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가 열 길 물속에서 건져올린 것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4.04 15:00
  • 호수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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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이 길어올린 ‘민중의 역사’…장면의 의미를 사유하게 만드는 흑백 화면의 담백한 힘 넘쳐

‘섬 안에 창대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중략) 성품이 신실하고 정밀하여 물고기와 해초, 바다새 등을 모두 세밀히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터득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오랜 시간 그의 도움을 받아 책을 완성하였는데, 이름 지어 자산어보라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 백과사전이라는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가 없으니 차라리 열 길 물속을 들여다보고자 했던 조선시대 학자 정약전. 그가 순조 1년, 신유박해로 인해 흑산도로 유배된 후 집필한 책 중 하나다.

영화 《자산어보》의 스틸컷ⓒ씨네월드 제공
영화 《자산어보》의 스틸컷ⓒ씨네월드 제공

홀로 위대한 인물은 없다는 믿음

동명 제목을 쓴 이준익 감독의 신작 《자산어보》는 정약전(설경구 분)과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가 서로에게 스승과 벗이 되며 책을 완성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감독은 왜 지금 조선시대의 학자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그리고 그것은 왜 하필 《자산어보》인가. 영화를 들여다보면 그 길이 보인다.

이준익 감독은 역사와 나란한, 혹은 그에 가려졌던 사연을 그리는 데 능통한 연출가다. 《황산벌》(2003), 《왕의 남자》(2005), 《평양성》(2011), 《사도》(2015) 같은 사극뿐 아니라 《동주》(2016), 《박열》(2017) 등을 통해 멀고도 가깝게 시대를 넘나드는 이야기와 그 안의 인물들을 부지런히 조명해 왔다. 그의 영화에서는 사건이 중심에 놓이지 않는다. 감독은 역사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선 사람을 주목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방식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홀로 빛나는 별은 없다’던 《라디오 스타》(2006)의 메시지처럼, 언제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읽을 수 있는 것들을 가장 먼저 주목한다.

《자산어보》 역시 마찬가지다. 《동주》에서 윤동주 옆에 섰던 송몽규의 기개와 고민을 이해하게 만든 것처럼, 《박열》에서 박열만큼이나 용감했고 강인했던 여성 후미코를 조명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정약전의 곁에서 서로 가르침과 우정을 주고받았던 창대라는 청년을 새롭게 주목한다. 실제로 창대는 정약전이 쓴 서문에 등장하는 것이 전부인, 별다른 기록이 남지 않은 인물이다. 《자산어보》는 그런 그의 사연을 극화해 정약전만큼이나 중요한 인물로 선보인다. “한 시대에 위대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결코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옆에는 그 못지않게 위대한 인물이 있다”는 이준익 감독의 믿음 때문이다.

천주교를 받아들인 죄로 정약전(설경구)이 흑산도로 유배되면서 본격적인 영화의 문이 열린다. 섬사람들은 나라의 죄인인 정약전을 멀리하려 하고, 홀어머니와 살고 있는 어부 창대(변요한) 역시 마찬가지로 군다. 그러던 창대가 마음을 연 것은 정약전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덕분이다. 홀로 글공부를 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창대에게 정약전이 글과, 공부를 제대로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렇게 창대는 정약전에게 바다와 그 안의 온갖 생물을, 정약전은 창대에게 사서삼경을 비롯한 학문을 본격적으로 가르친다.

영화에는 흑산도 유배 기간 동안 정약전이 여러 저술서을 남긴 과정이 담겨 있다. 실제로 그는 소나무 벌채 금지 정책에 관해 쓴 《송정사의》와 당시 필리핀까지 표류했던 어물 장수 문순득의 경험을 기록한 《표해시말》 등의 기록을 남겼다. 그중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남긴 서적 중 가장 실용적이다. 같은 기간 동생 정약용(류승룡 분)이 《목민심서》를 남긴 것과는 대비되는 행보다. 서학(천주교)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박해받았던 형제는 각각의 유배지에서 서민들의 삶과 깊숙이 맞닿으며 체험하고 느낀 것들을 글로 남긴다.

