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석 “서울 주변 신도시 건설은 해법 아니다”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9.05.21 08:24
  • 호수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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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주년 특별 기획] 대한민국, 길을 묻다 (18회) 차일석 전 서울시 부시장
‘여의도 개발 주역’ 차 전 부시장…“지금이라도 지방도시 적극 육성해야”

혼돈의 시대다. 혹자는 난세(亂世)라 부른다. 갈피를 못 잡고, 갈 길을 못 정한 채 방황하는, 우왕좌왕하는 시대다. 시사저널은 2019년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특별기획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각계 원로(元老) 30인의 ‘대한민국, 길을 묻다’ 인터뷰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인터뷰한 시점에 맞춰 정해졌다.

ⓛ조정래 작가 ②송월주 스님 ③조순 전 부총리 ④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⑤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⑥김원기 전 국회의장 ⑦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  ⑧박찬종 변호사 ⑨윤후정 초대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⑩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⑪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 ⑫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⑬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⑭이종찬 전 국회의원 ⑮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⑯ 박관용 전 국회의장 ⑰ 송기인 신부 ⑱ 차일석 전 서울시 부시장 

서울시가 펴낸 《서울 600년사》(1996년)는 폐허였던 서울이 오늘날 세계적인 도시로 우뚝 솟은 배경을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했다. “김현옥 이전에 김현옥 없었고, 김현옥 이후에 김현옥 없었다.” 

김현옥이 누군가. 육사 3기로 5·16 군사정변 때 군을 이끌고 부산 시내를 장악해 박정희 소장의 눈에 든 인물이다. 군사정변 직후 부산시장에 오른 김현옥은 1966년 서울시장에 취임, 서울의 대대적 변신을 주도한다. 박정희 정권 시절 3대 관선(官選) 서울시장으로 김현옥(14대)-양택식(15대)-구자춘(16대)이 꼽히는데 그중 단연 돋보인 이는 김현옥 시장이다. ‘돌격’이라고 쓴 헬멧을 쓰고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은 김 시장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청계·삼각지 고가도로, 강변북로, 여의도 개발이 김 시장의 대표작이다. 이러한 혁명적 도시 개발에 이론적 뒷받침을 한 이가 있다. 바로 차일석 전 서울시 부시장(전 서울신문 사장)이다.

차 전 부시장은 미국 뉴욕 아델파이대와 뉴욕대를 졸업한 뒤 연세대 교수로 있다가 5·16 군사정변 후 전국공무원교육준비위원회(가칭)에 참여하면서 공직과 인연을 맺는다. 당시 모임에는 김상협(고려대·전 국무총리), 김옥길(전 이화여대 총장), 남덕우(서강대·전 국무총리), 이현재(서울대·전 국무총리), 이희승(서울대), 최호진(연세대), 홍성유(서울대) 교수 등 한국 현대사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1966년 불도저 김현옥 시장이 취임하면서 서울의 대역사는 시작됐다. 취임 후 김 시장이 전격 발탁한 이가 바로 차 전 부시장이다. 교수 출신을 최고위 행정 관료로 발탁한 것은 당시로선 파격에 가까웠다. 김 시장이 앞에서 뛰었다면, 차 전 부시장은 미국 뉴욕에서 배운 최첨단 도시행정·도시계획 기법을 현장에 적용하는 일을 맡았다. 

ⓒ 시사저널 임준선
ⓒ 시사저널 임준선

세종로 지하도는 대림산업이 1원 받고 만들어

지금은 그저 그런 지하도에 불과하지만 1966년에 만든 세종로 사거리 지하도는 당시만 해도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하도’로 불렸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9월30일 개관식이 열렸다. 다음 날인 10월1일에는 세종대로에 대규모 국군 퍼레이드가 예정돼 있었다. ‘이 지하도 위를 중무장한 기갑차량들이 줄을 이어 달릴 수 있을까.’ 박 대통령은 은근히 걱정부터 앞섰다.

“임자, 이(지하도) 위를 전차가 지나가도 괜찮나.”(박정희 대통령)

“걱정 마십시오, 각하. 지금 지하도 밑에 차 부시장이 있습니다.”(김현옥 시장)

제대로 된 시공기술마저 없었던 세종로 지하도는 단 5개월 만에 공사를 끝마쳤다. 단돈 1원의 공사비만 받고 대림산업이 시공을 맡은 것도 당시로선 화제였다. 물론 다음 날 국군의 날 퍼레이드는 아무 사고 없이 성황리에 끝났다. 이 밖에도 서울의 대변신에는 늘 차 전 부시장이 중심에 있었다. 

