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직전 군부의 타협안 뿌리친 수치의 오판이었나
  • 정호재 아시아 연구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2.12 14:00
  • 호수 1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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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쿠데타, 그로부터 10개월 지난 미얀마의 현실
쿠데타 직전 군부가 대통령, 수치의 NLD당이 내치 맡는 동거정부 제안 있었다는 증언 나와

“폭동 교사(敎唆), 다수의 부패 연루, 선거법 및 검역법 위반, 선거 조작 의혹, 국고 손실, 통신 및 국가비밀법 위반 등….” 2월1일 발생한 쿠데타로 미얀마 군부에 구속되고 기소당한 아웅산 수치 전 국가고문(76)의 대략적인 혐의 내용들이다. 알려진 바로는 그에게는 대략 20여 가지 혐의가 적용되었고 그 내용이 다 엄중해 적어도 ‘20년형’이 선고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왔다. 1심 재판 결과가 12월6일 공개되었고, 재판부는 수치에게 내란과 선동을 근거로 4년형을 선고했다. 자우 민툰 미얀마군 대변인은 AFP와의 인터뷰에서 “수치 여사가 코로나19 관련 규정을 위반하고 폭동을 선동한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재판 결과는 윈민 전 대통령(4년형)과 묘 아웅 국회의장(2년형)에게도 엇비슷하게 적용됐다.

군부 쿠데타 전 한 행사장에 함께한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왼쪽)과 미얀마 군부 실권자 민아웅 흘라잉ⓒEPA 연합

중국 배후설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데 조금은 놀랍게도 1심 선고 다음 날 쿠데타의 주역인 민아웅 흘라잉 군 최고사령관(65)은 수치의 형을 2년으로 감해 준다는 선심성 결정을 발표했다. 이는 이번 재판의 중심에 사법부가 아닌 계엄령하 군부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공인한 셈이 됐다. 지난 10개월간 수치 여사의 재판 과정이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것처럼, 항소의 기회가 남았다고 해도 앞으로 2년간 수치 여사는 외부세계와 고립된 채 침묵을 강요당할 것이 확실해졌다. 이미 칠십대 후반의 고령이라는 점도 그의 재기를 어렵게 하는 요소다. 따라서 이번 판결을 끝으로 미얀마 쿠데타의 1막이 12월6일부로 종료된 셈이다. 10개월을 끌어온 쿠데타가 남긴 의혹과 쟁점을 살펴본다.

2월1일 미얀마 군부의 제3차 쿠데타(1962년 1차, 1988년 2차) 직후, 전 세계에선 이번 사태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과 해결책에 대한 여러 담론과 주장이 치열하게 맞부딪쳐 왔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쿠데타가 발생했고, 왜 수치의 NLD 정부와 국제사회는 이를 사전에 막지 못했냐는 것이다. 이는 쿠데타의 본질과 해결의 실마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질문이 되기도 한다.

첫 번째 해석은 이번 사건의 배후에 ‘중국’이 있을 것이란 의혹이었다. 미얀마 군부가 중국을 믿고 도발에 나섰다는 것이 중국 배후설의 요체고, 따라서 중국이 적극적으로 중재하면 군부가 한발 물러설 수도 있겠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동시에 이를 수수방관하고 수치 정부에 안보적 후원을 게을리한 미국의 책임론도 동시에 제기됐다. 따라서 ‘미얀마 쿠데타가 미·중 갈등의 연장선인가’라는 질문도 된다. 실제 미얀마 시민들도 이러한 의혹을 줄기차게 제기하며 중국대사관 앞으로 모여들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뉴시스
수치 전 국가고문(왼쪽)이 5월24일(현지시간) 법정에 출석해 윈민 전 대통령(오른쪽) 등과 함께 자리에 앉아있다.ⓒ뉴시스

