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샤댐의 진짜 재앙은 지진과 산사태”
  • 모종혁 중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8.04 16:30
  • 호수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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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로 인한 세계 최대 댐 붕괴설에 떨고 있는 중국

“전체적으로 보면, 싼샤(三峽)댐의 이익이 폐해보다 많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星奈愛)

“싼샤댐이 건설된 이후 지진은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 홍수는 해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meiyin)

최근 중국인들이 모이면 가장 열띤 토론을 펼치는 주제는 ‘홍수’와 ‘싼샤댐’이다. 6월초부터 시작된 장마로 7월 중순까지 4000만 명에 가까운 이재민이 발생했다. 홍수로 인한 피해 지역은 27개 성·시에 달한다. 그로 인해 141명이 죽거나 실종됐고, 860여억 위안(약 14조7000억원)의 재산피해가 났다. 홍수는 현재진행형이다. 7월26일 수리부는 ‘양쯔강(長江) 3호 홍수 경계’를 발령했다. 양쯔강수문정보센터에 따르면, 양쯔강 상류의 지류인 민강(岷江)·자링강(嘉陵江) 등에 폭우가 쏟아져 7월27일 저녁에 싼샤댐으로 유입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일 오후부터 엄청난 강물이 싼샤댐에 흘러내려왔다. 최대량은 초당 6만㎥에 달했다. 이는 수영장 24개를 채울 수 있는 양이다. 따라서 싼샤댐관리국은 수문을 열어 초당 4만㎥를 방류했다. 이 소식은 SNS를 타고 확산됐다. 바이두(百度)의 싼샤댐바()도 후끈 달아올랐다. 싼샤댐을 옹호하는 네티즌들이 만든 카페였기에, 댐을 응원하는 글과 사진으로 도배됐다. 하지만 일부 회원은 댓글로 ‘진실을 제대로 보자’고 비판했다. 한 네티즌은 “지난 10여 년 동안 싼샤댐 주변에서 산사태는 계속 일어났고 지진은 늘어났는데, 이게 우연인가”라고 반문했다.

중국에서 발생한 홍수로 인해 7월19일 대규모의 물을 방류하는 싼샤댐 ⓒXinhua
중국에서 발생한 홍수로 인해 7월19일 대규모의 물을 방류하는 싼샤댐 ⓒXinhua

건설 전부터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댐

싼샤댐은 양쯔강 중류인 후베이(湖北)성 이창(宜昌)시 싼더우핑(三斗坪)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싼샤는 충칭(重慶)시 펑제(奉節)현 쿠이먼(夔門)에서 이창에 이르는 192km 길이의 대협곡이다. 서에서 동으로 이어지는 취탕샤(瞿唐峽)—우샤(巫峽)—시링샤(西陵峽)를 가리킨다. 시작점인 취탕샤의 쿠이먼은 중국 돈 10위안에 등장하는 절경이다. 깎아지른 듯한 수백m 절벽이 바로 앞 고산과 어울려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한다. 싼샤 곳곳은 강폭이 좁고 수직의 계곡이 이어졌다. 200만 년 전 아시아와 인도 대륙이 합쳐지면서 험준한 협곡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싼샤는 고사성어와 명시의 무대이자 《삼국지》의 전장이었다. 남녀 간의 성관계를 가리키는 ‘운우지정(雲雨之情)’은 우샤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녀봉을 둘러싼 전설에서 비롯됐다.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슬픈 이별을 표현하는 ‘단장(斷腸)’은 협곡에 서식하는 원숭이 모자의 이야기에서 유래됐다.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2001년 중남미 순방길에서 읊은 ‘아침에 백제성을 떠나며(早發白帝城)’는 이백이 지은 당시다. 시의 무대인 백제성은 오나라 정벌에 실패한 유비가 죽기 전 223년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한 현장이다.

이렇듯 천하절경의 자연과 유구한 역사문화를 품었기에, 당초 댐 건설은 큰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92년 4월 베이징시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회의 회의에서 싼샤댐 건설안이 투표에 부쳐졌다. 투표 참가자 2608명 중 1767명이 찬성했고 177명이 반대했으며 664명이 기권했다. 반란표가 33%나 나왔던 것이다. 이 같은 반대율은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래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그 현장에 레이헝순(雷亨順) 전 충칭대 지속발전연구원 주임이 있었다. 필자는 2006년에 레이 전 교수를 만나 인터뷰했다.

