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태씨 수사,박정희 전 대통령이 지시했다”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12.02.26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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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중앙정보부 부산 지부장 박용기씨, <시사저널>에 당시 상황 최초 증언

최근 정수장학회 문제가 정치권의 화두로 떠올랐다.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이사장을 지낸 정수장학회 반환 청구 소송에서 고 김지태씨의 유족이 패소했기 때문이다. 법원은 국가의 강압으로 재산을 넘긴 사실은 인정했지만 시효가 지나 반환 청구는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시사저널은 지난 2004년 정수장학회 탄생의 비밀을 담은 문건을 단독으로 입수해 보도한 바 있다. 이후 문화방송의 기부 승낙서가 변조된 사실 등을 밝혀내는 등 정수장학회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최근 불거진 정수장학회 문제는 긴 기간동안 진행된 복잡한 문제다. 선거의 해인 2012년 정수장학회 문제가 이슈로 떠오른 지금,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2004~2005년)의 기사들을 소개한다.

1962년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이었던 박용기씨(75)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박씨는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1962년 중앙정보부 부산지부가 5·16장학회(현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를 설립한 고 김지태씨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던 배경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가 있었다고 전격 증언했다. 

이른바 ‘김지태 사건’ 수사 책임자였던 박씨의 육성이 직접 언론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시사저널>은 8월11일 이후 그와 여섯 차례에 걸쳐 장시간 통화했고,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을 통해 관련 자료 일체를 확보했다. 


“재산 몰수 반대해 박정희 눈 밖에 났다”

정수장학회 전신인 5·16장학회의 설립 과정에 대한 의혹이 증폭되는 가운데 나온 박씨의 증언은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이 문제는 이제 강압이냐 헌납이냐 하는 논란에 마침표를 찍고 정수장학회의 향후 행로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정수장학회 이사장인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반응도 더욱 주목되게 되었다. 

박용기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1962년 초 부산에 내려온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단둘이 만났을 때 박 전대통령이 (5·16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를 설립한) 김지태씨를 수사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라고 말했다. 부정 축재, 탈세뿐 아니라 혁명 사업에 비협조적이었던 김씨의 행적 등을 조사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박씨가 1963년 고 김지태씨의 유족에게 보낸 편지(<시사저널> 제772호 20쪽 참조)에서 언급한 ‘(나를) 조종한 인간’이라는 표현은 박 전대통령을 지칭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 박 전 대통령이 언급했다는 ‘혁명 사업에 비협조적이었던 행적’은 “5·16을 일으키기 전 박 전대통령이 선친에게 요구한 혁명 거사자금 5백만환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5·16 이후 부일장학회 등을 빼앗겼다”라고 주장하는 고 김지태씨 유족의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다음은 박씨와의 전화 인터뷰 내용이다. 그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기자와 직접 만나는 것을 피했고, 뒷모습이라도 찍게 해달라는 사진 촬영 요청도 “후배들에게 늙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라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고 김지태씨를 1962년 중앙정보부 부산지부가 수사한 배경은 무엇인가?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산에 내려오면 먼저 나와 독대했다. 1962년 초 독대했을 때 그가 김씨를 수사하라고 직접 지시했다. 

무어라고 하면서 수사하라고 했나?

박 전대통령이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을 때 김지태씨에 대해 그리 좋은 인상을 가졌던 것 같지 않다. 김지태씨가 자신이 소유한 부산일보사 등을 배경으로 해 탈세를 했다고 보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수사를 시작했나?

당시 중앙정보부법에는 전·현직 국회의원이나 장관 등 고위 인사에 대한 수사를 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보부장의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고 김지태씨는 1950년부터 1958년까지 2,3대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씨와 관련해 광범위하게 정보도 수집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 아닌가.

그렇다.

JP의 승인을 받아 김씨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는 말인가?

당연하다. 

김씨가 5·16에 비협조적이었나?

그것에 관해서는 아는 바 없다. 단, 박정희 전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이자 당시 부산일보 주필이었던 황용주씨가 ‘5·16 직전 김씨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해 김씨가 보복을 당한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구속할 정도로 김지태씨의 혐의가 무거웠나?

정보를 수집한 결과 그가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었다. 4·19때 학생들이 부산일보에 몰려가 항의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 부산일보 내부에서도 김씨에 대해 많은 정보가 흘러나왔다. 김씨를 부정축재 혐의로 수사한 데 대해서는 지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조사 과정에서 부산일보 등을 ‘헌납’받는 조건으로 김씨를 풀어주자는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이 사실인가?

나는 수사와 재산 헌납은 별개라고 보았다. 죄가 있으면 벌을 받는 것이지 그것이 왜 재산 헌납과 연결되어야 하는지 의문스러웠다. 수사 과정에서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이자 계엄사령관이었던 김용순 장군이 찾아와 ‘각하(박정희)한테 연락이 왔는데’라며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이 자리 내놓더라도 (그렇게는) 못해’라며 강력히 반대했다. 개인 재산을 뺏는다는 것은 그때도, 지금도 반대다.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 가만 있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중에 들으니 노발대발했다고 하더라. 그 일로 나는 그의 눈 밖에 났다.

고 김지태씨가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등의 포기 각서에 도장을 찍은 것을 두고 강탈이라는 주장과 헌납이라는 주장이 맞선다.

재산 강제 헌납·몰수이다. 

김씨가 재산 포기 각서에 도장을 찍는 과정에 당신은 개입하지 않았나?

나는 그런 사실 자체를 사후에 보고받았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 부하 직원으로부터 당시 최고회의 법률고문인 신직수씨가 김씨를 직접 방문해 도장을 받아갔다고 보고받았다. 화가 나더라. 고원증이라는 사람이 김씨로부터 도장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던데 처음 듣는 얘기다. 나는 고씨를 모른다.

김씨가 구속되어 있는 동안 당국자들이 번갈아가며 (재산을 포기하라고) 김씨를 회유·협박했다는 말이 있다.

중앙정보부 부산지부 직원이 김씨를 찾아간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만약 그런 사실이 있다면 내가 할복 자살하겠다. 위에서 (김씨에게)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산지부에서는 안 갔다. 내가 강력하게 반대했는데….

1963년 김씨에게 ‘사과 편지’는 왜 보냈나?

당시 회식 자리에서 육사 4기생으로 농림부장관을 지낸 조신형씨를 만난 적이 있다. 그가 ‘김지태씨가 성모병원에 입원해서 병문안을 갔는데, 알고보니 성격이 강직하더라며 당신을 칭찬했다. 시간 있으면 한번 김씨를 방문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어쨌거나 내가 그를 수사해 구속한 책임자였기 때문에 인간적인 동정심에서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나중에 김씨가 회고록에서 마치 내가 사과 편지라도 보낸 것처럼 써놓았다는 말을 듣고 김씨에게 또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또 보냈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사실이다. 1970년대 후반쯤으로 기억한다. 지난번에 보낸 편지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냈던 것이니 엉뚱하게 이용하지 말아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으면 복사본이라도 남겨놓았을 것이다. 김씨 유족이 왜 내가 보낸 2신은 자서전에 공개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전말을 알기 위해 사람을 보낸 적이 있다던데.

1963년인가 담당관을 보낸 적이 있다. 내가 그를 상대할 이유가 없어 ‘부장이 직접 오라고 해’라고 호통을 쳐 돌려보냈다.

정수장학회는 앞으로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보는가?

모르겠다. 단지 나는 (김지태씨의) 재산을 뺏는 데 관여하지 않았고, 거기에 반대했다는 것을 분명히 할 뿐이다.

고 김지태씨 유족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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