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신사임당’ 실종 사태…“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2.05.04 10:00
  • 호수 1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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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원권 환수율 10~20%대 추락에 계속 ‘코로나 탓’만 하는 한국은행
현장에선 “세금 정책 불신·지하경제 팽창 문제 심각” 지적 터져 나와

신사임당이 실종됐다. 5만원짜리 지폐 환수율(발행액 대비 환수액 비율)이 3년 넘게 급락세를 보이면서 궁금증과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통화정책을 책임지는 한국은행은 5만원권 실종을 코로나19 사태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시사저널이 한은으로부터 입수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직 고위 당국자, 은행 VIP 자산관리 담당자, 강남 부동산 중개업자 등에게 문의한 결과는 다른 요인을 지목하고 있었다. 

시사저널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양경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의 협조를 얻어 한은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3월까지 5만원권 환수율은 27.4%로 집계됐다. 5만원권 10장이 발행되면 3장도 회수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1만원권, 5000원권, 1000원권 등 다른 권종과 달리 유독 5만원권만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가운데 시중은행들은 고객 응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부 자동입출금기(ATM)에 ‘5만원권 인출이 어렵다’는 안내문이 붙거나 창구에서 5만원권을 찾으려는 고객에게 1만원권 지폐를 대신 내주기도 한다. 

2019년 들어 자취 감추고 있는 5만원권 

한은 측은 5만원권 환수율이 낮은 이유에 대해 “코로나19 확산, 저금리 기조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면서도 코로나19 영향이 가장 크다는 취지로 부연했다. 한은은 “코로나19 사태로 경제 불확실성이 증대해 국민의 현금 보유 성향이 강해졌다. 자연스레 보관이 용이한 5만원권으로 수요가 집중됐다”며 “대면 상거래 부진에 자영업자 등을 통한 화폐 환수 경로가 크게 약화된 영향도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증가세였던 5만원권 환수율이 코로나19 확산(2020년) 이후 떨어졌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나 한은의 설명과 달리 5만원권 환수율은 코로나19 확산 전인 2019년부터 급감하기 시작했다. 2015년 40.1%에서 2016년 49.9%, 2017년 57.8%, 2018년 67.4%로 꾸준히 상승하다가 2019년에 7.3%포인트 떨어진 60.1%를 기록했다. 2020년엔 35.9%포인트 곤두박질쳐 단 1년 만에 60%대에서 20%대(24.2%)가 됐다. 계속되는 하락세에 2021년 17.4%까지 밀렸는데, 이는 5만원권을 처음 발행한 2009년(7.3%)을 빼고 역대 최저였다. 

지역별로 따지면 문제가 더 선명히 드러난다. 제주(2018년 178.2%→2019년 267.6%)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2019년 5만원권 환수율이 2018년 대비 떨어졌다. 해당 기간 서울·경기·인천·강원 지역은 99.6%에서 85.7%로 하락하며 최대 낙폭(13.9%포인트)을 기록했다. 이어 2020년 32.2%, 2021년 22.9%로 내려갔다. 지난해 5만원권 환수율이 제일 낮았던 대구·경북·포항의 경우 2018년 32.4%에서 2019년 28.9%, 2020년 9.0%, 2021년 3.2%로 조사됐다. 

대외적으로 밝힐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아 익명을 요구한 전직 금융 당국 고위 관료는 “2019년 이후 5만원권이 장롱 속으로 숨어든 배경엔 정부의 세금정책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2020년 21대 총선을 전후해 가진 자들에 대해 많은 세금 부담을 지우겠다는 기조를 명확히 했다. 특히 현행 상속·증여세제는 중산·중상층에게 상대적으로 큰 데미지를 안겼다”면서 “알게 모르게 학습효과를 경험하게 된 중산·중상층이 ‘눈에 보이는’(금융 당국이 쉽게 추적할 수 있는) 형태로 자산을 운용하다간 정부에 (세금으로) 뺏긴다는 피해의식에 5만원권을 쥐고 있게 됐다”고 분석했다. 

전임 박근혜 정부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그는 지적했다. 그는 “박근혜 정부 시절 부동산을 띄우기 위해 금리를 너무 급속히 내렸다. 이 저금리 기조가 문재인 정부로 이어진 와중에 성급하고 무리한 세금정책까지 더해지니 5만원권 실종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했다. 