차 전 부시장과의 인터뷰는 5월7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진행됐다. 인터뷰가 있었던 당일 정부는 경기도 부천 대장동과 고양 창릉동 일대를 3기 신도시로 개발할 거라고 발표했다. 소식을 들은 차 전 부시장은 “수도권 그린벨트를 풀어 아파트를 짓겠다는 발상은 정부가 앞장서서 인구를 수도권에 집중시키겠다는 뜻”이라면서 “분명 나중에 이런 곳에서 빈집이 속출하고 학교가 문 닫는 현상이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미국 유학길에 오르셨더군요. 

“이래봬도 제가 국가유공자예요. 죽으면 국립묘지로 갑니다(웃음). (왼쪽 이마를 가리키며) 여기 상처 보이시죠? 금화(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일대)전투 때 다친 상처예요. 부대 대위하고 사단본부로 가는데 우리가 탄 차가 계곡으로 떨어졌지 뭡니까. 살기 위해 뛰어내렸는데, 그때 바위를 들이받으면서 크게 다쳤지요.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겨 전역 후인 1953년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탔어요. 학창 시절 미국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운 게 유학 때 큰 도움이 됐지요.”

미국에서도 뉴욕을 유학지로 선택하셨네요.

“부친이 목포에서 외과의사로 활동하셨어요(차 전 부시장의 부친은 일본강점기 규슈(九州)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한국 최초 외과 전문의 차남수 선생이다). 조부는 황해도 실향민이셨고. 부친이 좀 더 넓은 세상으로 가라고 하셔서, 미국 유학을 떠났던 겁니다. 어릴 적에 제가 선교사님들과 공부하면서 몇 번 물은 적이 있어요. 세계에서 제일 큰 도시가 어디냐고요. 그랬더니 다들 ‘뉴욕’이라고 하는 겁니다. 샌프란시스코와 솔트레이크시티, 덴버, 시카고, 피츠버그를 거쳐 도착한 뉴욕은 정말 엄청난 곳이었어요.”


“뉴욕 맨해튼 모델 삼아 여의도 개발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행정학을 전공하셨더군요. 이 또한 당시로선 흔치 않은 일 아닌가요.

“그때 해외로 유학 떠나는 사람들이 죄다 정치학이나 철학을 공부했어요. 저도 그럴까 생각했는데 막상 미국에 도착하니 정치학은 영 적성에 맞지 않더군요. 부친 뜻도 그랬고. 유학생활 중 뉴욕의 나소(Nassau)카운티 도시계획국에서 인턴생활을 했는데 ‘도시계획은 도로나 구조물 건설이 전부가 아니며, 인간에게 어떻게 하면 더 안전하고 편한 환경을 보장할 수 있느냐는 것’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그때 배웠습니다.”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게 도시계획의 기본’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제가 나온 뉴욕 아델파이대학은 정치학(Political Science)보다 행정학(Government Science)으로 유명했어요. 학창 시절 숱하게 들은 말이 도시계획의 기본입니다. 사람들이 편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이죠. 시가 시민들로부터 재산세를 받는 것도 결국 그런 이유 때문 아니겠습니까.”

뉴욕에서 공부한 것이 결국 서울시 마스터플랜의 모티브가 된 셈이군요.

“맞아요. 지금 많은 사람들이 여의도를 ‘한국의 맨해튼’이라 부르는데 진짜로 맨해튼을 모델로 삼아 만든 거 맞아요. 한강이 허드슨강이라면, 강변도로는 리버사이드 로드라고 보시면 됩니다. 수중도시를 꿈꾼 거지요.”

여의도 개발은 오롯이 차 전 부시장의 작품이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여의도는 쓸모없는 땅이었다. 장마철만 되면 숱하게 잠겨야 했다. 여의도(汝矣島)라는 이름은 ‘너나 가져라’는 뜻에서 나왔다. 뉴욕 맨해튼을 성공모델로 삼은 차 전 부시장은 김현옥 시장과 함께 여의도 개발을 전격 결정했다. 그게 1968년 일이다. 당시 여의도 면적은 284만㎡(85만 평). 한강물의 침수를 막기 위해서는 제방부터 쌓는 게 급선무였다. 여의도를 감싸는 높이 15.5m의 제방(윤중제)이 기적적으로 110일 만에 탄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의 역동적인 성장을 보여줬다. 당시 차 전 부시장은 여의도를 국회권, 시청권, 업무권으로 삼등분하고 양쪽 끝에는 고층아파트를 지었다. 가운데에는 거대한 광장을 조성했으며, 종교 시설인 여의도순복음교회(담임목사 이영훈)도 들어서게 했다. 여의도의 성공적 개발은 훗날 강남 개발이라는 서울의 양적 팽창에 불을 지핀 결정적인 일이 됐다.

