932년 5월1일 일본 아사히 신문에 실린 윤봉길 의사 체포 추정 사진. 윤의사를 체포해가는 자들 중에 한국인도 있었을지 모른다.2. 3·1운동 당시 일본 경찰에 끌려가는 독립투사. ⓒ연합뉴스


친일 청산은 광복 후 우리 사회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하지만 굴곡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는 차일피일 뒤로 미루어졌다. 자랑스러운 역사 못지않게 부끄러운 역사의 진실 또한 규명되어야 당연한데도 제대로 된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근에야 그 성과가 나왔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는 4년6개월의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친일반민족 진상규명 보고서를 내놓았다. 국가 차원에서 친일 행적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에 앞서 민족문제연구소도 착수 8년 만에 4천3백83명 친일 인사의 명단과 행적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다. <시사저널>은 두 자료를 통해 주요 인사를 중심으로 한 친일파 명단을 정리했다. 이들 중에는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 지도층으로 활동한 인사가 적지 않다.

[정치] 한·일합병 주도한 ‘조선 귀족’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백작, 자작, 남작에 봉작된 이른바 ‘조선 귀족’ 중에는 은사공채와 토지 등을 제공받는 특혜를 누리는 대신 국권 침탈의 토대가 된 조약들을 체결 또는 조인하는데 앞장선 이들이 많다. 이완용을 비롯해 권중현·박제순·이근택·이지용 등 ‘을사 5적’이 대표적이다. 친일파로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이완용은 1905년 11월17일에는 학부대신으로서 을사조약을 주도했고, 2년 뒤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한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에도 앞장섰다.

‘을사 5적’은 아니지만 고영희도 이완용 등과 함께 고종황제 폐위를 모의하고 양위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한 송병준은 일진회 평의원장, 회장 대리, 총재를 거치면서 일본군을 지원하고 한·일합병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변사로서 각종 강연에 참여하기도 했다.

갑신정변을 이끈 박영효는 1911년 9월9일 조선 귀족의 친목 도모와 함께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협력과 참여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 귀족회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한·일합병을 주도했던 윤덕영도 이 은행의 감사와 고문을 맡아 식민 지배를 도왔다. 이밖에 고중덕·이종승·이경우 등은 학병에 지원한 귀족들이다.

[관료] 식민 지배에 자발적으로 협력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관료는 군수, 참여관, 도지사로 승진하는 과정에서 식민 통치와 침략 전쟁에 적극적이며 지속적으로 협력했다. 군수 가운데 일부가 참여관으로 승진하고 다시 그중에서 일부만이 도지사에 오를 수 있었다. 도지사를 지낸 이후에는 조선총독의 자문 기구인 중추원 참의로 추대되어 특권을 이어가기도 했다. 강필성·김동훈·유만겸·이원보·이진호·정교원·정연기 등이 이 과정을 거쳤다.

일제하 식민지에서는 사법권도 조선총독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판사와 검사 등 사법 관리는 총독부의 치안 유지 및 질서 확립 등 식민 통치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다.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탄압도 그 역할 중 하나였다. 친일 명단에 오른 판사와 검사 대부분도 항일독립운동 재판에 참여했다.

이들 중에는 광복 이후 대법관을 지낸 김두일·김세완·백한성·변옥주 등도 포함된다. 김두일은 1932년부터 약 10년간 판사로 재직하면서 함북 명천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석수학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김세완과 백한성도 항일독립운동 사건 재판에 각각 8건과 11건 참여했다. 변옥주는 1940년 변호사를 그만두고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약 5년간 판사로 재직하면서 두만강 일대에서 항일무장 투쟁을 전개한 손태춘에게 징역형을 선거하는 등 15건의 항일독립운동 사건 재판을 맡았다. 이외 10건의 항일독립운동 관련자 재판에 참여한 김준평은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부장판사까지 승진했다. 검사로서는 약 30년간 재임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수사하고 재판한 민변성을 비롯해 임영찬·최호선 등이 명단에 올랐다.