두 사람 모두 지식인으로서의 태도와 역할을 고민한 것이지만 결과물은 사뭇 다르다. 정약용이 정부 관리들의 횡포를 바라보며 올바른 정치에 대해 고민할 때, 정약전은 고통받는 민생을 어루만지고 실용적인 도움을 주려 한다. 정약전은 왜 학자로서 물고기 책을 썼는가. 유교에 기반한 사상이 아닌 민생에 바로 적용 가능한 지식의 기록을 남기고 싶어 하는 태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산어보》는 그 마음을 읽어내려는 영화다. 창대뿐 아니라 가거댁(이정은 분)을 비롯한 흑산도 사람들의 면면은 삶을 살면서 자연스럽게 진리와 이치를 터득한 사람들의 지혜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학문적 성취로 도달하기 어려운 어떤 경지가 있다. 영화는 바로 이것이 정약전이 붓을 들게 한 진정한 힘이었을 것이라 말한다. 극의 후반, 정약전의 곁을 떠나 학문으로 입신양명하려던 창대는 스승 없이 홀로 감당해 내는 긴 여정을 통해 그 깨달음에 도달한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은 학자의 이야기를 통해 감독이 길어올린 ‘민중의 역사’는 우리의 현재를 반추하는 거울이 된다.

 

한 편의 아름다운 수묵화를 보는 듯

《자산어보》는 흑백 영화다. 이준익 감독은 전작 《동주》를 흑백으로 만들며 인물들에게서 나오는 오롯한 힘에 집중했고, 그 경험을 살려 다시 한번 이 같은 선택을 했다. 형형색색의 치장 없이 선명하게 본질만 남은 화면은 담백하고도 힘이 넘쳐 흐른다. 흑과 백을 제외한 색을 가두었기에 오히려 역으로 더욱 선명하게 구현된 장면들도 있다. 몇몇 장면에만 색이 살짝 입혀지는데, 영화는 이를 통해 그 장면들의 의미를 사유하게 만든다.

산과 바다가 만들어낸 절경, 어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포구의 풍경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답다. 다만 하나의 거대한 수묵화를 보는 듯한 인상을 남기는 이 영화에서, 진정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배우들이다. 그들의 얼굴은 그 자체로 훌륭한 명암이 된다. 인물들의 얼굴에 파인 주름, 몸의 움직임, 시선 등 모든 것이 그대로 농담을 조절해 스크린에 입힌 먹으로 기능한다. 스크린에서 본 그 어떤 풍경보다 더욱 스펙터클하다.

“홍어 다니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 다니는 길은 가오리가 압니다.” 정약전은 창대의 이 말에서 크게 깨닫는다. 그렇게 《자산어보》는 바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길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거기에서 무엇을 볼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된다. 민생에서 멀리 있는 가르침보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들이 다니는 길의 모양과 삶의 양태를 잘 기록하려던 학자의 마음이 시간을 달려와 현시대의 혼란을 넉넉히 어루만진다.

주목, 변요한

평생 어부로 살아왔지만 글공부에 목마른 창대는 정약전과 함께 《자산어보》의 축을 이루는 인물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뭍으로 떠난 창대의 시선과 깨달음이 중요해지는 이 영화에서, 변요한은 선배 설경구의 노련함에 조금도 뒤지지 않고 든든하게 극을 떠받친다. 《들개》(2014), 《소셜포비아》(2015) 등 독립영화계에서 차세대 스타로 주목받았던 변요한은 드라마 《미생》(2014), 《육룡이 나르샤》(2015~16), 《미스터 선샤인》(2018) 등을 통해 폭넓은 연기의 결을 보여주며 자신의 얼굴을 확실히 알리는 데 성공했다. 이준익 감독은 배우의 가장 인상적인 얼굴을 스크린에 아로새기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이는 연출가다. 《동주》가 박정민을, 《박열》이 최희서를 발견하게 했다면, 이번에는 변요한의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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