여의도 개발은 어떻게 기획하시게 된 건가요.

“부시장이 되고 나서 헬기를 타고 서울시를 둘러보는데 모래밭인 여의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여의도에는 K16 미 공군기지가 있었어요. 당시 김현옥 시장이 ‘당신, 영어 잘하니까 미국 사령관 만나 잘 얘기해 보라’고 하더군요. 여의도 개발은 그렇게 시작된 겁니다. 그것 말고도 웃기는 일이 참 많았어요. 부시장에 취임해 보니 서울특별시를 영어로 ‘스페셜 시티 오브 서울(Special City of Seoul)’이라 번역했더군요. 솔직히 특별하긴 뭐가 특별했겠습니까. 그래서 ‘서울 메트로폴리탄 거버먼트(Seoul Metropolitan Government)’로 바꾼 겁니다. 그 정도로 행정이 엉망이었던 때였어요.”

귀국 후 보신 서울은 어떤 수준이었던가요.

“기가 막히더라고요. 도로 곳곳이 로터리예요. 로터리(Rotary)라는 게 18세기 마차가 다닐 때 나온 겁니다. 나중에 도시가 발달하면 차가 늘어날 텐데, 그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다고 봐야 해요. 산에 나무는 없고 죄다 무허가 판자촌만 있고. 도로부터 정비하는 게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재임 기간 세종로, 명동 등 서울 6곳에 지하도를 만들었어요. 홍제동-갈현동, 돈암동-미아리, 청량리-중랑교, 성동교-워커힐 간선도로도 확장했죠. 청계천 고가도로도 그때 지은 겁니다. 1967년 중앙청(광화문 자리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건물로 해방 후 정부청사로 쓰이다 1995년 철거됨)을 기점으로 세종로를 100m 도로로 넓혔지요. 만약 그때 넓히지 않았다면, 지금 서울은 교통지옥이 됐을 겁니다. 로마가 구라파(유럽)를 석권한 것도 도로부터 만들었기 때문 아니겠어요.”

김현옥 시장의 ‘도시는 선(線)이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군요.

“그렇죠. 1966년 11월 박 대통령의 지시로 김 시장과 뉴욕 등 세계 유명 도시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김 시장이 뉴욕의 쭉쭉 뻗은 도시를 보며 ‘차 부시장, 역시 도시는 선이야. 뉴욕은 선이 예술이야’라고 하시더군요. 도시 개발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계셨던 겁니다.”

1969년 4월21일 남산터널 기공식에서 차일석 서울시 부시장(왼쪽)이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김현옥 서울시장에게 공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차일석 제공
1969년 4월21일 남산터널 기공식에서 차일석 서울시 부시장(왼쪽)이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김현옥 서울시장에게 공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차일석 제공

종로3가 집창촌 헐고 세운상가 지어

세운상가를 민관 합동개발 사업으로 추진한 것도 당시로선 획기적인 방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간투자가들에게 토지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고 수익성이 있는 구조물을 세워 그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방식이었지요. 창덕궁 앞부터 종로, 청계천, 을지로를 거쳐 퇴계로까지 연장하는 사업이었는데요, 당시 그 일대에 집창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도 서울 한복판에 그런 게 있어 되겠습니까. 그래서 거기에 사시는 분들을 노량진 직업훈련소로 보내고 연장 1200m, 너비 50m 규모로 남북을 잇는 랜드마크 건물을 지은 겁니다. 4층까지는 상가, 5층부터는 오피스·아파트·호텔 등이 있는, 지금으로 치면 주상복합 건물이었지요. 당대 최고 건축가인 김수근씨한테 설계를 맡겼는데, 요청한 지 며칠 만에 뚝딱 해 오는 걸 보고 ‘이 사람,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낀 기억이 납니다.”

사람 사는 공간이라는 도시계획 철학 측면에서 볼 때 지금 서울은 어떤 모습인가요.

“문제가 많지요. 제가 서울시에 가보니 도시개발 마스터플랜이 없었어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만든 시가지 계획만 있었지요. 동(東)은 천호동, 서(西)는 수색, 연희동까지 말이죠. 강북을 동서로만 개발하도록 돼 있었던 겁니다. 남쪽은 전혀 계획이 없었어요. 당시 우리는 강북 인구를 200만 명, 강남을 300만 명으로 봤습니다. 인구가 500만 명을 넘어서면 수도로서의 기능을 잃는다고 봤지요. 지금 인구 천만이 모여 사는 서울은 너무 문제가 많아요.”