군인의 경우 만주국군의 간부로서 특히 간도특설대에서 항일 세력을 탄압한 이들이 다수이다. 강재호·구동욱·백선엽·송석하·신현준·오문·홍청파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중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평가받기도 하는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의 이름이 가장 눈에 띈다. 백 전 총장은 1959년 대장으로 예편하고 성우회 회장까지 지냈다. 소장으로 예편한 송석하 전 국방대학원장도 광복 이후 승승장구한 군인 중 한 명이다. 이밖에 재향군인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백홍석 전 육군참모총장은 경성 육군병사부 과장을 지내면서 병력 동원을 담당했다.

경찰로는 사이토 암살 미수 사건 관련자와 밀양 폭탄 사건을 주도한 의열단원을 체포한 김태석, 동래고등보통학교 동맹 휴업 사건 관련자를 취조·고문하는 등 악명이 높았던 노덕술 등 모두 77명이 명단에 올랐다. 김태석은 군수 등 관료를 거쳐 중추원 참의까지 지냈으며, 노덕술은 광복 이후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김면규는 종로경찰서 순사부장으로 있으면서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고문했다.

[경제] 수탈의 첨병인 국책 회사에 참여

일제의 경제 침탈 과정에서 친일 경제인들은 화폐 재정 정리 사업과 같은 제도 정비 사업에 협조하고, 정책 수행의 첨병 역할을 한 국책 회사의 설립에 참여하거나 임원으로 활약했다. 중추원 참의를 지낸 문명기는 광제회 이사장, 황도선양회 회장을 지냈으며, 국방헌금 10만원을 내 육군과 해군에 비행기 각 1대씩을 헌납했다.

화신백화점 창업주인 박흥식은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를 비롯해 군수업체인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사장을 맡았다. 이 회사의 발기인인 김연수·민규식·장직상 등도 친일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삼양그룹 창업주인 김연수는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의 학병 지원을 독려했으며, 조선군 참모장으로부터 감사장을 수령하기도 했다.

전북자성회 회장을 지낸 백남신과 중추원 참의를 지낸 백인기는 부자지간이다. 아버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위원이었고, 아들은 이 회사의 감사로 활동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아버지인 백낙승은 일본무연탄제철주식회사 사장을 지냈다. 국방헌금으로 8만5천원과 비행기 1대를 기부했다. 조선총독부 조선금융제도조사회 위원을 지낸 백완혁과 조선총독부 산업조사위원회 위원을 지낸 조진태는 일제하에서 ‘3대 거상’으로 불렸다.

[교육언론] 신문사 사장에 민족 대표까지 

교육 부문에서는 대학 설립자가 다수 포함되었다. 고려대를 창립한 김성수 전 동아일보 사장은 홍아보국단 준비위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과 감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등을 지냈다. 매일신보 등에 징병을 찬양하고 학병 동원을 독려하는 글도 다수 올렸다. 김활란 이화여대 설립자도 조선임전보국단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으로서 학병제를 선전했다. 이 밖에 고황경 서울여대·배상명 상명대·박인덕 인덕대 설립자 등도 명단에 올랐다.

언론인으로는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이 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후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참사와 사무국 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또, 일제의 지배와 침략을 찬양한 잡지 <조광>을  발행하면서 일제 침략에 협력을 선동하는 논설을 기고했다. <동양지광>을 발행한 박희도는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지만 이후 친일 행위를 펼쳤다.

종교 부문에서는 역시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였던 최린도 포함되어 있다. 천도교 현법사와 장로 등을 역임하면서 천도교단의 친일 협력을 주도했고, 조선임전보국단 단장 등을 지내면서 내선일체와 전쟁 협력을 선동하는 글을 기고하고 강연도 했다. 독립운동가 손병희 전 교주의 사위인 정광조는 국민총력천도교연맹 이사장을 맡는 등 친일 협력에 나섰다. 1980년 애족장을 받았지만 1996년 취소되었다.

