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쓰기 글꾼 그만하고 질문하세요”
  • 조철 북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6.23 11:00
  • 호수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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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어문 에세이 《손 들지 않는 기자들》 펴낸 언론인 임철순씨

서점 신간 진열대의 제목을 보고 뜨끔해할 기자가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책이 눈에 띈다. 평생 신문기자로 살아온 언론인 임철순씨가 퇴직 후 펴낸 에세이집 《손 들지 않는 기자들》이다. 내용 중에 기자의 존재 이유와 본분에 대한 대목도 있다.

“본질적으로 기자와 언론의 품격은 사실을 다루는 ‘글’에서 나오는 것이다. 민주 공화국의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언론의 힘이나 권력은 글로부터 나온다. 바둑에서는 한 수 한 수 놓을 때마다 맥이 바뀐다. 그 국면에 딱 맞는 ‘이 한 수’를 찾기 위해 기사들은 노심초사한다. 기자도 마찬가지다. 그 경우에 딱 맞는 말을 찾아서 보도해야 하며, 그 경우에 딱 맞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경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리드를 쓸 수 있어야 한다.”

임씨는 1974년 한국일보에 입사, 2012년 퇴사할 때까지 기획취재부장,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을 역임했다. 신문윤리위원, 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대산문화재단 자문위원, 안익태기념재단 이사를 거쳤으며 현재 한국일보 논설고문과 국가인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손 들지 않는 기자들》 임철순 지음│열린책들 펴냄│376쪽│1만5000원 ⓒ 열린책들 제공
《손 들지 않는 기자들》 임철순 지음│열린책들 펴냄│376쪽│1만5000원 ⓒ 열린책들 제공

 

언론인의 눈에 비친 우리말, 우리 언론, 우리 삶

“말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해 잘못 쓴 경우는 이런 것들이다. 회계머니(헤게모니), 덮집회의(더치페이), 임신공격(인신공격), 골이따분한 성격, 나물할 때 없는 맛며느리감, 에어컨 시래기(실외기), 힘들면 시험시험 해, 수박겁탈기…. 꽃샘추위를 잘못 쓴 곱셈추위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거 같다. ‘미모가 일치얼짱’ ‘마마 잃은 중천공’은 ‘일취월장’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말을 몰라서 저지른 무식의 소치다.”

일상을 비트는 뜨끔한 유머, 솔직하다 못해 직설적인 글쓰기로 정평이 난 임씨는 이번에도 우리말, 우리 언론, 소시민적 일상생활에서 느꼈던 크고 작은 단상들을 맛깔나게 담았다. 기자답지 않게(?) 웃기자고 쓴 것 같은 내용도 더러 있다.

“점심 때 ㅈ초등학교 앞 편의점에 햇반 사러 갔는데 초딩 커플(4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있었다. 남자애가 묻기를 ‘X발, 그 새끼가 어디가 좋은데?’ 여자애 ‘너보다 형이야. 새끼가 뭐냐?’ 그러자 남자애가 ‘그래 그 형(난 여기서 빵 터짐)이 먹을 거 사주고 선물 사주고 자꾸 이쁘다고 그러니까 좋냐?’ ‘어.’ 남자애는 진지하다 못해 마음 아픈 목소리로 ‘하, 너 이런 여자였냐?’ 그랬다. 난 그다음이 궁금해 과자를 고르는 척했다. 여자애가 하는 말 ‘꼬우면 니가 내 세컨드하든가.’ 알바생과 나는 웃음을 참느라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이렇듯 임씨의 글에서 세상을 주물럭거리는 여느 ‘논세가(論世家)’의 뽐냄을 찾아볼 수 없다. 초등학생 연애부터 지하철 독서인, 버스기사와 택시기사, 부고 기사에 난 어머니들 이름까지 일상생활에 바탕을 둔 체험들이 글감이 되고, 글맛을 더한다. 임씨는 말과 글을 다루는 언론인으로서 그간 우리말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이번 에세이집은 ‘어문 에세이’라는 책의 부제가 보여주듯, 우리말을 둘러싼 이야기가 중심이다. 뇌졸중을 뇌졸증으로 내걸고도 맞다고 우기는 약사. ‘이리 오실게요’ ‘저리 가실게요’ 같은 일상 속 잘못된 접객어. 심지어 국가의 중요 문서인 ‘남북 합의문’과 ‘대통령 당선증’에까지 등장하는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들. ‘ㅋㅋ’와 ‘ㅠㅠ’가 범람하는 자판 시대의 씁쓸한 초상과 한자 교육을 등한시하면서 거꾸로 우리말 이해력이 낮아지는 아이러니도 유쾌하게 담았다.


“어린이처럼 배우고 질문하는 욕구 잃지 말아야”

“요즘은 이력서, 자소서 외에 카톡 글까지 대필한다니 놀랍고 어이가 없다. 긴 글을 써본 경험이 없고 이모티콘에 의지하거나 짧은 감정 표현에 익숙하고 맞춤법, 띄어쓰기에 자신이 없다 보니 점점 글 쓰는 게 어려워지고, 그렇다 보니 대필에 의지하게 되는 젊은이들이 많다. 우리 학교 교육은 답이 정해진 글을 요구할 뿐 사고가 필요한 글을 길게 써보도록 하지 않고 있다. 그런 교육과 풍토에 젖어 자라온 세대의 고민과 고충을 알 만하다.”

스스로를 ‘낡은 언론인’으로 낮추는 임씨지만 우리 언론을 향해 따끔한 비판도 적지 않게 던진다. 먼저, 질문을 던질 줄 아는 기자가 되라는 충고. 그는 우리 언론사의 가장 창피한 순간으로 2010년 열린 G20 정상회의 폐막식을 꼽는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기자에게 질문권을 주었지만,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그 질문권은 중국 기자한테로 넘어갔다). “나를 포함한 요즘 기자들은 질문을 잘할 줄 모른다. 기자들은 어느새 받아쓰기 글꾼으로 전락해 버린 느낌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통령 기자회견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이고 아직도 관료적이고 여전히 권위적이다. 그 틀을 깨는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질문을 하는 기자를 본 적이 없다. 기자에게 본질적으로 무례한 질문이란 없다. 질문은 공격적이고 비판적이어야 한다. 사실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다만 보도는 냉정하고 중립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기자는 대체 무슨 권리로 질문을 하는가? 기자의 질문권은 대체 누가 언제 부여하거나 일임한 것인가? 이런 생각과 자기 점검을 잊으면 안 된다.”

임씨는 ‘보도인지 해설인지 모를 기사와,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 진영의 논리와 주장에 봉사하는 논평’이 쏟아지는 어지러운 언론판이지만, 그럴수록 언론의 본질을 놓치지 말 것을 주문한다. 그는 우리 언론의 신뢰 위기를 절감하며, 언론이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기자들이 좀 더 분발해 주길 독려한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어린이처럼 배우고 어린이처럼 질문하는 욕구를 잃지 말아야 한다. 늙는 것은 질문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표현을 빌리면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로 갔는가?’ 그 귀여운 아이, 그 질문 많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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