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대신 ‘백신’으로 글로벌 패권 경쟁
  • 천영준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4.26 07:30
  • 호수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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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英·佛·中·러 ‘5강’의 정치화된 백신 경제, 이제는 안보 관점으로

백신은 이제 약품이 아니라 안보 설비가 되고 있다. 방역 효과가 부진했던 선진국들이 백신 개발과 생산으로 새로운 시간을 주도하고 있다. 원천기술을 갖고 있는 미국·영국·독일 그리고 중국·러시아가 갑을 관계를 조성하는 판국이다. 한국이나 일본처럼 방역에 치중하던 나라들은 이제 선발주자의 옷자락이라도 잡아야 하는 심정이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선진국들이 백신 문제에 다양한 정치적 변수를 결합시키는 일이다. 미국이 대표적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화이자 백신을 구하기 위해 직접 날아간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와 원전 방류수 문제, 미얀마 문제를 협의했다. 80%에 가까운 집단면역을 달성한 영국은 유럽의 백신 부족 상태를 정치적 무기화할 가능성을 엿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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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사진공동취재단·AP 연합·EPA 연합

백신 테스트 통해 확인한 ‘팍스 아메리카나’

스가 일본 총리는 4월18일 미국 워싱턴에서 화이자 백신 약 1억 회분을 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원래 일본은 백신 총괄 각료인 고노 다로 행정개혁상을 파견하려 했다. 하지만 화이자 측이 “총리가 직접 오라”고 하자, 스가 총리가 직접 방미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당초 계약한 1억4400만 회분에 더해 1억 회분 가량의 추가 공급을 성공시켜, 이제 전 국민이 1인당 2회가량의 백신주사를 맞을 수 있게 됐다.

사실 스가 정권으로서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3월15일까지 일본의 1회 이상 백신 접종자는 200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하루 최대 확진자도 4000명 선을 넘어 초긴급사태가 장기화하고 있었다. 아스트라제네카(AZ) 6000만 명분, 모더나 2000만 명분을 확보했지만 후생노동성 심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다. 이번에 계약한 화이자 백신 1억 회분도 생산공장이 벨기에에 있기 때문에 불확실성은 어느 정도 있다. 유럽연합(EU)이 백신 수출규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의 보증 덕분에 일본은 어렵게라도 전 국민에게 백신은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과 스가 총리의 회담은 미·일 백신 협력의 본질이 안보 협력임을 재확인하는 계기였다. 정상회담 당일 저녁 대접도 받지 못했지만 일본으로서는 한 번의 만남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을 얻었다고 자평(自評)하고 있다. 우선 미국은 4월13일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를 방류하기로 한 결정을 지지하고 있다. 물론 미국 측은 IAEA와 함께 기술적인 검토를 한 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국의 심리적 거부감을 자아내는 오염수 방류 지지는 일본을 안보 협력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일본의 원전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일 상호방위조약의 부속협정을 통해 관리되는 안보 인프라다. 게다가 일본은 미얀마 문제와 관련해서도 미국의 파트너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성 김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전 주한 미국대사)는 일본 외무성 관계자와 긴밀한 협의 후 트위터에 사진을 공개했다. 미얀마 군부와 가까운 중국을 향한 메시지라는 지적이 많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 3월 “일본은 미국에 종속된 국가”라고 가시 돋친 말을 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일본이 얼마나 미국과 가까운지 중국 스스로 입증하는 격이었다. 바이든 행정부는 백신이라는 ‘생명 안보’ 설비를 동맹국에 지원하면서, 다른 정치적 의제까지 지혜롭게 해결하고 있다. 일본은 좌고우면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미국에 큰 점수를 딴 셈이다. 바야흐로 백신 테스트로 재확인된 ‘팍스 아메리카나’다.

 

브렉시트 정치에 백신 이슈 동원한 영국

영국은 브렉시트(Brexit) 정치에 백신 이슈를 동원하고 있다. 한동안 EU와 영국은 백신 수출 문제로 심하게 갈등했다. 가령 영국이 원천기술을 갖고 있는 AZ 백신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생산되고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EU는 이 백신들을 해협 너머로 보내지 못하게 했다. 익명의 EU 집행위원회 관계자는 3월22일 로이터통신과의 통화에서 “EU 국가에서 생산된 AZ 백신은 모두 권역 내에서만 사용될 것”이라며 사실상 영국 수출을 금할 방침을 확인했다. 실제 영국은 네덜란드의 할릭스사에 외주를 준 AZ 백신 물량을 자국으로 들여가려 했으나, EU 측의 규제로 막힌 바 있다. 만약 영국이 EU를 탈퇴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갈등이다. 하지만 보리스 존슨 총리는 “오히려 브렉시트 덕분에 대륙과 섬 간 사람 이동도 차단하고, 백신 우선접종도 가능한 것”이라는 선동적인 입장을 내놨다. 4월 중순 기준으로 영국은 80%에 육박하는 집단면역률을 자랑한다.

영국도 EU에 타격을 줄 만한 ‘카드’를 갖고 있다. 화이자 백신의 핵심 원료가 영국산이다. 요크셔주 화학업체인 ‘크로다 인터내셔널’이 만드는 지방 성분이 화이자 측에 5년간 공급된다. 만약 EU의 무역 공격에 보복할 요량이라면, 유럽향(向) 원재료 수출을 막으면 된다. 물론 브렉시트 이후 여러 외국 기업을 유치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영국이 쉽게 쓰기 힘든 전략이라고 하지만, 수출규제가 가시화될 경우 EU는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는다.