수치, 적극적인 개헌 추진으로 군부 자극

그러나 결론부터 정리하면, 지난 10개월간 확인된 건 ‘중국 배후’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중국이 인도양에 진출하고 싶은 욕망도 뚜렷하고 그동안 군부와도 끈끈한 인연을 이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은 이번 쿠데타와 어떠한 직접적인 연관성도 없고 따라서 이를 해결할 능력도 없다는 게 확인되었다. 설령 연관성이 있다고 해도 중국이 나서면 사태가 악화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시계를 2010년으로 되돌려야 한다. 미얀마의 개혁·개방은 이 무렵 본격화되는데, 여기엔 수치 여사의 정치활동 해금도 절대적 연관이 있다. 인도양에서 미얀마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재차 주목받았고, 미국이 베트남에 그랬듯 ‘경제제재 해제’란 운을 띄우자 경제난에 허덕이던 미얀마 군부도 마지못해 수치를 풀어주고 보통선거에 의한 다당제 정치 도입을 약속하게 된다.

물론 중국도 이에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미얀마에 대한 직접투자와 교역을 강화하며 중국의 큰 전략의 한 축으로 삼을 것이란 의욕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이다. 실제로 과거 20년 넘게 서방의 가혹한 경제제재를 받아온 미얀마에 중국의 존재감은 일반적 상상 그 이상이었다. 마치 중국이 북한 정권의 생명줄을 연장하듯, 미얀마에 대해서도 중국의 끊임없는 거래와 지원이 있었고, 미얀마 엘리트층 역시도 중국과의 인연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그런데 결국 중국으로선 미얀마라는 지정학적 지위와 끈끈한 인연이 중요했지, 군부냐 수치냐의 문제는 그리 결정적 문제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미국이나 러시아가 미얀마에 적극적이지도 못했다. 전통적으로 미얀마는 ‘고립주의’를 외교의 근간으로 삼아왔다. 따라서 중국을 제외하면, 가장 짙은 혐의는 미얀마 내부정치의 극심한 군부 편향성을 꼽을 수밖에 없다. 사실 수치 여사가 선거에서 압승을 기록한 2015년 말 이후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 가능성은 ‘언제라도 가능한’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1962년 이후 60년 넘게 권력을 유지해온 군부에 대부분의 국가 자원과 인재가 편중되어 있었고, 수치 휘하의 민주세력은 집권 경험 없이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백면서생이 태반이었다.

무엇보다 군부는 이미 2008년 헌법을 설계하며 수치 여사의 대통령 등극 가능성을 차단해 놓은 상황이었다. 어릴 적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인 남편과 결혼한 수치의 자녀들은 모두 영국 국적을 갖고 있었고, 이에 군부는 ‘외국 국적자 자녀를 둔 사람의 대통령 입후보 금지’ 조항을 헌법에 끼워넣었다. 미얀마는 대통령 중심제이기 때문에 대통령으로서의 행위와 그렇지 못한 것은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즉 맨 처음에 언급한 20여 개 범법행위가 대통령이 아닌 위치에서 정치를 한 수치에 대한 군부의 ‘보복’이었던 셈이다. 동시에 군부의 진짜 속내는 대통령 자리를 군부가 갖는 ‘타협안’을 수치로부터 제안받기를 기다렸다는 뜻도 된다.

집권 5년 내내 수치는 이 같은 군부에 강하게 대응한다. 우선 4개 부처 장관직을 겸직하는 슈퍼장관이자 국가고문으로 취임해 실질적인 대통령의 권한을 휘둘렀고, 동시에 적극적인 개헌 의사를 밝힘으로써 군부세력을 고립시키는 정책을 펼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치 자신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가 필요하니, 국제사회의 눈총을 감수하더라도 2019년 로힝야 난민에 대한 미얀마의 탄압을 정당화하는 무리한 선택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돌이켜보면 로힝야에 대한 수치의 배신은 지난해 선거에서의 압승을 통해 ‘헌법’ 그 자체를 바꾸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

수치의 계획대로 2020년 11월8일 치러진 선거에서 수치의 NLD는 상·하원에서 3분의 2에 육박하는 의석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미얀마 의회는 과거 한국의 유신헌법처럼 이미 선거 전에 4분의 1은 군부에 배정되어 있어, 60%가 넘는 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해선 실제 지역구 선거의 80% 이상을 석권해야 가능한 수치다. 이 같은 선거 결과는 미얀마 시민들이 여전히 군부보다는 민주세력에 희망을 걸고 있다는 뜻도 된다.

