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페미니스트 석학이 말하는 ‘대한민국·버닝썬·여자’
  • 박성의 기자 (sos@sisajournal.com)
  • 승인 2019.06.04 15:00
  • 호수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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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디 그레이엄 신시내티대학 심리학과 명예교수
“폭력·강간의 공포 ‘공기’처럼 퍼져…韓 페미니즘 운동에 큰 감명”

‘왜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는가.’

디 그레이엄 미국 신시내티대학 심리학과 명예교수(71)는 1995년 한 저서를 내놓으며 이 같은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자신이 연구 끝에 찾은 답을 책 제목에 적었다. 저서명은 《Loving to Survive》. 즉,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여성이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흉기를 든 인질범에게 인질이 동조하는 현상)’을 앓고 있다는 것. 그는 “많은 남성이 자신의 성적 만족을 위해 여성에게 굴욕을 강요한다”며, 그 탓에 여성의 심리는 인질과 다를 게 없어진다고 주장했다. 이 도발적인 이론을 뉴욕타임스 등 수십여 개 미국 언론이 보도하면서, 미국 사회에선 격렬한 논쟁이 일었다.

그로부터 24년이 흘렀다. 디 그레이엄의 ‘나이 든 주장’이 한국 사회에서 다시 화두가 됐다. ‘미투 운동’을 도화선으로 ‘한남(한국 남자)’은 타도와 비난의 대상이 됐다. 여기에 각종 사건이 혐남(嫌男) 기류를 부추겼다. 최근 발생한 이른바 ‘버닝썬 사태’가 대표적이다. 양성 간의 갈등이 극으로 치닫는 가운데, 과연 원로 페미니스트 디 그레이엄은 이 같은 한국 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시사저널은 이메일을 통해 디 그레이엄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한국 페미니즘 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며 최근 한국 내에서 발생한 각종 섹슈얼 이슈와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을 이메일에 빼곡히 적어 보냈다.

ⓒ 디 그레이엄
ⓒ 디 그레이엄

‘버닝썬 사태’가 벌어진 이유

여성이 ‘스톡홀름 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관찰한 집단을 보면 백인 사회로 한정된다. 한국 같은 동양은 서양과 문화가 다르지 않나. 같은 이론을 대입할 수 있을까.

“물론 문화에 따라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릴 가능성은 달라진다. 다만 상황만 맞아떨어지면 문화권에 상관없이 어떤 사람(여자)이든 가해자에게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 특히 (한국과 같은) 가부장제 사회는 여자를 사회적으로 배척하거나 강간하거나 심지어 죽이는 등 수많은 방법으로 생존을 위협한다. 여자는 이런 상처를 해결해 보려고 (경찰이나 의사 같은) 남자 전문가에게 기댈 수밖에 없을 때가 많다. 또 여자는 남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여성적일 것, 이성애자일 것을 강요받는다. 이를 탈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으로 문제를 좁혀보자. 최근 한국에서는 다양한 섹슈얼 이슈가 발생하고 있다. 이 같은 사건들이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질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정준영·승리 사건, ‘버닝썬 사태’ 등을 알려줬다. 그레이엄은 자신의 저서 본문을 발췌해 답을 대신했다.)

“남자들은 성관계는 여자랑 해도 ‘남자끼리의 감정적 유대감’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남자들이 모여서 여자를 어떻게 ‘따먹고’ ‘박아볼까’ 음담패설을 하고 ‘진도’를 운운할 때, 이들은 서로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한다. 남성 동지들에게 “나랑 자는 여자보다 너희들이 더 중요해”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래서 자기의 친구가 착취(여성과의 성관계)에 성공하면, 주변 남자들은 그것을 모두(남자들)의 승리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 승리로 말미암아 남자끼리의 유대감은 더 강화된다. 과연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이라는 건강한 감정을 품고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처럼 많은 남자가 성 경험을 하기 위해 여자를 비하하고, 모멸감을 주고, 고통을 가해야만 할 리가 없다.”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이 한국 사회에서도 큰 화두가 됐다.

“그럴 때도 됐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미투 고발을 하는 여자를 입막음하거나 믿지 않거나 낮게 평가하는 상황이 안타깝다. 여러 명이 같은 사건을 이야기할 때만 믿어주기도 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같은 높은 위치의 사람이면 본인 입으로 성폭력을 시인하더라도 사건이 흐지부지되기도 한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당신의 주장대로라면 위계에 의한 강간과 (여성이 동의한) 불륜을 구분하기 매우 모호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미투 사건에서 비슷한 논쟁이 촉발된 바 있는데, 권력이 개입되지 않은 이성 간 사랑은 불가능한 것인가.

