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소환하라’ 인터넷 커뮤니티 전쟁의 새로운 양상 [임명묵의 MZ학 개론]
  • 임명묵 작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0.15 14:05
  • 호수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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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물관리위의 ‘블루 아카이브’ 심의 둘러싸고 젠더 갈등 격화
집단행동 효과 극대화 위해 국가 기구 소환하는 경향 심해져

대한민국의 인터넷 세계는 어디선가 항상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혼돈의 세계다. 물론 이는 세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2010년대 이후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들의 압도적 영향력이 줄어들고, 사람들이 각자의 관심사와 흥미에 맞는 소형 커뮤니티들을 찾아 흩어지면서 한국에서 커뮤니티 전쟁은 유독 격렬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 파편화 정도가 너무나 심해져 이제는 한 사람이 인터넷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쟁과 갈등을 추적하고 파악하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발발한 갈등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확산되고 심화되어 종국적으로 거대한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넥슨이 서비스하는 모바일 게임 ‘블루 아카이브’를 둘러싸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전쟁이 전형적인 사례라 하겠다.

ⓒ블루 아카이브 제공
블루 아카이브의 삼성역 K-POP 스퀘어 옥외광고 영상ⓒ블루 아카이브 제공

‘여초 사이트’ 문제 제기에 남성 유저들 반격

발단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게임물관리위원회에서 해당 게임의 연령 등급을 재조정하라며 내린 권고였다. 블루 아카이브는 최근 한국에서도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 서브컬처풍 ‘미소녀’들이 주로 나오는 게임인데, 여기서 설정상 미성년 캐릭터들을 선정적으로 묘사한 삽화들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등급 조정 권고가 내려질 경우, 게임의 콘텐츠가 변경되거나 청소년 이용 불가로 등급이 조정되어 게임에 타격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이용자들은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난해 겨울에 출시되어 이미 1년 가까이 서비스하고 있던 게임이 왜 갑자기 등급 조정 권고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속 시원한 답이 나올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역시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의 ‘기본 문법’ 수준으로 자리 잡은 젠더 갈등이었다.

올해 8월경 여초 사이트 ‘해연갤’에서는 주로 남성 유저들이 이용하는 게임에 대한 등급 조정을 요구하는 집단적인 민원 운동이 있었다. 대상 게임은 블루 아카이브뿐 아니라 ‘Fate/Grand Order’ ‘명일방주’ 등 복수의 게임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민원에 답할 의무가 있는 공공기관의 특성상 심의가 다시 진행되었고, 그 결과 등급을 다시 조정하라는 권고가 떨어진 것이다. 뒤늦게 해연갤의 집단민원을 파악한 블루 아카이브 유저 커뮤니티 및 여타 남초 성향의 게임 커뮤니티들은 게임위에 반격 목적의 집단민원 운동을 시작했고, 해연갤에 대한 여러 공격에 나섰다.

이 사건에서는 한국의 온라인 커뮤니티 전쟁의 전형적인 문법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주류 매체가 주목하지 않는 서브컬처나 문화 콘텐츠를 소재로 갈등이 벌어진다. 문화 콘텐츠가 무수히 쏟아져 나오고, 소비자들의 접근성과 이동성에도 제약이 사라진 지금, 콘텐츠 공급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소비자의 집단행동 압력에 취약해진 상황이다. 집단행동을 통해 논란을 만들어 운영을 어렵게 하고, 최악의 경우 소비자들이 다른 콘텐츠로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집단행동을 조직하고 그 효과를 최대화하는 데 익숙해진 소비자들은 특정 계기만 주어지면 능수능란하게 집단행동을 개시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둘째, 갈등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상당수는 이제 남초 커뮤니티와 여초 커뮤니티 간 갈등, 즉 젠더 갈등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성적 표현의 자유’다. 남성 소비자들은 주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반면, 여성 소비자들은 윤리적 문제가 있을 경우 표현에 적극적인 제약을 가할 수도 있다고 보는 편이다. 개별 콘텐츠마다 성적 표현을 어디까지 허용할지의 문제는 마치 연속적인 고지전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싸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 보이는 세 번째 특징은 바로 ‘국가 기구를 향한 호소’다. 원래 콘텐츠를 둘러싼 소비자 집단행동은 주로 콘텐츠를 공급하는 업체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2016년 넥슨에서 서비스하는 게임 ‘클로저스’의 한 성우가 급진 페미니즘 성향의 사이트 ‘메갈리아’를 지지하는 트윗을 올렸다는 이유로 소비자들이 집단 보이콧을 선언하고, 그 여파로 넥슨에서 성우를 교체했을 때도, 논란의 초점은 공급자인 넥슨의 대응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갈등이 격화되고 집단행동의 전략이 계속 진화함에 따라 이제는 콘텐츠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국가 기구를 소환하는 경향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특히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운영했던 ‘청와대 국민청원’은 비록 강제력 있는 조치를 끌어낼 수는 없을지라도, 청원자 20만 명을 모으는 동원력을 과시하고, 해당 문제에 관심이 없는 대중의 관심을 모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온라인 집단행동의 핵심 전장으로 부상했었다. 2019년에는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투표 조작 논란이 촉발돼 역시 집단적인 수사 요청이 있었으며, 하태경 의원이 이 의견을 수용해 검찰 수사를 촉구한 끝에 투표 조작이 밝혀진 일도 있었다. 지난해에는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쓴 팬픽션(알페스)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고, 이 사건 역시 성적인 알페스에 대한 처벌까지 가능하게 한 법안 발의로 이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블루 아카이브 및 기타 게임을 둘러싼 지금의 논란도 게임위라는 국가 기구에 호소해 원하는 바를 이루겠다는 점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 등장한 추세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규제권 확대, 자유로운 창작과 혁신 방해

물론 이런 갈등을 인터넷 변방에서 자주 일어나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 정도로 치부하고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콘텐츠를 둘러싼 젠더 갈등과 그 해법으로서 국가권력’이라는 최근의 갈등 문법은 갈수록 사회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기고 있다. 지금까지의 사태 전개를 넓게 본다면 금세 이해할 수 있겠지만, 현재의 온라인 집단행동은 집단행동에 참여하는 데서 오는 소속감과 갈등에서 승리했을 때 오는 만족감을 위해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국가의 규제권에 호소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정말로 해당 콘텐츠에 대한 규제가 마땅히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이 적으로 간주하는 이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기분 나쁘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이 국가 기구의 개입인 것이 진짜 이유다. 그런데 국가 기구가 커뮤니티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제기된 집단민원을 받아들여 계속 규제권을 행사하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 제지하지 않는 이상 규제권이 적용되는 대상은 늘어나고 기준도 무분별하게 확대되는 양의 되먹임 고리가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공급자들은 소비자들의 집단행동과 그에 따른 규제의 개입을 항상 생각하면서 콘텐츠를 만들 수밖에 없고, 이는 자유로운 창작과 혁신을 방해할 따름이다. 곪아버린 커뮤니티 전쟁까지 막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국가의 규제권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쓰는 지금의 흐름을 끊어야 한다는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임명묵 작가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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