결국 화이자 측이 직접 나서 EU가 영국에 약품 수출을 막지 않도록 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브렉시트 이슈와 백신 이슈가 함께 불붙어 큰 재난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EU 가입국 안에서도 수출규제와 관련된 입장이 각각 다르다. 독일·스웨덴·네덜란드 등은 신중론을 내세운다. 반면 이탈리아·프랑스 등은 ‘한 번 해보자’는 입장이다. EU 집행위원회는 3월24일 백신의 역외 수출 제한 대상국 범위를 확대할 방침을 발표했다. 하지만 영국에 대해서도 계속 강경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2월 백신 원조 관련 방안을 제시했다. EU와 영국이 토닥거리는 사이, 여러 제품을 위탁생산하는 프랑스의 국가원수는 유럽 대륙 밖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중국과 러시아가 백신 공급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움직임을 견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미국·영국을 비롯한 각국 정상들에게 “미국과 유럽이 확보한 백신 물량 중 5%를 아프리카에 보내자”고 제안했다. 실제로 남미 국가들은 이미 중국산 백신을 승인하고 대규모 접종을 하는 상황이다. 중국·러시아 제품들은 효능이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유통이 편리하다는 이유로 개발도상국에서 환영받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번 백신 원조가 국제적 다자주의를 실험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여러 선진국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가도록 제안했다.

물론 프랑스 정부 내에서는 백신 정책과 관련해 설왕설래가 있다. 당장 마크롱 자신이 AZ 백신에 대해 불신을 드러내 논란거리가 됐다. 늦여름까지 전 국민 접종을 완료하겠다고 발표했음에도 프랑스는 유럽에서 백신 신뢰도가 가장 낮은 나라다. 유명 제약사인 사노피를 비롯해 프랑스의 여러 제약사가 화이자·모더나 제품을 위탁생산하고 있지만, 국민의 만족도가 높지 않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마크롱의 지지율(52%)과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르펜 대표가 얻은 지지율(48%)의 격차가 매우 좁다. 2017년 대선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사노피의 백신 후보물질 개발 실패, 낮은 AZ 접종률 등으로 뒤처진 백신 대응이 마크롱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100명당 백신 접종률은 유럽에서 최저 수준이다. 영국이 26.8회, 독일이 6.1회지만 프랑스는 5.5회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최근 앙마르슈 의원들이 몇몇 법안에 반발해 탈당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마크롱의 정치에는 악재만 생기고 있다. 만약 그가 재선을 노린다면 백신 정책과 관련해 새로운 수를 내야 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국제적 접근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것이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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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4월16일 워싱턴DC 백악관 장미정원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 콜로니데를 거닐고 있다ⓒAFP 연합

러시아 백신 도입 검토하는 文 정부, 미·중과의 관계도 고민 

이 와중에 한국은 러시아산 백신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발언한 대로 지자체별로 백신 제품을 선택하는 방안도 뒤늦게 고려되는 상황이다. 러시아 약품의 효능과 안전성 못지않게 뒤따르게 될 국제정치적 상황까지 논쟁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4월21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 바이든 행정부에 쓴소리를 했다. 비핵화를 위해 북한과 대화하고,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중국과 협력하라는 메시지였다. 백신의 정치적 힘을 바탕으로 안보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미국과는 정반대 방향의 발화였다. 전직 대통령인 트럼프의 외교가 변죽만 울렸다는 지적도 예의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창 한·미 백신 스와프 등을 운운한 우리네 사정상 적합한 처신이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한·미 간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협력 확대가 백신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려울 때 도와야 진짜 친구라는 이야기까지 덧붙였다. 하지만 동맹국 간 의료적·경제적 호혜관계가 안보 차원의 주고받기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당장 미국이 완성시키고 싶어 하는 ‘쿼드(Quad·4개국 안보협의체)’에 대해 한국이 좋은 답을 주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또 바이든 행정부는 사드 추가 배치와 같은 외교 현안에 대해서도 한국 정상과 긴밀한 소통을 원하지만 이 역시도 중국 눈치가 보이는 이슈다. 백신 제공의 반대급부로 우리가 줄 것이 마땅치 않은 형국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최근 외교부에 러시아산 스푸트니크V 백신 관련 정보를 수집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이자나 모더나 제품은 초저온보관이 필요하지만 스푸트니크V는 일반 냉장보관을 해도 된다고 한다. 국내 업체가 생산하고 있다는 점도 나름의 이점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효능과 유통의 편리성과 별개로 백신 도입 이후 정치적으로 뒷받침해야 할 숙제들이 큰 걱정거리다. 러시아에 대해 극도의 불신을 보이고 있는 미국 행정부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러시아와 협력하는 관계지만 경쟁을 하기도 하는 중국에는 무엇이라고 이야기할 것인가.

전략적 중심 없이 표류하다가 제대로 된 백신 접종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김택환 경기대 특임교수는 “선진국 정부들의 과감한 기업 지원과 전략적 반응성, 국제적 판도를 읽는 능력 등을 우리 정부가 배워야 한다”고 지적한다. 방역 선진국을 자부하거나 “백신이 빨리 도입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는 식의 관념적 논의를 하는 사이 골든타임이 다 가버렸다는 것이다. 새로 청와대 방역기획관으로 임명된 기모란 교수도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제 백신경제는 국제정치 이슈다. 현명한 대처가 없으면 그 피해는 우리 국민이 보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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