중산·중상층이 보유한 5만원권은 각자의 장롱 속에만 있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한 시중은행의 VIP 자산관리 담당자는 “코로나19 사태 발생 전부터 5만원권을 대여금고에 보관해 두려는 VIP 고객이 많았다”고 전했다. 대여금고는 은행 고객이 화폐, 귀금속 등 귀중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은행으로부터 빌려 쓰는 소형 금고다. 보통 1억원 이상의 예금을 예치한 VIP 고객이 대여금고를 이용한다. 보관물에 대한 법원의 제출 명령이나 압수수색영장이 있을 경우에만 고객 동의 없이 대여금고를 열어볼 수 있다. 그는 “주변 사례에 비춰볼 때 세금 부담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부동산 등 가능한 모든 거래에서 현금이 통용되는 경향이 부쩍 짙어진 것 같다”며 “1000만원 이상의 금융거래 정보는 금융정보분석원 감시망에 들어가다 보니 VIP 고객들이 기회 닿을 때마다 조금씩 5만원권을 인출해 대여금고에 보관하다가 ‘현금 박치기’가 필요하면 꺼내 쓰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일반 국민이 단순히 예비용으로 5만원권을 보유하려는 욕구가 커졌다’거나, ‘영업 타격을 입은 자영업자들이 현금 입금을 덜하게 됐다’는 한은 측의 설명만으론 5만원권 환수율 감소 문제를 아우르기 힘들다고 이 담당자는 지적했다. 그는 “코로나19 영향도 없지 않겠으나, 현장에서 볼 땐 누구보다 현금 보유 욕구가 강하고 실제로 현금 거래 빈도나 규모도 높은 자산가들이 전체적인 5만원권 환수율 감소 현상을 이끄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서울특별시 38세금징수과 직원이 2021년 3월 서초구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자택에서 압수한 현금과 미술품을 시청 브리핑룸에서 공개하고 있다.ⓒ연합뉴스

“중상층에 가혹한 세금, 현금 선호 부추겨” 

강남 부동산 시장에서도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봤다. 한 공인중개사는 얼마 전 20억원대 아파트를 시세보다 2억원 낮춰 매도하는 대신 대금 중 4억원은 현금으로 지불하는 거래를 성사시켰다고 털어놨다. 매수인은 집에 있던 2억원에 지인에게서 빌린 2억원을 더해 4억원을 마련했다. 중개사는 “잔금일에 매수인이 100장씩 묶인 5만원권을 쇼핑백에 한가득 담아 왔다”면서 “지폐계수기로 5만원권 총 8000장을 세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했다. 그는 “요즘 거래를 많이 따내는 강남 부동산엔 웬만하면 지폐계수기가 다 있다”고 덧붙였다. 

강남 아파트에 거주하는 현정애씨(52·가명)는 “최근 집 인테리어 공사를 했는데, 인테리어업자가 세금계산서 없이 현금 거래를 하는 조건으로 할인해 주겠다고 해 9000만원가량을 5만원권으로 지불했다”며 “당장 현금이 없어 조달하느라 동분서주했다. 미리 마련해 두지 못한 게 후회되더라”고 말했다. 

이들이 당국에 적발될 수 있는 리스크를 감수하고도 5만원권을 매개로 한 ‘지하경제’를 선호하는 데 대해 전직 금융 당국 고위 관료는 “이들을 비난만 할 게 아니다. 정책이 야기한 풍선효과를 다시 정책으로 풀 여지가 없는지 들여다봐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본주의하에서의 경제정책은 기본적으로 경제 주체들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전제한 채 최적의 방향을 고심한 다음 추진돼야 한다. 지금의 세금 제도, 부동산 정책 등을 보면 정책 결정자들이 자신은 이기적으로 행동하면서 일반인들에겐 이타적인 결정을 하길 강요하는 듯하다”며 “이기적인 경제 주체들이 현금을 모아뒀다가 지하경제를 더욱 활성화시키는 걸 조장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향후 금리가 계속 오른다면 이론적으로 5만원권이 다시 은행으로 돌아와야 하지만, 중산·중상층이 현금을 쥐고 있게 만드는 현 상황이 지속되는 한 힘들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한은 “지하경제와의 상관관계 식별 어렵다”  

