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를 만든 남자] 시모노세키의 18세 도망자, 화공학 지식으로 일본 껌 시장 제패
  • 천영준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williamcheon@gmail.com)
  • 승인 2021.01.18 14:00
  • 호수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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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그룹 창업주 고 신격호 총괄회장 1주기
고독과 연구, 열정의 경영인

1월19일은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1921~2020)의 1주기다.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 과정이었다. 1948년 롯데라는 기업을 만들어 껌으로 일본 열도를 제패했고, 일본에서 번 돈을 한국은행에 예치해 1950년 6·25전쟁 전까지 국익을 챙겼다. 1960년대에는 한·일 관계 복원의 막후 실력자로 활약해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에 원동력을 제공했다. 1989년 건립한 롯데월드와 2016년 완공된 세계 5위 높이의 롯데타워(2017년 개장)는 세계적인 상징이 되었다.

일제 문화통치 시대에 태어나 총력전 시기(194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응용화학을 배우고, 전후(戰後) 소매업과 유통업으로 거대 사업 제국을 일군 신격호의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자신의 ‘샤롯데’(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여주인공)를 과연 붙잡을 수 있었을까. 혹자는 그가 자신이 일군 제국을 떠나야 했던 ‘리어 왕’(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한 작품의 주인공)과 비슷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간 신격호 총괄회장의 일대기를 다룬 책은 10여 권 있었다. 2015년에는 장남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이 《나의 아버지 신격호》라는 책을 발간하려다 미수에 그친 적도 있다. 하지만 신 총괄회장은 평생 동안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했고, 스스로 성공한 기업인으로 알려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지난해 11월, 신격호가 롯데 제국의 건설자로서 느꼈던 고독과 연구, 치열하게 세계를 일궈낸 열정을 담은 《롯데를 만든 남자 신격호론》(일본 다이아몬드 출판사, 마쓰자키 다카시 지음)이 일본에서 출간되었다. 저자 마쓰자키는 “롯데와의 교감 없이 철저한 조사와 인터뷰만으로 구축한 평전”이라고 밝혀 이목을 끌었다. 신 총괄회장의 생전 언론 인터뷰 이외에 10여 개의 서적과 동생 신춘호 농심 회장, 신준호 푸르밀 회장의 기록을 교차 검증했다고 한다. 시사저널은 총 4회에 걸쳐 ‘신격호론’의 내용을 소개, 분석하고 저자 인터뷰를 연재한다.

1990년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 개장식. 왼쪽 네 번째부터 박태준·김종필 전 총리, 신격호 총괄회장, 시게미쓰 하쓰코 여사,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나카소네 쓰타코 여사, 김대중 전 대통령 ⓒ뉴스뱅크이미지

보통학교 시절 신격호의 성적은 ‘평균 이하’

신격호는 1921년(호적상으로는 1922년) 11월3일 경남 울산군 삼동면 둔기리의 영산 신씨 세거지(世居地)에서 태어났다. 부친 신진수씨(辛鎭洙)는 빈한한 선비였다. 어머니 김필순 여사는 5남 5녀를 부양하기 위해 논밭을 일구고 장날에 읍내로 나갔던 농촌 여성이었다. 가난과 편견은 큰 장애물이었다. 부친은 신격호에게 근대 교육을 받게 할 의지가 별로 없었으나 재력가였던 큰아버지 신진걸씨(신동인 전 롯데쇼핑 대표의 조부)의 도움으로 보통학교와 농업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이 시절 신격호의 성적은 ‘평균 이하’거나 ‘보통’ 수준이었다. 언양공립보통학교 시절에는 집에서 20km를 2시간씩 걸어 등교하고 다시 2시간 걸려 하교했다. 점심을 거의 먹을 수 없어 “어떻게 하면 허기를 속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렇다 보니 공부보다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과정 자체가 고역이었다. 농업학교(울산공립농업실수학교)에 진학해서도 학업에 별 흥미는 못 느꼈지만, 고독과 사색을 즐기게 되었다. 이 시절 자주 읽은 소설과 영화는 청소년 신격호의 성장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학교를 마친 이후에는 백두산 근처의 함경북도 명천 종양장에서 양을 키우는 연수생으로 일했다. 이때 만난 기사(技師) 오쓰 다카아키(大津隆紹)와 평생의 인연을 맺는다. 그는 일본 농림성 출신의 공무원이자 수의사였다. 오쓰는 신격호가 “일본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꿈을 밝히자 그를 크게 격려하고 제자로 키운다. 훗날 그의 조카 아카바네 시게코(赤羽根子)는 롯데의 경리직원 겸 비서로 근무했고, ‘추잉 껌’ 열풍의 주역 데즈카 시치고로(手塚七五) 박사와 결혼했다. 연수생 과정을 거친 후 고향으로 돌아온 신격호는 아버지의 요구로 부농 노(盧)씨 집안의 비슷한 연배 여성(노순화 여사)과 혼례를 올린다. 하지만 1940년대의 경남 농촌은 처참할 정도로 빈곤했고 마을 원로들이 지역 분위기를 통제하는 권위적인 곳이었다. 더 이상 고향에 머물러서는 답이 없겠다고 판단한 신격호는 83엔(당시 면 공무원의 월급 2개월 치)을 들고 울산경찰서장에게 추천장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간다. 18세 때의 일이었다. 이때 쓴 이름이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였다. 한때 신격호가 2차대전 전범 중 한 사람인 외상(外相)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의 먼 친척이 아니냐고 오해받게 한 계기였다. 당시 영산 신씨는 중국 고전 이아(爾雅)의 한 구절(在辛曰重光)을 따 ‘시게미쓰(重光)라는 성씨를 설정창씨(設定創氏) 방식으로 바꿔 썼다.