하지만 선거에서 대패한 미얀마 군부는 곧이어 “부정선거”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고, 실제로 2월1일 새 의회 개원 직전에 쿠데타를 감행해 수치와 대통령을 비롯한 대다수 국회의원을 구속하고 의회를 해산하는 초강수로 대응한다. 명쾌하게 확인되지는 않지만, 미얀마 정치권 내부의 여러 증언을 통해 쿠데타 직전 군부의 타협안 제시가 있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즉 군부가 헌법과 정부의 대표인 ‘대통령’을 맡고, 수치와 NLD가 다수당의 대표로서 내치에 집중하라는, 이른바 동거정부 구성안이었다고 한다.

수치가 이 제안을 거부한 것 또한 명확해 보이는데, 이는 1988년 정치 데뷔 이후 그의 정치적 행보를 되짚어보면 그리 납득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수치는 무려 20년간 가택연금을 당하면서도 단 한 차례도 군부의 회유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진영 일각에서도 이 같은 수치의 비폭력·비타협 노선에 대해 여러 조언과 함께 불만이 높았다. 이상적인 정치와 현실정치를 구분하라는 조언이었다. 그러나 수치는 미얀마 군부를 상대 정파라고 보기보다는 ‘용납할 수 없는 정적(政敵)’으로 상정했음이 분명하다.

수치 여사가 간과한 것은 이 외에도 적지 않다. 수치를 지지한 서방세력은 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인도양에 항공모함과 군대를 동원할 정도로 미얀마가 세계 안보에서 절대적인 중요성이 높은 곳은 아니라는 점이다. 반면 미얀마 군부는 60년이 넘는 집권 경험을 통해 40만 명의 군대와 최신식 무기라는 현실적 힘을 갖고 있었다. 결국 미얀마의 비극이란, 오랜 식민지 경험을 한 미얀마 독립세력이 외세를 모조리 몰아내려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꿈을 꾸었고, 실제로 외세가 모두 물러가자 군부세력이 그 빈틈을 치고 들어와 장기독재에 들어갔다는 데 있다. 아무리 식민지배를 받았다고 해도 외국과 관계를 끊는 고립주의만으로는 인간다운 삶이 어렵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AFP 연합
미얀마 군부가 12월5일 양곤에서 시위 진압에 나서자 시위대가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AFP 연합

“현 군부 지배체제 변화 가능성 극히 작아”

11월26일 동아대 아세안연구소는 미얀마 학술대회를 가졌는데, 국내외 여러 학자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1) 쿠데타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다양하고 꾸준한 시위가 있었고 1300명 이상의 시민이 군경의 총검과 폭력으로 사망했으며, 2) 수치 여사를 포함한 지난 정권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진행됐고, 3) 군부에 저항하는 정치인과 지식인이 소수민족과 연대해 미얀마민족통합정부(NUG)와 시민군을 조직해 저항하고 있다는 현실과 국제사회의 여러 대응이 소개되었다.

망명정부나 시민군의 활약에 대한 관측보다는 현재 군부가 장악한 정치 현실이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싱가포르국립대 아웅뜨윈 교수는 “미국과 한국에서 망명정부가 주도하는 미얀마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관심이 높은 건 알고 있지만, 속성이 다른 관계자들이 멀리 타국에서 조직한 망명정부가 현실적 벽을 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동아대 박장식 교수 역시 “적어도 5년 가까이는 군부가 지배하는 현 정치체제가 변화할 가능성이 지극히 작은 게 현실”이라고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정호재 아시아 연구자는 누구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다 최근 싱가포르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며 동남아 전문 필자로 글을 쓰고 있다. 번역서로는 《탁신-아시아에서의 정치 비즈니스》 《수상이 된 외과의사-마하티르 자서전》이 있으며, 《아시아 시대는 케이팝처럼 온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최근 신작 《다시, K-를 보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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