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를 만든 남자] ‘신격호 상점’을 유통제국으로 만든 조력자들
  • 천영준 시사저널 컬럼니스트 (chunyg@sisajournal.com)
  • 승인 2021.02.09 15:00
  • 호수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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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혁신의 공신’ 혼다 도시노리 “편의점은 소비자의 삶을 책임지는 곳”
“인수·합병보다 비즈니스 DNA의 재구성에 주력”

1980년대까지의 한·일 양국 롯데는 ‘신격호 상점’이라고 불렸다. 창업주 한 사람의 카리스마에 모든 조직이 의존한 것이다. 신격호는 제품의 개발, 기획, 디자인, 마케팅, 최종 가격 산정까지 일일이 점검하는 스타일이었다. 다시 말해 그의 상식에 어긋나는 아이디어는 롯데 내부에서 통하지 않았다. 일본 재계에서는 이런 경영 방식을 가리켜 ‘원맨 경영’이라고 불렀다.

일본 롯데제과는 1988년에 2500억 엔가량의 매출 성적을 거두며 업계 톱이 되었다. 한국 롯데그룹은 같은 시기에 2조3억원(당시 환율 기준으로 3700억 엔)가량의 실적을 거뒀다. 한마디로 신격호 상점은 숫자와 기동성으로 역량을 입증하고 있었기에 ‘독무대’가 가능했던 것이다.

신격호 자신은 “한국에 있을 때는 일본의 장단점이 명확하게 보이고, 일본에 있을 때는 한국의 장단점이 명확하게 보여 제3자적 경영이 가능하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5년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일본 롯데의 매출은 3145억 엔가량이고, 한국 롯데 매출은 엔화로 환산하면 6조4798억 엔가량이다.

단순 규모로만 비교해도 30년 전에 비해 20배 이상 성장했다. 이렇게 되면 거대 롯데를 ‘원맨 경영’으로는 통제하기 어렵다. 그래서 신격호는 중요한 사업도 메인에는 전문경영인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만기친람 체제를 보완했다. 롯데쇼핑의 경우 아키야마 에이이치가 대표적이고, 1990년대에 본격화된 편의점 사업의 경우에는 혼다 도시노리(本多利範)라는 인물이 있었다.

2015년 12월1일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가운데)이 송파구 잠실 롯데월드타워(제2롯데월드) 공사현장을 방문한 후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왼쪽)과 이동하고 있다.ⓒ연합뉴스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빌린 돈 갚을 수 있는 범위에서 투자”

롯데는 1997년부터 시작된 외환위기에도 충격이 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하며, 빌린 돈을 갚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투자해야 한다”는 신격호의 경영철학 덕분이었다. 일본에 쌓아둔 1조 엔가량의 자산과 한국에 투자된 상당한 부동산 덕분에 롯데는 외풍에도 건재했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 정부는 경영난에 봉착한 포항제철의 민영화를 검토하며 출자자로 롯데를 검토했다. 신격호도 오랫동안 매달렸던 제철업이기에 마음이 많이 가 있었다. 하지만 “49%의 지분”을 전제조건으로 한 거래였기에 성립하기 힘든 면이 있었다. 제철의 꿈을 접은 신격호는 유통부문의 재구성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한국에는 ‘롯데세븐’이라는 브랜드가 1983년부터 들어와 있었다. 야간통행금지가 풀리면서 사람들의 소비 스타일도 바뀌지 않겠느냐는 것이 롯데의 예측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활습관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편의점은 정가판매를 지향했기에 근처에서 더 싸게 물건을 파는 슈퍼가 나오면 반품이 제기되기 일쑤였다. 심각한 경우에는 매출의 20%가 반품인 경우도 있었다. 또 한국 유통업 특유의 권리금 프리미엄 이슈 때문에 최초의 편의점 사업은 약 1년 만에 정리되었다. 1994년 롯데는 제록스로부터 ‘코리아세븐’이라는 유통업을 인수해 다시 편의점 사업에 뛰어들었다. 혼다 도시노리는 이 분야의 전문가로 초빙되었다.