장남 동주, 차남 동빈과 함께한 30대 중반의 신격호 ⓒ시사저널 포토

화공학을 전공…《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롯데 이름 탄생

밀항이 아니었다. 엄연히 합법적인 자격을 얻어 도일(渡日)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지 사정은 만만치 않았다. 당장 시모노세키(下關)항에 내린 후 특별고등경찰에게 붙잡혀 중국에서 건너온 간첩이 아닌지 심문을 받았다. 장시간 고문까지 당한 끝에 풀려난 신격호는 지인이 사는 도쿄(東京)의 스기나미로 가서 우유 배달, 신문 배달, 공장 아르바이트 같은 허드렛일을 하며 몸을 숨겼다. 경찰의 송환 압력을 겨우 따돌린 이후 그가 선택한 것은 와세다실업학교 야간부 4학년생으로 편입하는 일이었다. 주경야독 생활을 통해 실업학교를 마치고 나서는 다시 와세다 고등공학교(早田高等工校·야간 3년제)에서 응용화학을 공부했다.

먹고살기 위해 이공계 실업 코스를 선택했지만, 꿈은 작가나 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시간 날 때마다 간다 진보초 서점가에서 책을 읽었다. 174cm의 큰 키와 잘생긴 마스크 덕에 “서점에 이케베 료(池部良·당시 청춘 영화의 단골 주연)가 나타났다”고 오해를 받기도 했다. 신격호가 이때 인상 깊게 읽은 서적 중 하나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다. 훗날 롯데 창업의 계기를 제공한 작품이다.

학교를 다니며 주간에는 선반용 커팅오일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촉탁으로 일하던 신격호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 벌어진다. 전쟁터에 끌려 나가지 않기 위해 군수공장에서 노심초사하던 시절이었다. 전당포 겸 고물상 하나미쓰 핫타로(花光八太)는 신격호에게 5만 엔(현재 가치로 약 수억 엔)의 투자 의사를 밝히며 “선반용 커팅오일 공장을 만들라. 수익의 3분의 2는 내가, 3분의 1은 자네가 갖는다”고 제안했다. 작가에서 기업가로 꿈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오타구 오오모리(大森) 지역에 피마자 기름으로 커팅오일을 만드는 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2차대전의 참화를 피해 갈 수 없었다. 다음 해 4월 ‘조난 게이힌 대공습’으로 오오모리 공장이 완전히 불탔다. 신격호는 폭격이 없었던 하치오지(八王子)로 옮겨 다시 공장을 열었지만 종전 직전인 8월1일 하치오지 대공습으로 전소되었다.

출자자인 하나미쓰는 “이제 포기하자. 나는 시골로 내려간다”고 했지만 신격호는 비극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8·15  해방 이후 많은 한국인이 고향으로 돌아갔음에도 일본 현지에 남았다. 종전 후 닥친 하이퍼 인플레와 예금봉쇄, 물자 부족 사태로 인해 시장에서 소비재 수요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가 전쟁 배상금을 감당하기 위해 대량의 화폐를 찍어내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비누, 우유, 쌀과 같은 생필품이 귀해졌다.