감리교 목사인 박연서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독립장을 받았지만 역시 1996년 취소되었다. 백낙준 전 연세대 총장은 기독교신문협회 이사 등을 지내면서 시국 관련 설교와 사설을 집필하고 게재해 명단에 올랐다.

[문화] 유명인 다수 포함

학술·문예·예술 부문에서는 이름이 낯익은 유명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사학자이자 문인인 최남선은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기초해 체포되기까지 했지만, 이후 중추원 참의까지 지내는 등 다양한 친일 활동을 펼쳤다.

시인으로는 노천명·모윤숙·서정주 주요한 등이 명단에 올랐다. 대부분 학병·징병을 선전하고 선동했다. ‘사슴의 시인’으로 불리는 노천명은 조선문인보국회와 국민총력조선연맹 행사에 적극 참여했다. 매일신보와 <조광>, 시집 <창변> 등에 발표한 시를 통해 침략 전쟁을 옹호하고 전사자를 찬양했다. 조선문인협회 간사를 역임한 모윤숙도 시와 강연 등을 통해 침략 전쟁을 미화했다.

미당 서정주는 1943년부터 <춘추> <조광> ·매일신보 등에 친일 작품을 발표했다. ‘스무 살 된 벗에게’ 등 산문과 <최체부의 군속 지망> 같은 소설, <헌시-반도학도 특별지원병 제군에게> 같은 시가 있다. <불놀이>의 주요한은 대동아공영권과 침략 전쟁을 찬양하고, 국민훈련후원회 일본어 보급 운동에 앞장섰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민의원을 거쳐 상공부장관을 지내는 등 정치가로 활략했다.

소설가로는 김기진·이광수·정비석 등이 있다. 김기진은 조선언론보국회 이사를 지내면서 일제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주장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쓴 이광수는 시와 소설은 물론 방송 활동을 통해서도 학병 지원을 선전했다.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 및 회장을 지냈고, 조선문인보국회 이사 및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정비석도 각종 단체 활동을 통해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선동했으며,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로서 일본 남방종군작가 환영교환회 등에 출석하기도 했다.

연극·영화인으로는 유치진이 가장 눈에 띈다. ‘국민 연극’을 표방한 극단 현대극장을 창립하고, 희곡과 평론 및 기행문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했다. 조선연극협회 이사, 영화기획심의회 위원, 조선문인보국회 이사 등을 지냈다. 화가 김기창은 매일신보에 징병제 실시를 기념하는 시화를 게재하고, 잡지 <춘추>에 해군지원병 제도를 선전하는 표지화를 그렸다.

작곡가 현제명은 징병제 실시 축하 연주회와 학병 장행회 연주회 등에 출연했으며, 식민 통치와 전쟁 협력을 돕는 작곡 발표를 했다. 라디오 방송 군가 지도, 전함 건조 기금 헌납 등도 친일 행적으로 꼽힌다.


이의 신청에서 행정 소송까지…반발하는 후손들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이름이 오른 일부 인사들의 후손들은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률적으로 ‘친일’로 규정한 것은 부당하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번 조사의 경우 대상자 선정에서부터 이의 신청이 적지 않았다. 총 1백24건의 이의 신청이 있었고, 이 중 9건은 인용이 되어 조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이 난 뒤에도 74건의 이의 신청이 제기되었다. 정치 부문에서 송병준·이근호, 관료 부문에서 김세완·백한성·백선엽, 경제 부문에서 문명기, 교육·언론 부문에서 김성수·김활란·방응모, 종교 부문에서 백낙준·이동욱, 문화 부문에서 최남선·김동인·서정주·유치진 등이 위원회의 결정 이후 이의 신청을 했지만 모두 기각되었다.

소송도 이어지고 있다. 김연수 전 삼양사 명예회장의 후손들은 이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취소 청구 소송을 제기한 상태이다. 후손들은 “경성방직 이름으로 일제에 국방헌금을 낸 적이 있지만, 이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 기업 존립과 종업원의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라고 주장했다. 소설가 김동인의 후손들도 최근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 “문학 작품을 친일·반일이라는 정치적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라는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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