그는 원래 세븐일레븐 재팬의 창업 멤버 출신이었다. ‘단품관리’ ‘물류정보시스템’ 등 일본 편의점 업계의 시스템들을 정착시킨 베테랑 유통 경영자이기도 했다. 세븐일레븐 재팬의 모회사인 이토요카도는 ‘기회 손실 방지’ 경영을 모토로 했다. 가령 어떤 물건이 다 팔렸을 때 추가 주문에 대비해 물류정보시스템을 통해 제조업자나 도매상과 적극 소통하면, 수요에 대응하지 못해 생기는 기회 손실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버블이 꺼진 후인 1990년대 중반 일본 시장에서 세븐일레븐 재팬이 살아남은 비결이기도 했다. 당초 신격호는 이토요카도의 창업주인 이토 마사토시로부터 “한국에 편의점을 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으나 “재래시장이 있어 사업이 될 리 없다”고 거절한 바 있었다. 하지만 막상 코리아세븐의 재구조화를 위해 세븐일레븐에 다시 손을 내밀자 스즈키 도시후미 사장은 “(이토) 회장과의 인연 때문에 사업 제휴는 어렵고, 핵심 참모를 소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결과 영입된 인물이 혼다 도시노리였다.

롯데 편의점과 할인점 사업의 유통혁신을 주도한 혼다 도시노리ⓒ혼다컨설팅

“세븐일레븐이 롯데 매점이 되면 안 돼…코카콜라도 팔아야”

그가 1998년 한국에 처음 부임해 맡은 편의점 사업은 심각 그 자체였다. 롯데호텔 주변의 점포를 방문해 접한 특유의 지저분함, 손님이 와도 인사를 건네지 않는 불친절함, 고객 응대 개념의 부재 등은 열패감의 늪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주먹밥은 말 그대로 죽어가고 있었고, 음료수들도 아무런 맥락 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전국의 130여 개 점포가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놓여 있었다. 일본에서는 세븐일레븐 점포 수가 7000개를 돌파하던 시점이었다.

우선 동일 상권 안에 여러 점포를 내는 ‘도미넌트 전략’으로 물류 효율성을 기하기로 하고, 마케팅과 고객관리 방안을 고민해야 했다. 혼다가 가장 심각한 약점으로 지목한 것은 프랜차이즈 서비스의 키를 쥐고 있는 점포지도원(FC)들의 수준이었다. 그들의 수준을 끌어올려야만, 편의점주와 점원까지 이끌고 서비스 재설계가 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혼다는 젊은이들이 몰리는 혜화동 대학로 주변도 돌아봤다. 도쿄의 20~30대가 몰리는 번화가인 시모키타자와와 거리의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보고, 제품 전략을 비교하려던 것이었다. 당시 대학로에 깔린 세븐일레븐에는 롯데칠성이 만드는 펩시콜라만 진열돼 있었고, 코카콜라는 종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상품군의 경우에도 롯데 제품이 전진배치돼 있고 인기 있는 타사 상품은 구석에 몰려 있었다. 혼다는 신격호에게 “이제 세븐일레븐은 더 이상 롯데 매점으로 기능해서는 안 된다”고 간곡하게 직언했다. 주력 상품의 변화도 절실했다. 당시 한국 편의점의 매출 40%는 담배 판매에서 나왔다. “새벽녘부터 밤늦게까지 소비자의 삶을 책임지는 것이 편의점”이라는 혼다의 성공 경험에 따라 대대적인 주력 상품의 유통 혁신이 이뤄졌다. 혼다는 편의점 도시락의 품질 강화와 차별화를 위해 롯데후레쉬델리카(1999년 출범) 창업 작업을 주도했다. 지난날 한국 롯데는 대부분 M&A를 통해 식품유통 사업을 늘려왔지만, 혼다는 아예 새로운 DNA로 비즈니스를 구성할 마음으로 과감한 도전을 한 것이다. 2000년에는 롯데가 코오롱그룹에서 한국로손을 인수했고, 과감하게 점포 조정과 재구성을 했음에도 1년 안에 1000개 점포 규모로 확장을 이뤄냈다.

 

