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김택진을 스타 만든 비결은 이것?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1.04.15 10:00
  • 호수 164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네이버 이해진‧쿠팡 김범석 뒤이어…‘네카라쿠배’가 이끄는 생태계

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달의민족(우아한형제들)의 앞글자를 합친 ‘네카라쿠배’는 요즘 뜨는 신조어다. 취업시장에서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는 기업들을 묶어 부르는 것이다. 스타트업으로 출발한 이들 IT 기업이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삼성·LG 등 전통적인 대기업보다 더 인기를 끌게 될지 누가 알았을까. 카카오와 배달의민족 설립 과정에 관여했던 박용후 피와이에이치 대표는 “신생 회사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꼽으라면 최고경영자(CEO) 또는 오너가 누구인지다”라고 강조했다. 수장(首長)의 마인드와 경영능력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시사저널이 실시한 ‘IT 기업인 선호도’ 설문조사에선 네이버·라인의 이해진(3위), 카카오의 김범수(1위), 쿠팡의 김범석(4위), 우아한형제들의 김봉진(5위) 등 네카라쿠배 창업자들이 모두 순위권에 들었다. 이 밖에 2위 김택진 엔씨소프트 창업자, 6위 이재웅 다음 창업자(전 쏘카 대표), 7위 김정주 넥슨 창업자 등도 개인 능력으로 회사 성공을 견인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김범수, 국민 메신저 개발…웹과 모바일 모두 석권 

김범수 카카오 의장은 29.4%의 응답률로 압도적인 1위에 올랐다. 특히 만 19~29세 응답률이 46.5%로 도드라지게 높았다. 30대 35.7%, 40대 34.3%, 50대 30.5%, 60세 이상 19.1% 등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응답률은 반대로 낮아졌다. 

김 의장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을 안 쓰는 이는 찾기 어렵다. 설립 16년 차 기업인 카카오는 4600여만 명이 이용하는 카카오톡을 기반으로 대기업 반열에 올랐다. 2020년 기준 97개 계열사를 거느린 카카오 제국은 지금도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2남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난 김 의장은 1986년 서울대 산업공학과에 입학해 공학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2년 동(同)대학원 석사 과정까지 마치고 삼성SDS에 입사했다 5년여 만에 박차고 나왔다. 당시는 PC통신 시대가 인터넷 시대로 바뀌던 시기였다. 그는 “인터넷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게임을 만들겠다”며 500만원짜리 마이너스통장만 들고 창업했다. 

오피스텔에서 시작한 게임 사업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직격탄을 맞았다. 코너에 몰린 김 의장이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을 받음)을 통해 한 일은 국내 최대 규모 PC방 개업이다. 자금난을 해결하면서 개발한 온라인 게임의 테스트도 진행할 계획이었다. 다행히 PC방엔 손님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게임 사업은 날개를 달았다. 

김 의장은 1998년 11월 한게임커뮤니케이션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게임 개발과 유통에 뛰어들었다. 게임 회사 경영은 물론 고객과 코앞에서 만나는 PC방 영업까지 섭렵한 김 의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최악의 리더는 결정하지 않는 리더”라는 점을 깨달았다.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빠르게 승부수를 던져 기어이 전화위복을 만들어내는 경영 방식은 이때 확립됐다. 

1999년 들어 김 의장은 PC방 사업을 접고 국내 최초 온라인 게임 포털 한게임 오픈에 집중했다. 그해 12월 출시된 한게임은 3개월 만에 가입자 100만 명을 모았다. 치솟는 트래픽에 버거워하던 한게임은 지체 없이 인터넷 검색 업계 선두주자 네이버와의 합병을 결정한다. NHN의 탄생이었다.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와 함께 NHN을 이끌며 ‘성공의 끝’을 맛본 것 같았지만, 김 의장은 2007년 또다시 도전에 나섰다. 앞서 창업했던 아이위랩(카카오 전신)으로 자리를 옮겨 2년 반 동안 실패를 거듭하다가 결국 반전을 이뤄낸다. 2010년 3월 출시된 카카오톡은 스마트폰 확산기와 맞물려 대한민국 소통 문화를 바꿔놓았다. 현재는 모빌리티·금융·게임 등 다양한 비즈니스로 활용 분야를 넓히며 확고부동한 수익원이 됐다. 

카카오로 사명을 바꾼 아이위랩은 2014년 2위 포털 업체 다음커뮤니케이션과 합병해 덩치를 불렸다. NHN과 카카오의 성공으로 김 의장은 국내 양대 온라인 플랫폼, 웹·모바일 시대를 모두 석권한 인물이 됐다. 이제 김 의장의 눈은 IT 업계를 넘어 산업 생태계 전체로 향하고 있다. 이미 재산 절반(약 5조원)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사회·경제적 문제 해결에 발을 담갔다. 

(왼쪽부터)김범수 카카오 의장·이해진 네이버 글로벌 투자책임자·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이사

스타 IT 기업인 모두 기술 개발로 위기 돌파 

1위 김 의장에 이어 2위(응답률 9.6%)를 기록한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이사는 40대 응답률(18.6%)이 특히 높았다. 40대는 엔씨소프트의 온라인 게임 ‘리니지’가 1998년 출시됐을 때 고등학생 혹은 대학생이었다. 2011년엔 친숙한 게임 회사 대표가 야구광으로서 프로야구단(NC 다이노스)까지 창단하는 만화 같은 장면도 목격했다. 

1997년 박사과정(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중퇴와 동시에 엔씨소프트를 세운 김 대표가 이듬해 내놓은 리니지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엔씨소프트는 리니지에 이은 후속작들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세계적인 게임 기업으로 성장했다. 승승장구하던 엔씨소프트는 2015년 들어 넥슨과의 경영권 분쟁, 모바일 시장 부진 등을 겪으며 주춤했다. 김 대표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좌우명을 되뇌며 늘 하던 대로 기술 개발에만 천착했다. 그 결과 엔씨소프트는 지난해 ‘리니지M’ 시리즈의 선전에 힘입어 사상 최고 실적을 올렸다. 김 대표는 올 3월25일 임기 3년 연장이 결정된 직후 “엔씨소프트는 올해 더 큰 성장을 준비하고 있다”며 “플랫폼의 경계를 뛰어넘어 꾸준히 다양한 핵심 역량들을 확보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3위(응답률 8.6%)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겸 글로벌투자책임자(GIO)는 1위 김범수 카카오 의장과 비슷한 점이 많다. 같은 서울대 공대 86학번(이 GIO는 컴퓨터공학과)에 삼성SDS 출신이다. 국내 IT 업계를 이끌어왔고 한때 동업도 했다. 지금은 각자 몸담은 회사에서 CEO가 아님에도 그 이상의 영향력과 대표성을 지닌다. 

그런데 이 GIO는 다양한 창업 경험을 한 김 의장과 달리 네이버 한 우물만 팠다. 그는 1997년 삼성SDS 재직 당시 사내 벤처인 네이버포트를 만든 뒤 1999년 분사하면서 네이버컴 사장이 됐다. 이어 김 의장의 한게임에 합병을 제안해 2001년 NHN을 탄생시켰다. 네이버는 점유율 1위 포털로 올라섰다. 김 의장이 NHN을 떠나 카카오톡을 성공시키자, 김 의장과 이 GIO의 라이벌전도 본격화했다. 이 GIO는 모바일 메신저(라인)를 비롯해 각종 비즈니스 플랫폼을 선보이며 카카오와 경쟁하고 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