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 칠 때 떠나는 ‘라이언킹’…이동국, 지도자 데뷔 준비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0.31 16:00
  • 호수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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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통산 최다 228골 등 불멸의 기록 남겨

“요즘 100세 시대라는데, 저 아저씨처럼 관리하면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죠.” ‘전북 현대 왕조’를 연 최강희 현 상하이 선화 감독은 이동국을 늘 아저씨라고 부르면서도 나이를 편견의 잣대로 삼지 말 것을 거듭 당부했다. 최 감독은 2009년 서른을 갓 넘긴 스트라이커 이동국을 많은 반대에도 과감히 영입했다. 당시 이동국은 무릎 부상으로 2006년 독일월드컵 출전에 실패한 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실패까지 겹치며 하향세에 있던 터였다. 하지만 최 감독은 만 33세의 이른 나이에 반강제로 은퇴했던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며 실력과 경험을 갖춘 베테랑의 가치를 강조했다. 

최강희 감독의 판단은 옳았다. 이동국은 2009년 득점왕을 차지하며 전북의 사상 첫 K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전북 팬들조차 “노인정 만들 일 있냐”고 비판했던 그 선수는 그 뒤로 11년간 전북에서 골잡이로 활약했다. 2018년을 끝으로 최 감독마저 중국 무대로 떠났지만 이동국은 팀에 남아 2019년 팀에 7번째 리그 우승을 선사해 자타 공인 레전드가 됐다. 

1990년대에 현역 생활을 시작한 이동국은 2020년 10월 은퇴를 발표했다. 10월26일 자신과 가족의 SNS에 이동국은 “인생의 모든 것을 쏟았던 그라운드를 떠나기로 했다”며 은퇴사를 남겼다. 1998년 포항 스틸러스에서 데뷔한 이동국은 23년간 프로 선수로 활약했다. 열아홉 살의 나이로 1998년 프랑스월드컵 본선에 출전, 10대 돌풍을 일으키며 한국 축구의 미래로 급부상했지만 2002년 한·일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들지 못하며 긴 침체를 겪었다. 부침이 반복된 20대를 지나 만 30세에 전북에 입단하며 그의 축구 인생은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조선일보·연합뉴스
ⓒEPA 연합·뉴시스

예민했던 ‘오빠’에서 여유로운 ‘아저씨’로 변모

이동국의 가장 위대한 점은 역경에 굴하지 않고 전진하며 편견을 깼다는 점이다. 부진과 불운으로 잇달아 놓친 월드컵 무대, 무릎 십자인대 파열, 유럽에서의 실패 등 웬만한 선수였다면 재기가 쉽지 않았을 위기가 반복됐지만, 이겨내며 필드 플레이어로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그가 남긴 K리그 통산 최다골(228골)은 불멸의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 많은 운동량이 필요한 축구는 스포츠 전체에서 40대 선수가 나오기 가장 힘든 종목으로 꼽힌다. 골키퍼는 그나마 40대 선수가 종종 나오지만 필드 플레이어는 현역 유지만으로도 존경받는다. 2011년 만 40세에 은퇴한 김기동 현 포항 감독이 K리그에서는 이동국과 더불어 유이한 40대 필드 플레이어였다. 1967년생인 일본의 미우라 가즈요스(요코하마FC)가 여전히 선수로 활동 중이지만, 이는 ‘영웅 만들기’를 위한 억지 현역 유지라는 비판이 크다. 1979년생인 이동국은 지난 시즌에도 9골을 넣으며 득점 20위권에 들었다. 올 시즌은 부상으로 기록이 저조했지만 개막전 결승골을 포함해 초반 4경기에서 4골을 몰아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2017년부터 1년 단위 재계약을 이어온 그는 매 시즌 자신의 기량이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하며 재신임을 받았다. 여전히 30대 중반이면 은퇴를 고민하는 많은 후배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실제 염기훈·김영광·오범석 등 K리그의 많은 30대 중후반 베테랑이 “동국이 형처럼”을 외치며 은퇴 고비를 매년 넘어서고 있다.