롯데슈퍼, 재래시장의 신선도에 도전하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유통업자들이 공급하는 상품은 대개 ‘프로덕트 아웃’(공급자가 쉽게 내놓을 수 있는 제품을 중심으로 판매) 방침에 치중돼 있었다. 그렇다 보니 소비자가 원하는 가격과 품질에 부합하는 제품이 매우 부족했다. 수요층의 급격한 불만은 사업의 쇠퇴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혼다는 과거의 성공 경험을 재탕하는 방식의 마케팅이 아니라, 일상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나중에는 소비자의 일상을 이끄는 유통 방식을 고민했다. 2000년 초중반 롯데는 편의점 이외에도 마그넷(대형할인점, 롯데마트의 전신) 사업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즈니스 자체가 백화점 건물에서 시작해 백화점의 마케팅 방식을 그대로 따랐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혼다는 신선식품 공급을 롯데슈퍼마켓 사업의 차별화 포인트로 보고, 2001년 6월 서울시립대 인근의 전농동 상점가에 ‘레몬’(현재 롯데슈퍼) 1호점을 낸 것을 시작으로, 포천시점(8월), 광주시점(11월) 등을 잇따라 출점하며 “재래시장의 신선도에 지지 않는 마트”를 표방했다. 시간대별 차별화 판매 전략, 과일의 당도 보증 시스템, 편의점과 다른 시간대에 배송하는 전략 등을 도입했다. 혼다에게 마냥 어렵고 위엄이 넘치던 제왕적 면모의 신격호도, “과일 당도 보증제는 정말 잘한 일”이라고 여러 번 칭찬하며 웃었다고 한다.

롯데건설이 대표 브랜드로 내세운 롯데캐슬. 잠실역 인근의 롯데캐슬 골드(2005년 완공)ⓒ위키피디아

롯데캐슬 신화 쓴 임승남 “잘못되면 할복하겠다”

한편 다 죽어가는 회사를 살려 융성기로 이끈 인물도 있었다. 1978년 신격호가 한국 정부의 권유로 인수한 평화건설을 되살린 임승남의 이야기다. 당초 인수 작업을 맡았던 신준호(현 푸르밀 회장)는 합병 후 평화건설의 실상에 아연실색했다. 오일 쇼크로 인해 원자재 값이 오르면서 2000만 달러에 수주했던 공사가 4000만 달러를 투입해도 끝나지 않는 지경이었다. 3000만 달러에 수주했던 공사는 1억 달러를 집어넣어도 마감되지 않았다. 신준호는 직원들에게 “이 회사가 회복되지 않으면 직원들 앞에서 내가 할복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신격호는 자신이 직접 스파르타 훈련을 시킨 인물에게 특명을 내려 평화건설(1981년 롯데건설로 사명 변경)로 보낸다. 마산크리스탈호텔을 흑자화한 임승남이었다. 그는 1년에 중역과 사원들의 이직률이 30~40% 수준에 달해 사실상 조직 시스템이 붕괴되다시피 한 건설 현장을 재구조화하는 책임을 맡았다. 임승남은 중동 사업을 운영하며 본사 중심의 사업 발주제를 바꿔 조금이라도 저가 입찰이 가능한 국제 계약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당연히 연줄이 있는 임원들은 그의 방침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또 중동 사업의 접근법 자체도 바꾸어야 했다. 당시 대다수 프로젝트는 미군이 발주했기 때문에, 수주나 정산을 위해서는 워싱턴의 미 국방부까지 날아가야만 했다. 현장에서 지질조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서울 본사에서 추측으로 결과를 냈다가 모래층 1m 아래에서 암반이 발견된다든지, 물을 길어 오려면 30km나 트럭으로 이동해 실어 와야 한다든지 하는 비효율 요소가 넘쳐났다. 그래서 임승남은 약 4년간 신규 발주를 중단하고 과감한 사업 조정을 단행했다. 당장 영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직언 때문에 신격호는 “자살하라” “할복해 버려라”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지만 결국 임승남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약속은 정확히 지켜졌다. 중동에 진출한 상당수 기업은 도산했지만 롯데건설은 살아남았다.

이런 연고로 임승남은 IMF 위기 당시 다시 부채 위기에 직면한 롯데건설의 대표로 부임하게 되었다. 1200명가량의 직원이 열심히 일했지만 매출은 5000억원 수준인 데 반해 차입금은 6000억원에 달했다. 회사를 막상 정리하자니 직원들을 쇼핑이나 호텔 등 타 계열사로 보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임승남은 신격호에게 외려 배수진을 쳤다. “3년간만 시간을 주면, 매출의 5배를 달성해 보이겠습니다.” 그 전략의 일환으로 고안된 브랜드가 ‘롯데캐슬’이었다. 당시 고급 아파트 브랜드의 대명사였던 삼성, 현대, 대림의 장벽을 뛰어넘기 위한 회심의 일격이었다. 특히 멋들어진 내 집 마련의 꿈을 꾸고 있는 여성들의 환상을 자극하기 좋은 디자인과 콘셉트로 승부했다. “롯데캐슬 하면 신혼부부가 기념사진을 찍고 싶은 장소가 될 때까지 홍보했다”는 게 임승남의 전언이다. 약속대로 롯데건설의 매출이 3년 내에 5배가 된 것은 물론이고, 업계 랭킹도 20위에서 7위로 도약했다. 정부가 “아파트 값을 올리는 주범”이라고 지목할 만큼 롯데캐슬은 고급 아파트 브랜드로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

