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삼성 관통하는 키워드는 ‘사법 리스크’와 ‘연말 인사’
지난 8월 가석방 이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대외 행보가 본격화되면서 경영 복귀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올해 말 삼성그룹의 정기인사와 조직개편은 ‘이재용 시대’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첫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이 10월25일 고(故) 이건희 회장 1주기를 맞아 ‘뉴 삼성’을 언급한 만큼 대대적인 물갈이가 불가피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 부회장의 측근 임원들을 중심으로 삼성그룹 내부 권력지형이 새롭게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새로운 삼성에 대한 의지가 이번 인사를 통한 고위 임원 세대교체로 나타날 것이라는 게 재계의 조심스러운 시각이다. 자연스럽게 이 부회장의 복심으로 분류되는 삼성그룹 핵심 임원들에게 시선이 쏠리고 있다.
정현호, ‘미전실’ 출신 중 유일하게 사장으로 복귀
삼성그룹의 실세 임원들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이 부회장의 ‘사법 리스크’다. 이 부회장의 측근 그룹은 현재 사법·재무·대외협력(CR) 등으로 크게 나뉜다. 이는 여전히 재판과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이 부회장의 처지와 삼성그룹의 미래 먹거리 사업과 정확히 맞물려 있는 분야들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국정농단 사태로 구속된 후 1년간 재판과 수감 생활로 경영활동의 발목이 잡혔다”며 “이런 상황에서도 각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이 부회장 측근들이 구원투수로 등판해 총수의 복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정현호 삼성전자 사업지원태스크포스(TF) 사장이 이 부회장의 핵심 측근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정 사장은 삼성그룹의 모든 컨트롤타워 조직을 거친 전략·기획통이다. 이병철 창업주 시절 비서실에서 출발해 구조조정본부와 전략기획실, 미래전략실, 사업지원TF 등 삼성그룹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 때문에 정 사장은 국정농단 사건으로 촉발된 이 부회장의 사법 리스크에 연루돼 여러 고초를 치렀다. 검찰 조사도 여러 차례 받았다. 정 사장이 속했던 미래전략실(미전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인 최순실씨(개명 후 최서원)에게 수십억원을 지원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정 사장 역시 임원직에서 사퇴하고 2017년 삼성을 떠났다.
하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아 정 사장은 사업지원TF 사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정 사장은 이 부회장이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같이 구치소로 출근해 이 부회장의 옥바라지를 하고 경영 메시지 등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전실이 해체된 후 8명의 사장급 임원 중 삼성전자로 재입사한 인물로는 그가 유일하다. 정 사장이 이 부회장의 복심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대목 중 하나다.
이런 배경 때문에 삼성그룹 안팎에서는 정 사장을 ‘2인자’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 부회장 역시 정 사장을 가장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 사정에 정통한 한 재계 관계자는 “정 사장은 이 부회장이 속 터놓고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며 “두 사람은 성격과 경영 스타일도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사법 분야에서는 특수통 검사 출신인 최재경 삼성전자 고문이 이 부회장의 최측근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 고문은 지난해 삼성그룹이 경영권 불법 승계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을 당시 변호인단에 합류해 이 부회장에 대한 방어를 총지휘했다.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에서 이 부회장의 ‘불기소 권고’를 받아낸 일등 공신이다.
“최재경, 이재용 부회장 수감 때 독대 면회”
최근 삼성 사정을 잘 아는 핵심 관계자는 “이재용 부회장이 수감돼 있을 때 관련 규정에 따라 변호인만 면회가 가능했다고 한다”며 “사실상 2인자인 정현호 사장도 이 부회장을 못 만났다. 최재경 고문만 일주일에 한 번꼴로 이 부회장을 독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현재 최 고문은 변호인단에서 물러난 상태지만, 여전히 이 부회장의 지근거리에서 각종 법률 문제에 대해 조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법원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에서 수십 명의 변호사가 일하고 있지만, 최 고문이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정 사장 다음으로 이 부회장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이가 최 고문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정 사장은 삼성의 대내적인 측면을, 최 고문은 대외적인 측면을 조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삼성 관계자들은 지난 8월 이 부회장이 광복절 가석방으로 출소한 이후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은 정 사장과 최 고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삼성전자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최윤호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 사장은 ‘넘버3’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부회장 부재 상황에서 꾸려진 비상경영체제에서 최 사장은 최고재무책임자(CFO)로서 삼성전자 3인의 각자 대표와 중심축 역할을 해내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회의 기구를 이끄는 등 삼성전자를 움직이는 핵심 인사로 발돋움했다.
최 사장은 삼성전자 경영관리그룹 담당임원, 구주총괄 경영지원팀장을 거쳐 지난 2010~14년 미전실에서 근무했다. 특히 삼성전자 CFO인 경영지원실장은 회사 실적을 총괄 관리하는 자리니만큼, 총수 일가의 측근들이 주로 거쳤다. 2010년 이후만 봐도 CFO를 지낸 인사들은 모두 삼성 실세로 불렸던 이들이다. 최 사장은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과 마찬가지로 ‘미전실·재무통’ 출신으로 경영지원실장 자리를 꿰찼다.
이인용 삼성전자 CR(대외업무)담당 사장 역시 이 부회장의 측근으로 꼽힌다. 이 부회장과 서울대 동양사학과 선후배 사이로, 이 부회장과 직접 소통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방송기자 출신으로 삼성미래전략실 커뮤니케이션팀장 등을 역임했던 이 사장은 2017년 삼성 사회공헌업무 총괄고문으로 물러났다가 지난해 1월 CR담당 사장으로 일선에 돌아왔다.
동시에 사측에서 유일한 준법위 위원으로 선임되며 삼성 측 입장을 외부 위원들과 조율하는 중책을 맡았다. 이 부회장으로부터 경영권 승계 논란 사과와 무노조 경영 폐지, 시민사회 소통 등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이 사장은 삼성전자 대외협력 업무와 동향 파악 등을 총괄하며, 이 부회장의 사법 리스크와 각종 현안에 대한 소통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이인용, ‘무노조 경영 폐기’ 등 이끌어내
향후 이들 임원에 대한 역할론은 더욱 부각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현재 이 부회장은 사면이 아닌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한국헌법학회장)는 “사면은 최고법인 헌법 제79조에 규정된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법부에 의한 형 선고 효과 등을 소멸시키는 국가원수의 특권”이라면서 “이에 반해 가석방은 헌법이 아니라 형법에 규정된 제도다. 형을 선고한 법원과 상의할 필요 없이 법무부 장관의 행정처분에 의해 수형자를 석방할 수 있지만 형 자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부당합병 의혹 재판과 조세회피처 페이퍼 컴퍼니 의혹 등에 대한 검찰 수사가 여전히 이 부회장 앞을 가로막고 있다. 사법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은 만큼 이 부회장의 경영 행보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부회장의 측근들도 총수의 리스크를 떨쳐내야 하는 중요한 과제를 여전히 안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거론된 이 부회장의 측근 사장단은 큰 인사 이동이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 부회장과 어려운 시절을 함께 건너온 측근들이니만큼 대대적인 인사 개편에도 입지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이와 관련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아직 인사에 대해서는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다. 내부에서도 파악하기 어려운 게 임원 인사다. 심지어 사장단 인사를 올해 말에 할지 내년에 할지 모른다”고 짧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