레이 전 교수는 “수많은 학자와 전문가가 싼샤댐을 건설했을 때 일어날 여러 부작용을 우려해 반대표나 기권표를 던졌다”고 밝혔다. 1980년대부터 레이 전 교수는 충칭시정부 고문을 겸임하며 싼샤 전 지역을 여러 차례 탐사했다. 이를 바탕으로 싼샤댐이 건설될 경우 발생할 문제점을 정리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지도자들에게 서신을 4차례 보냈다. 심지어 전인대에서 다른 대표들을 규합해 적극적인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가족과 주변 지인들이 그를 만류했지만 레이 전 교수는 2013년 8월에 죽을 때까지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중국이 싼샤댐을 건설하는 목적은 △홍수의 피해에서 벗어나고 △고질적인 전력난을 해소하며 △선박 운항조건을 개선해 황금수로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건설안 통과 이후 프로젝트는 거침없이 진행됐다. 1기 공정은 1994년 12월에 첫 삽을 뜨고 1997년까지 기초 다지기에 전념했다. 댐 축조, 갑문과 선박 통행로 건설, 물 채우기 작업 등 2기는 2003년에 끝났다. 3기로 발전기 장착과 시운전, 수몰민 이주 등을 마친 뒤 2006년 5월에 완공식을 가졌다. 하지만 2012년 7월에야 전체 발전기의 가동, 강 수위 높이기, 재해방지 공사 등 4기가 끝나 전체 사업이 마무리됐다.

지금까지 싼샤댐 건설로 확실하게 이익을 본 것은 수력발전이다. 2003년 첫 발전기를 가동한 이래 2013년 11월에 누적 발전량은 7045억kW, 전력 판매수입은 1831억 위안(약 31조2368억원)에 달했다. 이는 싼샤댐 건설로 인해 투입된 공식 예산 1800억 위안을 초과한 것이다. 현재 싼샤댐의 연간 발전량은 1000kW에 달한다. 그러나 홍수 예방과 황금수로 구축은 여전히 의문이다. 싼샤댐을 이용한 화물선과 유람선의 이동은 꾸준히 증가했다. 화물의 경우 월 처리량이 1000만 톤을 넘어섰다. 문제는 물류혁명의 핵심이 되는 컨테이너선은 많지 않고 석탄·목재 등을 실은 벌크선이 주축이라는 점이다.

홍수 예방은 싼샤댐 건설의 주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길이 2335m, 높이 185m, 저수량 393억㎥의 세계 최대 규모로 건설했다. 저수량은 소양강댐의 15배나 되는 규모다. 7월28일 싼샤댐 수위는 7월 중순에 이어 163m에 육박했다. 최고 수위인 175m를 12m만 남겨둔 수치다. 그로 인해 싼샤댐 붕괴설이 SNS를 통해 다시 퍼져 나갔다. 붕괴설은 6월 황샤오쿤(黃小坤) 건축과학연구원 연구원이 웨이보(微博)에 썼다는 ‘마지막으로 말한다. 이창 아래 지역은 달아나라’는 글이 떠돌며 시작됐다. 다만 황 연구원은 자신이 쓴 게 아니라고 해명했다.

평상시의 싼샤댐 모습 ⓒ모종혁 제공
평상시의 싼샤댐 모습 ⓒ모종혁 제공

“엄청난 저수량이 가져올 재앙에 주목해야”

7월27일에는 중국 SNS에 “중국 정부가 싼샤댐 붕괴를 가정한 시뮬레이션을 시행했다”면서 관련 동영상이 퍼졌다. 그보다 앞서 싼샤댐이 무너지면 양쯔강 하류의 상하이 일대까지 대홍수가 나고, 원전 9기에도 영향이 미친다는 한국 언론 보도까지 나왔다. 하지만 익명을 요구한 중국의 토목 전문가는 필자에게 “싼샤댐이 붕괴될 가능성은 0.01%도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싼샤댐은 지질구조가 튼튼한 싼더우핑을 선택해 건설했다”며 “4기 완공 이후에도 끊임없는 보수공사를 거쳤기에 무너질 위험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레이 전 교수도 “싼샤댐의 안전성에는 큰 문제가 없으나, 엄청난 저수량이 가져올 재앙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싼샤는 깨지고 부서지기 쉬운 지층구조를 가졌다”며 “물의 압력이 강변 지반에 압력을 주어 지진이나 산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2015년 7월 필자는 싼샤 전 지역을 취재하며 우산(巫山)현에서 산사태를 발견했다. 산사태로 1명이 죽고 5명이 다쳤으나 언론엔 보도되지 않았다. 중국 정부는 2010년 6월 “싼샤댐 건설 후 5386곳이 산사태 위험에 노출됐고, 97곳은 이미 붕괴됐다”고 밝힌 뒤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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