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열풍] 어벤져스: 히어로들을 떠나보내며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5.13 08:00
  • 호수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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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맨과 로건, 그들과의 작별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히어로 영화를 향해 “3000만큼 사랑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경험은 희귀한 것이다. 그 드문 일이 《어벤져스: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에서 벌어지고 있다. 당최, 무슨 일인가.

《엔드게임》은 ‘지구 절반을 가루로 만들어버린 타노스에 맞서 잃어버린 5년의 시간을 회복하고자 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라고만 요약해 버리면 살짝 허무하다. 관객들의 정서를 건드리고 급기야 눈물 흘리게 하는 감흥의 정수는 아이언맨이라 불렸던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은퇴식이었다. 

토니 스타크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머리가 비상해 15세에 MIT 공대에 입학했다.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린 나이에 ‘스탁 엔터프라이즈’ 회장이 됐다.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그는 타인 공감 능력이 떨어졌다. 윤리에 둔감했다. 치명적인 살상 무기를 팔아 부를 축적했다. 사생활은 방탕했다. 술과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어벤져스: 엔드게임》

토니 스타크로 태어나 영웅으로 떠나다 

그러던 중 게릴라군에 납치돼 무기 제작을 강요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곳에서 그는 전쟁 무기의 참상을 본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한 토니 스타크는 이전의 토니 스타크가 아니었다. 아이언맨 슈트를 입은 후 지구를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영웅으로서의 삶은 쉽지 않았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트라우마도 겪었다. 상실감도 맛봤다. 그리고 세상 그 누구보다 이기적이었던 이 남자는 여정의 끝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세상을 살린다. 개인의 행복 대신 대의를 선택한다. “나는 아이언맨!(I am Iron Man!)” 토니 스타크로 태어나, 영웅으로 죽는다. 

혹자는 슈트가 없는 토니 스타크는 평범한 억만장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 핑거 스냅을 선택한 건 슈트가 아니다. 토니 스타크의 마음이 한 일이다. 슈트를 입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건 어렵다. 슈트가 없어도 토니 스타크는 영웅이었다.    

아이언맨을 연기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지금의 마블 공화국을 이끈 개국공신이다. 2008년 《아이언맨》 이후 총 11개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 짧고 굵게 출연했다. 11년 동안 아이언맨은 곧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였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곧 아이언맨이기도 했다. 토니 스타크가 방탕한 삶을 살다가 변화하는 과정은 마약으로 자신의 삶을 망가뜨렸다가 재기한 다우니의 인생과 겹친다. 캐릭터와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분신처럼 붙어 서로에게 영향을 준 경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남기고 간 슈트는 또 다른 배우가 입을 테지만, 그 누구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같을 순 없을 것이다.

지난 4월 《엔드게임》을 들고 내한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아시아 정킷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8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저는 젊었고 여러분 대다수는 어렸습니다. 멋지게 성장한 여러분을 보니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MCU는 현실에는 없는 판타지다. 하지만 이 세계 안에 쌓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팬들의 추억은 리얼이다. 그의 마지막을 자꾸 돌아보게 되는 이유다. 《엔드게임》은 슈퍼히어로가 퇴장하는 방법에 대한 좋은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2017년 《로건》(왼쪽), 2009년 《엑스맨 탄생: 울버린》의 휴 잭맨
2017년 《로건》(왼쪽), 2009년 《엑스맨 탄생: 울버린》의 휴 잭맨

영웅으로 살았던 울버린, 아버지 로건으로 죽다

아이언맨을 떠나보내며 울버린이라 불렸던 로건(휴 잭맨)을 떠올렸다. 마블의 개국공신이 아이언맨이라면, 《엑스맨》 시리즈의 출발은 휴 잭맨이다. 그는 2000년 《엑스맨》을 시작으로 카메오 출연을 포함해 이 시리즈에 총 9번 출연했다. 그리고 지난 2017년 《로건》을 통해 팬들과 안녕을 고했다. 