현실적 대안이 있으신가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지방도시 육성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10년 후 지방도시들은 모두 없어질 판이에요. 서울 주변에 신도시를 만드는 게 해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서울에 모든 기능이 모여 있는데 인구 집중화를 해소하는 게 쉬운 일일까요.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앞으로 도시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겁니다. 오늘 또 신도시를 개발한다고 발표했던데, 아직도 발상이 이 모양이니…. 당시 서울시는 강남을 개발하면서 행정은 강북, 사법은 강남, 입법은 여의도라는 마스터플랜이라도 있었어요. 1966년 8월15일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서울시종합개발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일본도 올림픽을 치렀으니, 우리도 올림픽 개최에 대비해 강남 개발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지요. 그로부터 20년 뒤 진짜로 올림픽이 열렸잖아요. 도시계획은 20년 앞을 내다보고 준비해야 합니다.”

‘강남’은 서울의 발전상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단어다. 가수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이 대히트를 하면서 에어비앤비와 같은 유명 숙박 사이트에는 서울의 핫 플레이스로 홍대(HONGDAE)와 함께 강남(KANGNAM)이 떴다. 외국인 눈에 비친 강남은 한류 문화의 본산이다. 서울은 몰라도 강남은 알 정도로, 강남은 대한민국의 문화를 선도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그런 강남 개발을 뒤에서 준비한 이가 바로 차 전 부시장이다. 하지만, 정작 차 전 부시장은 지금의 강남 모습에 아쉬움을 표시했다.

지금의 수도 서울 모습에 아쉬움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서울시는 작은 정부예요. 외무, 국방 기능만 빼고 다 있는 셈이죠. 가령 미세먼지 대책도 중앙정부보다 앞서서 세워야 해요. 말만 해선 안 되지요. 서울역 앞 고가(서울로)를 시민들이 걸어 다니는 공간으로 만들었는데, 걸어 다닐 곳이 없어 거길 그렇게 활용하나요? 정 걸어 다니고 싶으면 남산으로 가야죠. 그리고 시청 앞에 왜 광장을 조성해 이 난리를 만드는 건가요. 광화문광장을 넓히겠다고 발표했는데, 그렇게 되면 그 많은 차들은 어디로 갑니까. 이럴 거였으면 여의도광장을 없애지 말고 그곳에서 행사를 갖게 했으면 됐는데 거길 공원으로 만들었으니. 보세요. 지금 시청 앞 주변에 최고급 호텔들이 들어서 있잖습니까.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이 죄다 거기 묵고 있는데, 주말마다 시위가 열려요. 광화문광장에 정당이 임시당사를 짓겠다는 발상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여의도광장이 공원으로 바뀐 건 뉴욕 센트럴파크를 참고한 것 아닌가요.

“그걸 전부 공원으로 만들지 말고 일부만 그렇게 했어야죠. 광장에서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사표출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도심 한가운데 만드니 이 난리가 나는 겁니다. 도로를 없애고 광장을 만드는 발상은 도시개발의 ABC조차 모르는 거예요.”


“도로 없애고 광장 만드는 것은 큰 문제” 

수도권 집중화를 걱정하셨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노무현 정부 때 준비한 행정수도 이전은 방향성만큼은 맞는 것 아닙니까.

“아니죠. 제가 공직에 있을 때 호주에 갔는데, 당시 외무공무원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수도가 캔버라에 있어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라고요. 6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 서울의 기능을 옮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들 오늘날 서울을 조선초 문신 정도전이 설계한 걸로 아는데요. 사실은 하인 출신으로 정2품 판한성부사까지 오른 건축가 박자청이 설계한 겁니다. 나중에 세종대왕이 그 공을 기려 ‘1등 공신’이라며 묘비명까지 하사한 분이시죠. 수도가 이전한다고 지방이 살아나는 건 아니에요. 그런 발상을 어떻게 합니까.”

간혹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이 베이징, 도쿄에 비해 서울은 너무 특색이 없다고 말한다더군요.

“너무 커서 그래요. 옥인동, 혜화동, 인사동 같은 사대문 안은 문화공간을 최대한 보존했어야 해요. 제가 부시장으로 있을 때 인사동에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짓겠다고 하기에 불허했습니다. 경운동에 있는 민씨 한옥집에서 와인하고 스테이크를 판다는 게 말이 됩니까. 우리 문화유산에서요. 한식을 멋들어지게 만들어 외국인에게 선보여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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