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 경영’ 알 깨고 세상에 나온 젊은 총수들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1.02.25 08:00
  • 호수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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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1·2세와 닮은 듯 다른 3·4세 행보
유튜브 등 활용해 고객과 적극 소통

재계 1세나 2세 총수들은 보통 ‘은둔의 경영자’로 불렸다. 외부에 얼굴을 비치며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소통하기보다 자택에서 조용히 경영 구상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해 10월 별세한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대표적이다. 이 회장은 공식적인 일정이 없는 한 집에 머무르며 재택근무를 했다. 회사에 마련된 집무실 대신 영빈관으로 알려진 서울 한남동 승지원에 칩거하며 사색하는 것을 즐겼다. 과거 뉴스위크가 이 회장을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은둔의 제왕’이란 별명을 붙였을 정도다.

3세 체제로 전환되면서 이런 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1월18일 파기환송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재수감될 때까지 적극적으로 대외활동을 이어갔다. 글로벌빅데이터연구소는 지난해 1월1일부터 12월15일까지 뉴스, 커뮤니티, 블로그, 카페, 유튜브,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을 대상으로 10대 그룹 총수의 현장경영 정보량을 빅데이터 분석했다. 그 결과 이 부회장이 9890건으로 1만 건에 육박하는 정보량을 보였다. 2위인 이성희 농협중앙회장보다 무려 4.6배 이상 많았다. 코로나19 사태와 사법 리스크 와중에도 현장을 적극적으로 챙긴 것이다.

《이마트 LIVE》에 출연한 정용진 이마트 부회장ⓒ유튜브 캡쳐

‘재벌 총수=신비주의’ 이젠 옛말

경영 스타일도 선대 회장과 많이 달랐다. 이건희 회장의 경우 ‘제왕적 리더십’으로 유명했다. 반면 이 부회장은 현장 중심의 실용주의 경영을 강조했다. 이 회장의 와병으로 사실상 총수에 오르자마자 전용기와 헬기를 모두 매각했다. 해외출장을 갈 때도 의전 없이 혼자 공항을 오갔다. 2015년 삼성서울병원의 메르스 감염 사태 때는 직접 대국민 사과를 발표하는 등 아버지와 확연히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같은 범삼성가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도 마찬가지다. 이 회장은 1998년 삼성그룹에서 분가한 신세계그룹 총수에 올랐다. 이듬해 신세계그룹의 자산은 2조7590억원이었다. 신세계그룹은 백화점과 이마트를 축으로 외식, 호텔, 패션, 건설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2019년 신세계의 자산은 44조880억원을 기록했다. 20년여 만에 회사 규모가 16배나 커진 것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공식 석상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난 2005년 그룹이 오랜 기간 공들여 완성한 신세계백화점 본점 신관 개점식에도 이 회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오빠인 이건희 회장과 마찬가지로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막후 조정 역할에 집중했다.

3세인 정용진 부회장은 어머니와 정반대 행보를 보였다. 정 부회장은 SNS 인스타그램을 통해 대중과 활발히 소통했다. 정 부회장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현재 51만 명에 이르고 있다. 네티즌들은 정 부회장의 소탈한 모습을 담은 사진을 여기저기 퍼날랐고, 그때마다 정 부회장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최근에는 유튜브 활동에도 나섰다. 이마트는 지난해 12월17일 공식 유튜브 ‘이마트 라이브(live)’를 통해 ‘정용진 부회장이 배추밭에 간 까닭’이라는 영상을 공개했다. 정 부회장이 이마트가 거래하는 해남 땅끝마을 배추 산지에서 배추를 수확하고, 직접 배추전이나 배추쌈 등을 요리하는 영상이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렇듯 재계 역학구도가 3세와 4세 체제로 급속히 전환되면서 기업문화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언론 노출을 꺼리며 경영에 전념하기보다 유튜브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고객이나 직원들과 소통하는 총수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재벌 총수나 후계자들의 인간적인 모습에 환호했고, 그 효과는 그룹 이미지 개선과 함께 충성고객 확보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이마트가 지난해 올린 정 부회장의 ‘배추밭’ 영상은 두 달여 만에 누적 조회 수 136만 건을 기록했다. 유튜버들은 TV에서나 보던 재벌 후계자의 소탈한 모습에 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마트는 올해 1월 ‘정 부회장 배추밭 비하인드와 시장에서 장 본 이야기’ 영상을 추가로 공개했다. 이 영상 역시 한 달여 만에 92만 건의 조회 수를 올렸다. 유튜브 통계 분석 사이트 소셜블레이드는 “이마트 라이브의 하루 평균 조회 수는 4만 건 안팎이다. 하지만 정 부회장이 출연할 때마다 하루 조회 수가 수십만 건으로 폭증한다”고 밝혔다.

함영준 오뚜기그룹 회장은 장녀 연지씨와 유튜브에 동반 출연하기도 했다. 함 회장은 지난해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의 요청을 받고 SBS 《맛남의 광장》에 출연해 주목을 받았다. 최근에는 연지씨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햄연지’에도 자주 얼굴을 내비치고 있다. ‘딸과의 여행’ ‘사위와의 대화’ 등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구독자들의 호응을 이끌고 있다. 특히 ‘어버이날 특집. 요즘 핫한 오뚜기 레시피를 맛본 오뚜기 회장님의 반응은?’ 영상은 조회 수가 300만 건을 웃돌았다.

《햄연지 YONJIHAM》에 출연한 함영준 오뚜기 회장ⓒ유튜브 캡쳐

“소탈하고 유연한 CEO, 세계적 흐름”

윤홍근 제너시스 BBQ 회장의 경우 방송인 황광희씨가 출연하는 웹예능 《네고왕》에 출연해 ‘화끈한 회장님’이란 이미지를 얻었다. 당시 윤 회장은 황광희와 협상을 통해 BBQ 소비자들에게 한 달간 7000원 할인이라는 파격적인 공약을 내걸었다. 이 영상은 누적 조회 수가 800만 회를 넘어섰다. 방송이 공개된 후 BBQ 앱은 실시간 검색어와 애플리케이션 다운로드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유튜브 출연으로 매출 신장은 물론이고 윤 회장에 대한 이미지 개선까지 성공한 것이다.

이 밖에도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최근 미래에셋의 유튜브 《스마트머니》에 출연해 전기차나 배터리 산업에 대한 전망을 내놓고 토론을 벌였다. 지금까지 출연한 5회 방송의 누적 조회 수는 200만 회에 육박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베레모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모습으로 유튜브에 출연해 주목을 받았다. 임직원들과 편하게 대화하거나 강연하는 모습도 최근 자주 보여지고 있다. 이 같은 모습은 신비주의를 자처했던 기존 총수들과 차별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미래에셋 스마트머니》에 출연한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유튜브 캡쳐
SK 공식 유튜브에 출연한 최태원 SK 회장ⓒ유튜브 캡쳐

권상집 한성대 사회과학부 기업경영트랙 교수는 “글로벌 기업의 경영자들은 소탈하고 유연하다. 래리 페이지 구글 창업자가 직원들과 축구를 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인식된다. 국내 기업 총수들도 이런 시대적 흐름을 비켜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를 빗대 ‘택진이형 리더십’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라며 “총수들의 소탈하고 유연한 모습에 친숙해진 젊은 층이 그 기업 제품 구매, 심지어 인재 확보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당분간 기업 총수들의 유튜브행은 계속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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