한은은 5만원권 환수율 전망에 대해 “금리 상승 기조와 거리 두기 해제 등 경제활동 제한 완화로 점차 회복세를 나타낼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5만원권 환수율 하락과 지하경제의 연관성에 대해선 “상관관계를 직접적으로 식별하기는 어렵다”고 일축했다. 파악 또는 참고하고 있는 지하경제 관련 데이터가 있느냐고 묻자 “화폐는 고유의 익명성 등으로 지하경제에서 사용될 수 있으나 지하경제를 일률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데다 추정 방법에 따라 규모의 편차가 클 수 있는 점 등으로 지하경제와 관련한 통계를 생산하지 않고 있다”고 동문서답식 답변을 내놨다. 2020년 11월에도 한은은 보도참고자료를 통해 “5만원권 환수율이 단기간에 크게 하락한 것은 지하경제 유입 등의 구조적 문제라기보다 코로나19에 따른 경제적 충격이 크게 작용한 데 주로 기인한다”고 했다. 

한편 2009년부터 올해 3월까지 발행된 5만원권 총 268조3000억원 중 환수액은 44.5%인 119조3000억원에 불과하다.   

 

■ 한국 지하경제 규모, 2015년 기준 125조~310조원 추정 

지하경제는 과세 대상임에도 정부의 규제를 피해 이뤄지는 경제활동을 말한다. 정상 거래에서 발생하는 탈세와 마약·매춘·도박 등 위법행위를 포괄한다. 한은 측 설명처럼 지하경제 규모는 딱 떨어지게 산출하기 힘든 게 사실이지만, 다양한 연구기관의 추정치를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2018년 발간한 ‘세계 지하경제: 지난 20년 동안의 시사점’ 조사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 지하경제 규모는 1991년 약 70조원에서 2015년 약 310조원으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 한국 국내총생산(GDP)은 239조원에서 1564조원으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GDP 대비 지하경제 규모의 경우 1991년 29.13%에서 2015년 19.83%로 9.30%포인트 줄어든 것으로 파악됐다. 

이번 연구는 IMF와 프리드리히 슈나이더 오스트리아 린츠대학 교수가 공동으로 진행했다. 158개국 지하경제 규모를 ‘다중 지표 다중 요인’ 기법으로 산출했다. 마약 거래 등 불법 생산을 포함한 경제활동은 측정하지 않았다. 전 세계 평균 GDP 대비 지하경제 규모는 1991년 34.51%에서 2015년 27.78%로 6.73%포인트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2017년에 한국 지하경제를 IMF 조사 결과보다 훨씬 적은 규모라고 발표했다. 현금 통화 수요 함수를 적용해 2015년 기준 지하경제 규모가 124조7000억원으로 GDP 대비 8.0% 수준이라고 측정했다. 조세연 연구진은 “모형과 변수 적용에 따라 지하경제 규모가 극단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에 지하경제 규모를 정확히 측정할 순 없다”고 단서를 달았다. 

노동 규제나 환경 규제와 같은 정부 규제 등 요인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조세 회피를 목적으로 빚어진 지하경제 규모는 2011년 기준 47조~58조원으로 GDP 대비 3.4~4.3%로 추정됐다. 

앞서 김종희 전북대 경제학부 교수는 2016년 재정정책논집에 실린 ‘조세의 회피 유인이 경제성장과 조세의 누진성, 지속 가능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 보고서에서 2014년 기준 한국 지하경제 규모는 161조원, 조세회피 규모는 55조원으로 봤다. 1995년부터 2014년까지의 20년 평균 GDP 대비 지하경제 규모는 10.89%로, 미국·일본·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캐나다 등 선진 주요 7개국(G7) 평균(6.65%), G7을 제외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8개 국가 평균(8.06%)을 크게 웃돈다. 지하경제 규모가 클수록 조세 회피도 늘어나 한국의 GDP 대비 조세 회피 규모는 3.72%에 달했다. G7(2.21%)이나 나머지 18개국(3.06%) 평균보다 높다. 김 교수는 “지하경제는 탈세를 유발해 재정 적자를 야기하고 세수를 보전하기 위한 세율 인상을 통해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주체들의 부담을 가중시킨다”고 지적했다. 

같은 해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규모가 GDP 대비 30% 내외에 이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엄청난 지하경제 규모로 인해 국내에서 테러 자금 조달이 발생할 잠재적 위험도 있다고 평가했다. 5만원권과 지하경제의 상관관계를 두고는 “우리나라의 현금 거래 비중은 다른 국가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거래와 보관이 수월한 5만원권의 경우 은닉 등 불법 자금 수단으로 이용될 여지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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