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한 영웅들을 너무 쉽게 잊는다” 이청용의 ‘쓴소리’가 남긴 울림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9.09 11:00
  • 호수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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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품처럼 마모된 별들, 전설 되기도 전 추락한다

8월30일 울산 문수축구경기장에는 기대와 흥분이 감돌았다. 유럽 빅리그 무대에서의 선수생활을 정리하고 4개월 간격으로 K리그에 차례차례 복귀한 이청용(울산 현대)과 기성용(FC서울)이 그라운드에서 격돌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쌍용매치’였다. 유럽 진출 전인 2007년부터 2009년까지 FC서울 소속으로 뛰며 10대 영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두 스타의 그라운드 위 조우는 단순한 K리그 한 경기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이벤트였다.

올 시즌 울산 전력의 핵으로, 팀을 선두로 이끈 이청용은 이날도 친정팀을 상대로 선제골을 기록하며 3대0 완승을 주도했다. 올여름 11년 만에 서울 유니폼을 다시 입으며 K리그로 돌아온 기성용은 발목 부상을 털고 이날 처음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후반 20분 투입된 그는 특유의 정교한 긴 패스를 구사하며 변함없는 자신의 기량을 선보였다. 

팬과 미디어가 한마음으로 기다렸던 K리그의 잔치는 훈훈하게 끝났다. 경기 후 고명진의 제안으로 과거 서울에서 함께 뛴 이청용·기성용·박주영·고명진·고요한은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제는 이청용·고명진이 울산 유니폼을 입고 뛰지만 팬들로서는 과거 FC서울의 황금기를 만들었던 멤버들의 작은 동창회를 보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기성용도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그 사진을 올린 뒤 “소중한 사람들, 오늘은 행복한 날이었다”는 소감을 남겼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뒤 수훈 선수로 공식 기자회견에 나선 이청용의 소감은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과거 대표팀에서도 가감 없는 냉철한 의견을 내 ‘미스터 쓴소리’로 불린 이청용은 모두가 주목한 ‘쌍용매치’의 그림자를 지적했다. 그는 서울에서 뛴 동료들과 재회한 소감을 묻자 “한국 축구를 위해 크게 기여하고 희생한 선수들이 나이가 들어 존중받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고 답했다. 이어 “우리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내려오는 시기가 있다. 예전 기억은 금세 잊고 ‘저 선수 끝났구나’라고 판단하는 걸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는 말도 덧붙였다.

8월30일 울산 문수축구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축구 하나원큐 K리그1 2020 18라운드 경기를 마친 뒤 FC서울 기성용과 울산 현대 이청용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고요한, 고명진, 박주영, 이청용, 기성용 ⓒ연합뉴스
8월30일 울산 문수축구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축구 하나원큐 K리그1 2020 18라운드 경기를 마친 뒤 FC서울 기성용과 울산 현대 이청용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고요한, 고명진, 박주영, 이청용, 기성용 ⓒ연합뉴스

악플과 사이버 테러에 멍드는 스포츠 스타들

이청용의 답변은 한국 축구를 넘어 스포츠 전체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시선과 분위기에 대한 지적이었다. 선수들이 헌신하고 희생하며 이룬 성과에 환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쉽게 잊히는 모습, 선수의 기량이 자연스럽게 하락세를 탄다고 해서 용도 폐기하는 문화, 해외에서는 익숙한 레전드에 담긴 존중을 담지 못하는 분위기 등이다. 