이동국의 자기 관리 능력도 주목받았다. 그는 “스트레스와 고민을 오래 가져가지 않는 게 노하우”라고 말했다. “팀 승리를 위해 득점을 책임져야 하는 만큼, 실패도 필연적인데 모든 실패를 안고 갈 순 없다”는 지론을 밝혔다. 20대에 인생의 여러 굴곡을 넘긴 경험이 큰 힘이 됐다. 슈퍼스타로서 늘 많은 관심에 시달리며 예민했던 ‘오빠’ 이동국은 가장이 된 30대 이후 긍정적이고 마음의 여유가 있는 ‘아저씨’로 변신했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국민 가족’으로 사랑받았던 다섯 남매와 아내 이수진씨의 영향이 크다. 

이동국은 “유럽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이 실망도 하고 비판도 했다. 하지만 난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관심에서는 조금 멀어졌지만 아내와 당시 갓 태어난 첫째(재시)와 둘째(재아) 쌍둥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삶의 새 에너지를 충전했다는 것. 이후 다시 한번 딸 쌍둥이(설아·수아)와 ‘대박이’로 널리 알려진 막내아들 시안까지 태어나며 그는 축구와 가족에 온전히 집중하게 됐다. 경기 준비 기간에는 전북 현대가 있는 전주시에서, 휴가 기간에는 가족이 거주하는 인천시 송도를 오간다. 특히 자신의 뒤를 이어 운동선수(테니스)의 길을 택한 재아의 트레이너 역할까지 담당한다. 

골프도 이동국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비결 중 하나다. 훈련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팀의 중고참 선수들과 인근 골프장으로 나간다. 이 모임은 팀의 중추 역할을 하며 ‘이기는 DNA’라는 전북의 확고한 문화를 잡아주는 매개체로 유명하다.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베테랑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동시에 설령 자신이 뛰지 못해도 “팀 분위기를 살려야 한다”는 말을 늘 남긴다. 이동국의 20년 지기인 선배이자 친우인 김상식 수석코치는 “출전을 못 해도 동국이가 훈련장에서, 경기장에서 팀 분위기를 진지하고 필사적으로 만든다. 전북이 위기에서도 늘 이겨 나가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홍명보·황선홍 선배처럼 성공한 축구 지도자 되겠다”

10월28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진행된 은퇴 기자회견에서 이동국이 유일하게 눈물을 보인 때가 있었다. 부모님, 특히 아버지를 언급할 때였다. 부친 이길남씨는 70대의 고령에도 키 180cm에 육박하는 당당한 체구를 자랑한다. 해병대 출신인 그는 수영을 곧잘 했고, 그 운동신경을 아들에게 물려줬다. 이동국의 최고 팬을 자처하는 그는 30년간 뒷바라지를 했다. 특히 모든 운동선수가 부러워하는 이동국의 회복 속도는 전적으로 유전자의 힘이다.

최강희 감독은 “20대 초반 선수들도 격렬한 경기 다음 날 얼굴에 피로가 보이는데 이동국은 쌩쌩하다”고 말했다. 이동국은 “잘 먹고 잘 자는 것 외에 비법은 없다. 전적으로 부모님이 주신 선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부 선수는 잠자리에도 민감해 개인용 매트나 베개를 들고 다니지만 이동국에겐 먼 나라 이야기다. 오후에 잠깐 낮잠을 자는 패턴을 꼭 지킨다. 음식도 가리는 게 없다.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건 모친 김명자씨와 지인들이 고향인 포항에서 보내오는 반찬과 계절마다 달라지는 해산물이다. 

프로 데뷔 후 머리칼을 휘날리며 골대로 달려드는 모습이 한 마리 사자를 연상시킨다며 굳어진 그의 별명은 ‘라이언킹’이다. 이동국의 휴대전화 수신 연결음도 애니메이션 라이언킹의 오프닝 곡인 《서클 오브 라이프(생명의 순환)》다. 은퇴 후 가족과의 짧은 휴식을 예고한 그는 축구 인생의 다음 발걸음도 준비 중이다. 행정가로 노선을 정한 박지성, 방송인으로 입지를 넓혀가는 안정환·이영표 등 동시대 스타들과 달리 이동국은 지도자의 길을 착실히 준비하는 중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지도자 자격증 취득을 진행했고 현재는 프로 무대에서 코치 생활을 할 수 있는 A급을 이수 중이다. 프로 데뷔 당시 자신의 우상이었던 홍명보·황선홍 두 선배처럼 성공한 축구 지도자로 그라운드에 서고 싶다는 바람도 밝혔다.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전무는 “지도자 강습회 성적이 우수한 걸로 알고 있다. 긴 선수생활 동안 쌓은 경험이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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