롯데건설의 주역 임승남 전 대표(왼쪽 네 번째)와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그리고 신격호 회장(왼쪽부터)ⓒ월간조선

자동차나 전자보다 역사에 남을 공간 혁명에 관심

유통업과 건설업에서 성공을 거둔 신격호는 다시 역사에 남을 만한 공간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1989년 7월 개관한 롯데월드 어드벤처가 핵심 모티브가 되었다. 1990년에는 옥외시설 ‘매직 아일랜드’가 만들어진다. 당시 신격호는 언론에 이런 심중을 털어놓았다. “우선 롯데월드 옆에 시월드(sea world)를 만들고, 그다음에는 뉴욕에도 만들고 싶다. 화장품부터 시작해 식음료 그리고 종합 엔터테인먼트를 겸한 공간으로 구축하는 것이 소망이다.”(닛케이산업신문 1990년 2월24일 기사)

유통업과 제과업에서 성공한 신격호가 제조업의 본류인 자동차나 전자제품에 뛰어들 법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역사에 남을 만한 예술작품으로서 혁명적인 공간을 만드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 1997년 3월 개관한 부산롯데월드다. 준공식에는 후쿠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등 일본의 전직 총리들이 참석해 테이프 커팅을 했다. 프로젝트 투자금액도 엔화 기준으로 800억 엔. “도시 가운데의 또 다른 도시”를 만드는 작업이었기에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게 신격호의 계산이었다. 부산롯데월드는 복합개발 과제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교인 부산상고 부지에 1992년 착공해, 1995년 12월 무렵에는 일부 선행 개업을 했다. “부산 중심가인 서면의 롯데호텔, 롯데백화점 부산본점(면세점 겸용)과 함께 도시의 소비 수준을 끌어올리는 플랫폼 역할을 하게 하자”는 것이 신격호의 복안이었다. 2006년 6월에는 관광공사의 자회사가 운영하는 세븐럭 카지노도 들어선다. 그 이후 신세계백화점이 또 다른 경쟁의 불을 댕겨 2009년 기네스북으로도 인정받은 센텀시티점(비행장 부지 재개발)이 해운대에 들어선다. 아이스링크, 골프연습장, 스파, 영화관, 문화홀 그리고 면세점 등이 복합적으로 입점했다.

여기에 맞붙을 만한 롯데의 구상은 ‘부산 제2롯데월드’였다. 실제 명칭은 부산롯데타운으로 바뀌어 실행됐다. 당초 계획안으로는 43층으로 총 객실 수는 900실 규모, 컨벤션센터와 리조트를 겸한 대형 호텔이었다. 호텔 3층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유치한 극장을 선보일 계획이었다(1000석 규모). 그리고 호텔 옆에는 한국 최대 규모로 11층 높이의 롯데백화점이 부속 건물로 들어설 계획이었다. 그중 처음 완성된 것은 롯데백화점 광복점(2009년)이었고, 다음 해에 아쿠아몰, 롯데마트, 롯데시네마 등이 차례차례 개업했다(2014년). 하지만 랜드마크가 되어야 할 높이 510m짜리(107층 규모) 초고층 타워(롯데타운타워) 사업은 계속 공회전해 2019년 1월 무렵에는 높이 300m짜리로 계획이 변경됐다.

롯데가 부산 랜드마크 사업에 ‘올인’하기 힘들었던 이유는 서울에 들어설 123층 높이의 롯데월드타워(롯데시그니엘) 때문이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가슴에 남을 만한 랜드마크가 될 초고층 건축물을 만들겠다”는 신격호의 목표가 담긴 건립 계획이었다. 롯데월드타워의 경우 일반 고층건물의 3배 이상 건립비가 들어갈 것이었다. 하지만 희대의 홍보효과를 낼 것은 확실했다. 2017년 4월경이 되어서 롯데월드타워가 그랜드오픈을 했다. 전망대는 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수준이었고, 일평균 내방객은 20만 명가량 됐다. 신격호에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성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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