이때 신격호가 선반용 커팅오일에 사용했던 피마자 기름이 ‘효자상품’의 원재료가 됐다. 신격호는 응용화학 지식을 바탕으로 피마자를 이용해 비누와 함께 머리에 바르는 포마드 오일을 생산했다. 처음에는 하치오지의 농가를 빌려 가내수공업에 가깝게 했지만, 나중에는 스기나미구 오키쿠보(荻窪)에 100평 규모의 공장을 세웠다. 건물에는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ひかり特殊化究所·1946년 창립)라는 간판이 붙었다. 포마드와 비누 이외에 여성용 화장품까지 만들어 팔았다. 물건 1개당 3~5엔짜리가 10엔 넘게 소매상들에게 팔렸다. 회사원 평균 월급이 200엔가량 하던 시절이었다. 10명 안 되는 직원이 화장품 사업으로 매월 4만~5만 엔가량의 이익을 냈다. 이때 거금을 벌어들인 신격호는 하나미쓰에게 투자금과 함께 집 한 채 정도의 이자를 붙여 돌려줬다. 물론 하이퍼 인플레 시기였기 때문에 ‘5만 엔+알파’의 실질가치는 그다지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신격호가 평생 동안 강조했던 신용과 열정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왼쪽부터 나가타 마사카즈 롯데 오리온스 초대 단장,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 신격호 롯데 회장 ⓒ시사저널 포토

추잉껌의 시초인 리글리사 벤치마킹해 롯데껌 론칭

화장품 열풍 이후 주목한 상품이 껌이다. 일설에 따르면 신격호와 함께 껌 사업을 하던 재일동포들이 배신한 후 “저놈들을 응징하고야 말겠다”는 일념하에 껌 생산에 주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관련 에피소드가 없다 하더라도 신격호는 꽤 오래전부터 껌 생산 역사에 대해 읽고 있었고, 화학 지식을 응용해 대량 생산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특히 추잉껌의 시초인 리글리사(Wrigley Jr. Company)가 비누를 생산하다가 베이킹파우더 한 캔에 끼워팔던 풍선껌 두 개가 더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리글리는 도매점이 아니라 잡화점과 소매점을 직접 공략해 자사 제품인 ‘주시푸르츠’, ‘스피아민트’(모두 롯데껌에 있는 브랜드명)를 계산대 옆에 진열하게 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게다가 역발상 투자 전략까지 감행했다. 1907년 공황 당시 다른 사람들이 비용을 줄일 때 과감한 프로모션과 광고 비용으로 상품의 인지도를 높였다. 그 덕분에 1차 세계대전(1914~1918) 참전 용사들에게 껌은 핵심 소비 품목이 됐다.

신격호 자신도 리글리와 마찬가지로 비누로 큰 히트를 친 경영자였다. 또 일본 경제가 황폐화 시대를 딛고 재건될 경우 큰 수요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도 비슷한 지점이었다. 전환기를 준비하려면 조직의 성격도 바뀌어야 했다. 1948년 6월, 신격호는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 간판을 내리고 롯데라는 간판으로 회사를 다시 출발시켰다. 사업목적에는 과자류 생산 이외에 낙농, 농산식품 제조, 화학약품 및 의약품 가공, 합성수지 제조·가공 품목이 추가됐다. 핵심 역량을 전환할 뜻을 확고히 한 것이다. 롯데는 같은 해 10월에 신주쿠구 하쿠닌초(新宿區百人町)에 2000평 규모의 토지를 매입한 뒤 1950년에 본사와 공장을 이 지역으로 옮겼다. 하쿠닌초는 2차세계대전 전에는 학자와 군인이 많이 살던 부유층 주거지였다. 이곳은 이후 야마노테선 오쿠보역이 들어서고, 와세다대학이 가까이 있는 도쿄 중심 상권으로 바뀐다. 롯데의 토지 투자 실력이 처음 빛을 발한 계기였다.

