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천하’로 끝난 유럽 축구 펜트하우스의 꿈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5.02 12:00
  • 호수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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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옥(屋上屋) 원한 12개 슈퍼클럽, 유럽 슈퍼리그 창설…코로나19 위기가 부른 탐욕의 꿈, 거센 저항에 막혀

축구 역사의 변곡점을 꿈꾼 빅클럽들의 혁명이 조기에 진압됐다. ‘3일 천하’로 끝난 그들의 반란은 비록 꿈을 뒤로 미루게 됐지만, 유럽 축구를 넘어 글로벌 스포츠에 중요한 시사점을 남겼다.

한국 시간으로 4월19일 오전 7시 유럽 최고 클럽들이 일제히 ‘유러피언 슈퍼리그(ESL)’ 참가를 기습 발표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리버풀, 첼시, 아스널, 맨체스터 시티, 토트넘과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레알 마드리드, FC바르셀로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이탈리아 세리에A의 유벤투스, AC밀란, 인터밀란 총 12개 클럽이 ESL 구성원이 된다고 발표하며 출범을 공식화했다. 

모두가 2020년에 포브스가 발표한 축구클럽 가치 순위 16위 안에 들었던 팀들로 최강의 명문 구단들이다. 그들이 거둔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우승 횟수만 총 40회로 전체 우승의 60%가 넘는다. 이들과 같은 레벨인 독일의 바이에른 뮌헨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프랑스의 파리생제르맹 등도 참여가 예상됐는데, 현재 참가를 보류했으나 ESL 측이 계속 설득 중이라고 한 3개 팀으로 점쳐졌다.

리즈 유나이티드의 팬들이 4월19일 리즈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앞두고 유럽 슈퍼리그 계획 및 리버풀의 슈퍼리그 참여에 반대하는 현수막을 들고 있다ⓒAFP연합
리즈 유나이티드의 팬들이 4월19일 리즈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앞두고 유럽 슈퍼리그 계획 및 리버풀의 슈퍼리그 참여에 반대하는 현수막을 들고 있다ⓒAFP연합

챔피언스리그보다 3배 높은 중계권 수익에 솔깃

ESL 초대 회장을 맡은 레알 마드리드의 플로렌티노 페레즈 회장은 “위기에 처한 축구를 구하기 위한 도전이다. 품질이 떨어지는 경기 때문에 대중의 관심이 떨어지고 있다. 변화에는 반대가 따르지만, 이것은 위대한 개혁이 될 것”이라며 자신들의 대의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참가하기로 한 클럽들은 구속력 있는 계약까지 맺었다. 절대 깨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보통 유럽 축구는 주말에 자국 리그 경기를 소화하고, 주중엔 UEFA가 주최하는 클럽대항전(챔피언스리그·유로파리그)을 치른다. 그동안은 유럽 주요 리그 상위 3~4개 팀이 출전 자격을 얻는 챔피언스리그를 ‘꿈의 무대’라고 꼽았지만, ESL은 그것을 넘어서 ‘별들의 전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ESL의 대회 방식은 ‘옥상옥’이다. 챔피언스리그 우승 후보급 전력의 15개 팀에 직전 시즌 자국 리그 성적 기준으로 5개 팀을 추가, 총 20개 팀이 참여한다. 

챔피언스리그를 버리고 ESL로 건너온 창립 멤버 15개 팀은 자신들의 지위를 고스란히 인정받는다. 성적과 관계없이 무조건 ESL에 잔류한다. 나머지 5개 팀만 성적에 따라 매 시즌 교체되는 것이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고, 입성한 이들의 권리를 보장받는 것은 마치 인기 드라마 《펜트하우스》의 배경이 되는 ‘헤라팰리스’ 같은 시스템이다. 