‘쌍용매치’의 또 다른 축이었던 기성용은 이미 알려진 대로 스페인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의료 공백으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발목 부상 여파로 입단 후 한 달이 지나 경기에 나온 상황이었다. 성실히 재활을 마치고 복귀를 앞둔 기성용에게조차 “연봉만 축내고 있다”는 성급한 비아냥이 팬들 사이에서도 나왔다. 박주영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도 이청용의 쓴소리 배경으로 알려졌다. 고교 졸업 후 각급 대표팀에 불려 다니며 혹사당한 여파로 30대가 된 이후에 무릎 부상이 잦은 박주영은 올 시즌 2골만 기록 중인 상태다. 하지만 팬들은 그런 박주영의 헌신과 희생을 잊은 채 노쇠화만 강조하고 있다. 그의 재계약에도 부정적인 반응의 댓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병폐로 꼽히는 일희일비의 ‘냄비문화’와 익명 뒤에 숨은 ‘사이버 테러’는 스포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A매치 한 경기가 끝난 뒤 포털사이트나 인터넷 커뮤니티는 물론 자신의 SNS 계정에까지 몰려오는 악플러들의 공세로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하거나 삭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김영권(감바 오사카)처럼 1년 가까이 ‘국민 욕받이’로 전락했다가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통해 극복하고 부활한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많은 선수가 자신은 물론 가족 등 사생활 영역까지 침범당하는 것에 이른바 ‘멘붕’을 겪는다. 

한국 축구의 레전드인 차범근 전 감독은 러시아월드컵 직후 “월드컵 때만 되면 반복된다. 경기도 하기 전에 선수들은 엄청난 비난에 휩싸인다. 이미 경직된 상태로 경기에 들어간다”며 배려와 포용 없는 살벌한 팬문화를 꼬집었다. 이어 “경기에 관한 비판은 수용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은 가족을 들춰가며 비난을 퍼부었다. 2002년 월드컵 전에도 히딩크 감독에게 얼마나 욕을 퍼부었나? 달라진 게 없다. 이런 분위기 속에선 한국 축구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배구선수 고유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극이 발생하자 네이버와 다음 양대 포털사이트가 스포츠 뉴스 댓글 시스템을 폐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프로야구의 오지환(LG트윈스)은 수년간 자신을 괴롭혀온 악플러들에게 적극적인 법률적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스포츠 스타들이 자신들의 기량에 팬들의 관심과 응원이 더해져 고액 연봉을 받는다는 논리 때문에 악플에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하자 인권 유린과 인격 살해까지 번지며 자정 작용이 불가능해진 상태다. 

 

‘영웅’ 쉽게 버리는 체육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용기를 낸 이청용의 발언에는 베테랑 선수들에 대한 구단들의 어긋난 시선에 대한 지적도 담겨 있다. 매년 계약을 갱신하며 활약 중인 이동국의 사례도 있지만, 여전히 30대 중후반 선수들은 떠밀리듯이 은퇴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K리그의 대표 스타였던 신태용 인도네시아 대표팀 감독의 경우 한 팀(일화)에만 헌신했지만 마지막엔 헌신짝처럼 버림받는 데 대한 섭섭함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아직 전성기에 있는 30대 초반 선수들조차 기량에 대한 의심을 받는다. 올해 초 기성용이 K리그 복귀를 처음 추진하던 당시 벌어진 존중 부재의 문화가 대표적인 사례다. 최용수 전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는 기성용의 복귀 의사에 ‘올 테면 오든지…’ 식의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환영의 분위기를 기대했던 선수는 큰 실망을 한 끝에 “다시는 K리그에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유럽으로 되돌아갔다. 이청용도 2018년 비슷한 경험을 한 끝에 올해 초 서울이 아닌 울산으로 이적을 택한 바 있어 기성용의 심정을 깊이 이해하는 모습이었다. 

만 32세에 복귀한 이청용은 올 시즌 내내 경기력을 통해 여전히 K리그에서 톱클래스 기량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해외무대에서 활약하고 K리그로 복귀하는 선수들이 단지 갈 곳이 없어 고국을 택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온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일부 지도자와 구단들이 옛 영웅들의 복귀를 탐탁지 않게 느끼는 정서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로 무장해 국내에서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한 차두리(FC서울 유스 오산고 감독)였지만, 그 역시 은퇴 시점에는 “K리그로 돌아와서 내가 팬들의 기대치를 채울 수 있을지 두려움이 있었고, 은퇴할 때까지 그 불안감과 계속 싸웠다”고 고백했다. 이청용과 기성용도 여전히 그 불안감과 싸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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