(왼쪽)일본에서 출판된 《롯데를 만든 남자 신격호론》, 동아일보 1972년 2월10일자 광고ⓒ시사저널 포토

경쟁 세계를 흔든 대담한 홍보 전략 ‘미스 롯데’ 미인대회 창안

‘롯데껌’의 첫 과제는 원료 차별화였다. 당시 일본에서 생산되던 껌들은 대부분 초산 비닐수지를 이용한 제품이었다. 품질은 좋지 않았고 껌을 씹다 식중독을 경험한 소비자도 있었다. 신격호도 당시 생산자들과 마찬가지로 학생, 무직자들과 함께 리어카로 초산 비닐수지를 모아 인공감미료인 사카린, 둘신을 섞어 껌을 만드는 일을 반복했다. 하지만 미군부대에서 나온 천연수지를 이용한 껌의 감촉을 당해 낼 수 있어야만 ‘일본의 리글리’라고 할 수 있었다. 신격호는 공업재료로 수입되던 천연수지 입수에 전력투구하는 한편, 와세다대 이공학부 출신 기술자를 영입해 추잉껌 품질 개선에 매진했다. 롯데 초창기의 원훈(元勳)인 데즈카 시치고로 박사는 합성 접착제 기술 전문가를 비롯해 천연고무 전문가 등을 찾아다니며 하루에 30종 이상의 껌을 시식했다. 천연수지를 사용한 롯데껌은 경쟁 브랜드로부터 견제를 받기도 했으나, 금세 전략 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5엔짜리로 롯데의 첫 ‘100억 매출 상품’인 카우보이 껌, 최초로 엽록소를 넣은 그린 껌이 히트를 쳤다. 그린 껌의 경우에는 입냄새 제거 효과와 함께 혈류량 증가, 외상 치유와 같은 효능을 프린트해 제품 안에 삽입했고 ‘그린 전성시대’를 여는 데 기여했다.

기술 연구 이상으로 롯데껌을 성공으로 이끈 비결은 공급망 관리(SCM) 실력과 마케팅 역량이다. 신격호는 우선 전국 유통망을 갖기 위해 오래된 과자점인 오사카야(大阪屋)를 인수하고 전(前) 오너였던 이노우에 나가하루(井上長治)를 판매 담당 부사장으로 임명했다. 오사카를 넘어 규슈까지 커버하게 하려는 포석이었다. 또 하리스, 모리나가 제과 등이 갖고 있는 3단계 유통망 구조(제조사·지점·대리점→특약점·중도매상→지방도매상·소매상)의 맹점을 노려 소매점 중심의 직판 체제를 기획했다. 1951년 4월에 만들어진 자전거직판부대는 하루에 60군데씩 소매상을 돌며 롯데껌을 공급했다. 처음에는 중도매상 위주로 저항이 심했고 전통 브랜드들의 공격도 상당했다. 하지만 1955년 무렵이 되자 특약점과 중도매상들 위주로 ‘롯데회’가 결성되었고 1956년에는 후쿠오카 롯데회, 홋카이도 롯데회, 도호쿠 롯데회 등 지역 유통 플랫폼이 구축되었다. 신격호는 원도매상들은 ‘프렌드회’로, 중도매상과 소매상은 ‘패밀리회’로 묶어 관리하고 판촉사원이 돌면서 이들의 의견을 수집해 신문 ‘롯데 뉴스’도 발행했다. 

롯데의 또 다른 마케팅 역량은 화제를 만드는 홍보력에 있다. 풍선껌 시장을 제패한 이후 경쟁 브랜드였던 하리스와 판껌 시장에서 격돌하면서 승기를 잡으려면 언론과 방송을 이용한 전략이 필요했다. 하리스는 아사히방송의 라디오 채널에서 ‘하리스 퀴즈’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해 송출하며 전국적인 선전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에 신격호는 분카방송(이후 닛폰방송과 공동으로 후지TV 설립)과 손을 잡고 ‘미스 롯데’라는 미인대회를 만들었다. 콘테스트 1위부터 3위까지는 오픈카에 태워 긴자, 신주쿠를 돌며 지나가는 사람들과 악수를 하는 캠페인을 내놓기도 했다. 이토록 대담한 선전의 배경에는 “공격이야말로 최대의 방어”라는 신격호의 홍보에 대한 신념이 있었다. 1958년에는 TBS 라디오를 통해 ‘롯데 노래 앨범’을 방송하게 했다. 진행자 다마오키 히로시(玉置宏)가 “입안의 연인, 롯데가 제공하는 노래 앨범”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매주 일요일 정오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롯데 노래 앨범은 1979년까지 이어지며 이브 몽탕, 알랑 들롱과 같은 세계적인 배우들까지 출연해 신격호의 브랜드 홍보 전략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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