기존 틀과 질서를 깬 도전 뒤에는 든든한 물주가 있었다. 페레즈 회장과 유벤투스의 안드레아 아리 회장이 주도한 이번 프로젝트에는 미국의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이 약 6조7000억원의 초기 투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이 막대한 자금은 축구계 내에서 기득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슈퍼클럽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당근으로 이어졌다. 창립 멤버에게는 참가비 명목으로 4000억원을 지급하고, 우승 상금도 현재 챔피언스리그(약 250억원)의 10배 규모를 제시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중계권 수익이었다. JP모건과 ESL 회장단이 아마존프라임·디즈니플러스·넷플릭스 등 미디어 생태계의 새 주인공인 글로벌 OTT 및 구글·페이스북 등 거대 기업과 초기 접촉을 진행했다. 과거처럼 방송국 중심의 중계권 사업이 아니라 소비자(팬)가 건당 요금을 지불하는 미국식 페이 퍼 뷰(PPV) 방식을 추진한 것이다. 이 경우 중계권 수익은 챔피언스리그 참가 때 받을 수 있는 최대치(약 800억원)의 3배 이상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계산은 코로나19로 인해 2년 동안 재정 적자가 심화된 유럽 슈퍼클럽들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유럽 각국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강도 높은 셧다운을 진행했고, 현재 대부분의 축구 경기가 무관중으로 진행 중이다. 클럽 수익의 30%를 지탱하던 티켓 수입이 증발했고, 경제위기로 스폰서들도 빠져나갔다. FC바르셀로나는 6000억원, 레알 마드리드는 4000억원이 넘는 순부채에 허덕이는 중이다. 페레즈 회장은 “선수 인건비만 늘고 있다. 이대로면 수년 후 파산한다”고 호소했다. 최근 10년간 프리미어리그 구단을 인수한 미국 스포츠 재벌들의 불만이 특히 컸다. 이번에 ESL에 참여한 프리미어리그 6개 구단 중 4개 구단(맨유·리버풀·아스널·토트넘)이 미국 구단주 소유인데, 그들도 이번 프로젝트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일보 후퇴일 뿐 완전한 포기는 아니라는 관측 우세

문제는 이 같은 개혁이 축구계 내부의 지지가 없는 상태에서 진행됐다는 것이다. 우선 UEFA가 강력히 저항했다. 클럽대항전의 흥행을 책임지는 주역들이 빠져버리면 연간 4조원 규모인 중계권 총수익은 반 토막이 날 게 뻔했다. 알렉산더 세페린 UEFA 회장은 FIFA(국제축구연맹)와 공조해 ESL에 참가하는 클럽의 선수들은 월드컵·유럽선수권·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반격했다. 클럽월드컵의 규모를 키우고 싶은 FIFA 입장에서도 ESL이라는 경쟁자의 등장은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양대 거물인 바이에른 뮌헨과 파리생제르맹의 불참 선언은 ESL의 추진력에 제동을 걸었다. 독일 클럽들은 외국 자본이나 특정 기업이 지분의 절반 이상을 소유해 팀을 독단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방지하는 50+1 규정을 운영 중이다. 팬들의 의사에 반하는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신흥 강호 파리생제르맹은 카타르스포츠투자청 소유인데, 2022년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앞두고 FIFA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참여하지 않았다. 

팬들의 반발은 더 거셌다. 돈을 좇기로 한 슈퍼클럽들의 선택에 거세게 항의했다. 유럽 축구는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지역사회를 통해 성장한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클럽들이 모여 만든 거대한 생태계다. 그 안에서 상하부 리그의 피라미드 구조를 설립, 승격과 강등이라는 드라마를 매개로 팬들은 웃고 운다. 자본과 화려한 스타로 무장한 슈퍼클럽들이 그들만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폐쇄적인 미국식 스포츠 구조를 택하려 하자 유럽 민중의 반발이 일어난 것이다. 정치권의 압박도 시작됐다. 5월6일 지방선거를 앞둔 영국은 팬들의 의사를 지지했다. 보리스 존슨 총리와 올리버 다우든 문화부 장관은 “그동안 클럽들을 위해 지원한 투자, 시설 지원을 재검토할 것이고 클럽 소유 구조를 개혁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며 압박을 가했다. 

결국 4월21일 프리미어리그 6개 슈퍼클럽은 전원 ESL 탈퇴를 선언했다. 토트넘과 아스널은 공식 사과문을 올렸고, 맨유는 이 일에 책임을 지고 에드 우드워드 부회장이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인터밀란, AC밀란도 ‘손절’에 나섰다. ESL 창립 공식 발표 후 56시간 만에 벌어진 3일 천하였다. 슈퍼리그 측도 “프로젝트를 재구성하기 위한 검토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며 우회적으로 백기를 들었다. 

하지만 ESL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유럽의 대다수 인기 구단은 적자 누적이 심화되는 상태다. 10대 유망주조차 이적료가 1000억원을 넘어서며 몸값 인플레가 심화됐다. 신규 팬층의 유입은 지지부진하다. e스포츠의 성장세에 축구·야구·농구 같은 기존 스포츠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위축되고 있다. 구단 매각을 통한 ‘폭탄 돌리기’ 외에는 해결 방안이 없는 상황. ESL은 그런 흐름을 타개하기 위한 도전이었고 큰 그림을 보여줬다. 실패한 혁명은 분명 또 다른 도전을 낳는 것이 역사의 윤회다. 처음으로 실체를 드러낸 슈퍼클럽들의 야망은 일보 후퇴일 뿐, 완전한 포기는 아니라는 것이 대다수의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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