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영광’ 내세우며 글로벌 리더 야심 키우는 마크롱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1.11 11:00
  • 호수 1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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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 미국 발 빼는 중동 지역 적극 공략…대미 독자노선 분명히 하며 ‘유럽 대통령’ 꿈꿔

2022년 가장 주목받을 글로벌 지도자는 단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다. 2017년 프랑스의 좌우 정치를 혁파하고 탈이념 실용주의를 앞세워 등장한 마크롱은 올해 재선에 도전한다. 거기에 더해 지난해 12월, 16년 집권을 마감하고 물러난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뒤를 이어 유럽연합(EU)의 실질적인 리더로 나설 것으로 기대된다. 마침 올해 1~6월 프랑스는 유럽연합(EU) 의장국이다.

1977년 12월생으로 30대의 나이(39세)에 대통령이 된 마크롱은 지난 5년간 재임하며 이제 노회한 정치인으로 진화했다. 눈에 띄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친미도 반미도 아닌 독자노선인 ‘프랑스의 길’을 걸으며 중동에서 실리를 단단히 챙기고 있다는 점이다.

ⓒAP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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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 라팔 전투기, 중동에서 초강세

그 대표적인 것이 이집트·UAE·카타르 등에 대한 라팔 전투기와 헬기 등 고가 무기 판매다. 배경에는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의 ‘인권외교’가 자리 잡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해 8월 인권과 예멘 내전 개입 등을 이유로 사우디아라비아에 미사일을 비롯한 공격 무기 수출을 금지했다. 그해 2월에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에 관련된 사우디아라비아인 17인을 제재했다.

미국은 다만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수니파 연합군을 형성해 예멘 내전에 함께 개입했던 UAE는 무기 금수 대상에서 제외해 최신 F-35 전투기를 살 수 있도록 했다. UAE가 사우디와의 불화로 2019년 예멘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철수시킨 것이 이유로 꼽힌다. UAE가 2020년 9월 미국의 중재를 통한 아브라함 협정으로 이스라엘과 수교할 당시 미국이 첨단무기 공급을 약속한 데 따른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하지만 미국과의 전투기 구입 협상은 삐걱거리고 있다.

미국의 금수 조치로 사우디아라비아는 당장 어려움을 겪게 됐다. UAE도 미국산 무기 확보에서 언제 어떤 문제를 겪을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대통령궁은 지난해 12월3일 “프랑스는 UAE와 라팔 전투기 80대와 수송용 헬리콥터 카라칼 12대 등을 판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프랑스 다소사가 개발·생산하는 라팔 전투기를 한꺼번에 80대씩 판매한 것은 2004년 이 기종이 군용기 시장에 나온 이래 최대 규모다. UAE에 판매한 라팔은 성능개량 모델 F4로 2024년까지 개발을 마치고 2027년 인도될 예정이다.

주목할 점은 마크롱이 이에 맞춰 지난해 12월3~4일 UAE와 카타르에 이어 사우디아라비아를 연속 방문했다는 사실이다. 서방 지도자의 사우디 방문은 2018년 카슈끄지가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살해된 이후 처음이다. 게다가 마크롱은 미국 등 서방이 카슈끄지 살해의 배후로 지목해온 사우디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을 제다에서 만나 회담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래 불만이 폭발 직전이다. 중동의 대표적인 친미·친서방 국가였던 사우디는 걸프전과 이라크전에 협력했으며 자국 영토를 미군기지로 제공했다. 이는 사우디 국적의 오사마 빈라덴이 서방을 상대로 테러에 나선 이유 중 하나였다.

사우디 왕가는 도널드 트럼프가 2017년 5월 대통령 취임 뒤 첫 해외 순방길에 자국을 찾자 블랙호크 헬기 150대를 비롯해 1100억 달러(약 137조원)의 미국산 무기와 군사장비를 구매해 체면을 세워줬다. 그런데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가 새삼스럽게 예멘 내전 개입을 비난하며 무기 수출을 금지하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바이든 행정부가 이슬람 시아파의 종가인 이란에 유화적인 외교정책을 들고나오자, 수니파 종주국이자 이란의 숙적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안보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미국 민주당의 버락 오마바 행정부는 2015년 5월 러시아·중국·프랑스·영국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독일·EU와 함께 이란과 협상을 벌여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에 합의했다. 이란이 핵 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면 미국과 EU가 대이란 경제제재를 해제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 때인 2018년 미국은 단독으로 이 협정에서 이탈했다. 하지만 JCPOA 합의 당시 부통령이던 바이든은 복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중동의 세력 균형추가 이란에 유리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엔 불리한 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마크롱은 이런 중동 지역의 불만과 틈새를 전략적으로 파고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UAE로 직접 날아가 미국이 떠나가는 중동에서 프랑스가 든든한 배경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라팔은 중동에서 초강세다. 카타르가 2017년 첫 계약 이후 지금까지 36대를 확보했으며, 중동의 군사 강국 이집트는 2017년 이후 24대를 보유한 데 이어 지난해 11월15일 45억 달러에 30대의 라펠 개량형 F3B를 추가로 확보했다.

2021년 10월30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자리를 함께한 존슨 영국 총리,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메르켈 독일 총리,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부터)ⓒAP 연합

숄츠 獨 총리, 취임하자마자 마크롱 만나

이처럼 마크롱은 중동에서 군사·에너지 분야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으로 관측된다. 과거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강대국으로 군림했던 ‘프랑스의 영광’을 21세기에 새롭게 복구하려는 시도다. 미국이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뒤 중국 압박에 집중한다는 전략적 이유로 탈(脫)중동을 시도하면서 중동에서 발을 빼자 마크롱이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파고든 셈이다.

미국에 대한 프랑스의 견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해 12월9일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베이징올림픽 외교적 보이콧에 대해 “의미 없는 일”이라며 동참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미 독자노선이다.

마크롱은 유럽에서 리더 입지를 굳히고 있다. 그는 2017년 5월14일 대통령 취임식 날에 전용기를 타고 독일 베를린에 가서 메르켈 당시 총리를 만났다. EU의 리더십은 독일과 프랑스의 협력과 융합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숄츠 신임 독일 총리는 지난해 12월8일 취임한 지 이틀 뒤 첫 방문지로 프랑스를 골랐다. 숄츠 총리는 파리의 엘리제궁에서 마크롱을 만나 EU의 미래, 러시아와 유럽·우크라이나와의 긴장 관계, 미·중 갈등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뒤 비로소 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로 향했다. 독일과 프랑스의 신임 정부 수반이 2017년과 2021년 상호 최우선 방문의 데자뷔를 연출했다. 이처럼 메르켈 퇴임 뒤 마크롱의 리더십은 EU와 중동에서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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