“권력이 불균등한 모든 관계에서는 진정한 합의(consent)가 이뤄지기 힘들다. 지켜보는 사람이건 관계에 임하는 당사자건 진정한 합의가 이루어졌는지 알 방법도 없다. 권력이 불균등한 관계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일은 흔하다. 그렇게 부르면 권력차가 흐려지기 때문이다. 물론 위계가 낮은 쪽은 진정으로 깊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생존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생존을 타인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심할수록 사랑의 감정은 강렬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미투를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다. 피해를 호소한 이들이 ‘꽃뱀(돈을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말하는 여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피해자라고 말한 여성들 중에서도 같은 우려를 제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미투 고발자에게 꽃뱀 딱지를 붙이는 여자들은 어쩌면 본인이 생존하려고 이용했던 전략을 피해자에게 투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남자에게 유대감을 느끼거나, 그런 발언으로 남자에게서 유대감을 끌어내서 자기 안전을 확보하고자 할 수도 있다. 사실 가부장제 속에 사는 여자는 진실을 깨닫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해, 돈이나 권력, 명예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성적 수모를 견뎌내야만 한다는 사실 말이다.”

5월17일 서울 종로구 내자동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이  ‘버닝썬 수사 결과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5월17일 서울 종로구 내자동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이 ‘버닝썬 수사 결과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페미니즘은 힘든 길…투쟁 계속돼야”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 남녀 간의 성대결을 극렬하게 유발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변해 가는 시대에 맞춰 조금 더 ‘평화로운 방법’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남자는 싸움 없이 권력을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물론 어떤 남자는 여자에게 동정심을 느낄 수도 있다. 여자 학대가 종식되기를 바랄 수도 있다.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닌 그게 옳은 일이라는 이유로 페미니스트가 될지 모른다. 그러나 권력을 내려놓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남자가 변하거나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평등을 이룩할 수 없다. 분노는 ‘그건 싫다’라고 말하는 일이자 선을 긋는 일이고, ‘그건 용납할 수 없다’라고 목소리를 내는 일이다. 우리가 만약 싫다고 말할 수 없다면, 우리의 좋다는 대답도 정직할 리 없다.”

당신이 연구를 통해 얻고자 했던 목표 또는 변화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스톡홀름 증후군이 과연 사회적 층위에서 이뤄지는지 사고 실험을 해 보고 싶었다. 남성 폭력에 대한 여성의 반응이 어떤 면에서 스톡홀름 증후군적 반응인지 냉정하게 생각해 봤다. 또 이런 반응이 과연 평등을 얻어내는 데 도움이 될지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고 싶었다. 가부장제 아래 살아가는 여자의 여성성과 이성애를 설명하고 싶었다. 또 남성 폭력의 위협을 받는 여자들이 대체 왜 남자에게 유대감을 느끼는지 파헤치고 싶었다. 학대를 받으면서도 가해자를 떠나지 못하는 여자들을 보고 한심하다고 하거나, 피학 성향이 있다고 의심할 때가 많다. 그러나 스톡홀름 증후군 이론을 대입하면 가해자에게 느끼는 유대감이 실제로는 생존 전략임을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 이유는 왜 양성평등이 그렇게 달성하기 어려운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결국 페미니즘 운동이 어려운 건 여자가 생존하기 위해 남자에게, 우리 생존을 위협하는 바로 그 집단에 유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Loving to Survive》가 출간된 지 20여 년이 흘렀다. 페미니즘 운동 혹은 교육이 향후 어떤 식으로 변화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나.

“아이들에게 페미니즘 롤모델을 제공하고, 현 상황에 의문을 갖도록 해야 한다. 어떻게 더 나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함께 꿈꿔 나가야 한다. 특히 여자 아이들에게는 여자끼리 돕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도와야 한다. 말 그대로 의식 고양이 이뤄져야 한다. 대학에도 여성학과가 꼭 필요하다.”

한국의 여성들, 또 남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번 인터뷰를 통해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과 한국 여성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중요한 변화를 알게 되었다. 이번에 시사저널과 이 인터뷰를 진행하며 (《Loving to Survive》 공저자이자 신시내티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에드나 롤링스가 많이 도와줬는데, 그 역시 한국 페미니즘 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한국 여성들이 현재 하고 있는 훌륭한 작업이 너무도 자랑스럽다. 우리는 그런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안다.” 

한국어로 출간된 《여자는 인질이다》

디 그레이엄이 펴낸 저서 《Loving to Survive》는 20년을 훌쩍 넘긴 지난 3월에야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저서명은 《여자는 인질이다》다. 책을 출간한 곳은 ‘열다북스’다. 열다북스는 해외 래디컬 페미니즘 학자들의 저서를 번역 출판하고, 국내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출판사다.

책의 저자인 디 그레이엄은 미국 신시내티대학 심리학과 명예교수로, ‘공포 생존자: 맞고 사는 여자, 인질, 스톡홀름 증후군(1988)’, ‘연애 중인 여자 청년의 스톡홀름 증후군 반응을 가늠하는 척도: 요인 구조, 신뢰성, 타당성 (1995)’ 외 여성 심리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썼다. 공저자인 에드나 롤링스는 신시내티대학 심리학과 교수로 ‘여성 심리 요법: 평등을 향한 치료(1977)’를 썼다. 다른 공저자인 마이애미대학-옥스퍼드 영문학 박사이자 심리학 박사인 로버타 릭스비는 ‘페미니즘 비평과 원형 심리학: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1991)’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2012년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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