울버린/로건은 늘 외로웠다. 자가 치유 능력인 ‘힐링 팩터’는 타인에겐 부러움일 줄 모르나 그에겐 재앙이었다. 그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남겨진 상실감, 누군가를 지켜내지 못한 미안함이 그의 인생을 지배했다.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다. 그래서 그가 가장 두려워한 건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지 않는 방법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을 벌했다. 이 아련한 사내의 삶을 무엇으로 구원할 수 있을까. 아니, 애당초 그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울버린/로건은 《로건》에 이르러 강한 힘을 지닌 ‘히어로 울버린’이 아닌, 늙고 지친 모습으로 등장해 충격을 안겼다. 그런 로건 앞에 정체불명의 집단에 쫓기는 소녀 로라(다프네 킨)가 나타난다. 울버린의 DNA에서 배양돼 태어난 돌연변이, 즉 딸이다. 로건은 두려웠다. 또다시 지켜야 하는 것이 생긴다는 것이. 하지만 외면하지 못했다. 특유의 기질 때문이기도 했지만, 로라에게서 자신을 봤기 때문이리라. 로라를 구하기 위해 떠난 여정은 어떻게 보면 지독히도 고독했던 울버린을 구원하는 여정이었다. 노쇠한 로건은 로라를 지키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초능력이 감퇴한 로건을 지탱한 건 마음이었다. 의지였고, 안간힘이었다. 지켜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을 괴롭혔던 로건은 로라를 지켜냄으로써 자신과도 화해한다. “So, this is what it feels like(이런 느낌이었군).” 로건은 세상과 작별하며 죽음의 감각을, 그리고 가족이란 이름의 정의를 온몸에 새겼다. 영웅으로 살았던 울버린은 아버지 로건으로 죽는다. 

이 영화에서 휴 잭맨의 주름과 휘청거리는 육체는 그 자체가 서사로 기능했다. 31세에 《엑스맨》에 입사한 휴 잭맨은 울버린과 함께 늙었다. 떠나야 할 때를 아는 자의 뒷모습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로건》은 17년간 장기 근속한 휴 잭맨에 대한 더없이 아름다운 헌사였다. 

울버린을 내려놓으면서 휴 잭맨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제가 사랑했던 캐릭터와 이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 됐어요. 영화는 끝이 났지만 역할은 내면에 남아요. 단순히 캐릭터의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가기 때문이죠.” 울버린은 떠났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 마음속에서. 그들은 고통 없는 그곳에서 편히 쉬고 있을까. 

캐릭터와 아름답게 이별하는 법

팬들과 아름답게 작별한 캐릭터는 아이언맨과 울버린 외에도 있다. 전 세계에 마법 돌풍을 일으킨 《해리포터》 시리즈는 16년 동안 총 8편의 작품이 팬들을 만났다. 시리즈 1편이 시작할 때 귀여운 꼬마였던 세 주인공 해리(대니얼 래드클리프), 헤르미온느(엠마 왓슨), 론(루퍼트 그린트)은 마지막 편에 모두 어엿한 청년이 됐다. 누군가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본다는 건, 그리고 세간의 관심 속에서 성장한다는 건, 배우에게도 팬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비록 컴백을 예고하긴 했지만) 15년간 이어진 《토이스토리》 3부작의 엔딩은 전 세계에 눈물 주의보를 발령하게 만들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어느덧 대학에 들어갈 나이가 된 앤디(존 모르스)와 장난감들의 마지막은 성숙한 이별의 정의를 새기며 커다란 감흥을 안겼다. 본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엔드게임》은 캡틴 아메리카/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의 은퇴식으로 바라봐도 당연히, 충분히, 굉장히, 유의미한 작품이다. 그의 퇴장은 아이언맨과는 또 다른 색깔의 감흥을 안긴다. 1편 《퍼스트 어벤져》에서 사랑하는 여인 페기 카터(헤일리 앳웰)와의 데이트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스티브 로저스는 긴 시간을 돌고 돌아 그 약속을 지킨다. 이토록 로맨틱한 은퇴식을 본 기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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