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을 뛰어넘는 따뜻한 한 그릇 《수프와 이데올로기》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0.29 15:05
  • 호수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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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희 감독이 만든 진정한 가족 이야기

언뜻 들으면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아리송한 제목이다. 따끈한 한 끼가 되는 수프와, 개인 혹은 사회 집단이 규정하는 이념을 나란하게 묶은 데는 어떤 연관성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 다큐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제목은 없을 것이다. 집에 처음으로 인사 오는 일본인 예비 사위를 위해 백숙을 끓이는 어머니의 모습은, 딸 양영희 감독이 든 카메라의 시선을 경유하며 근현대사의 모진 굴곡을 온몸으로 통과해온 생존자이자 가족사의 증거로 확장돼 간다. 이 다큐의 과정을 함께하는 것은 단순히 개별 가족의 특수성을 목격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근현대사의 원체험과도 같다.

ⓒ(주)엣나인필름 제공

어머니의 시선을 경유한 가족의 역사

역사가 할퀴고 이념이 만든 운명을 감내하며 살아온 사람들. 양영희 감독의 가족사를 한없이 압축하면 이 같은 한 문장만이 남을지 모른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양 감독의 이전 작업들로부터 이어지는 ‘가족사 삼부작’의 가장 나중 작업이다. 양 감독은 ‘조선인 부락’이라 불리던 오사카 이카이노(현 이쿠노구) 출신 재일한국인 2세다. 그의 부모는 조총련의 열혈 활동가였다. 세 오빠는 1959년 말부터 1984년까지 이어졌던 ‘재일조선인 귀국사업(북송사업)’의 일환으로 북한에 가야 했다. 강제성이 있는 동원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족의 선택이었다.

양 감독이 카메라를 든 이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족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세 편의 다큐멘터리와 한 편의 극영화를 완성해 가는 25년간의 세월이 이어졌다. 첫 작업인 《디어 평양》(2006)은 ‘한 달에 한 번만 아버지와 밥을 먹어달라’는 어머니의 부탁에 아버지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 감독이 10년에 걸쳐 비로소 그를 이해하는 과정이 담겼다. 이 다큐가 공개된 이후 조총련은 북한을 부정적으로 다뤘다는 이유로 감독에게 사과문을 강요했고, 그가 이를 거부하자 북한 입국을 금지했다.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한 장면ⓒ(주)엣나인필름 제공

역사의 변화가 시작되는 지점

하지만 양 감독의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굿바이, 평양》(2011)은 북한으로 이주한 오빠의 딸, 즉 감독의 조카인 선화의 모습을 경유해 북한 사회를 말한다. 1995년부터 2008년까지 13년간의 기록을 통해 관객은 북에서 자란 이민 가족 내부의 새로운 세대의 성장 과정을 목격할 수 있었다. 《가족의 나라》(2013)는 다큐가 아닌 극영화지만, 병을 고치기 위해 북한에서 일본으로 잠시 온 남자와 가족 이야기라는 줄기는 어디까지나 감독의 사연으로부터 뻗어나간 것이다.

이 작품들을 통해 목격할 수 있는 건, 그의 가족이 지닌 결코 간단하지 않은 역사적 정체성이다. 그건 조총련 재일동포의 삶 중에서도 우리가 외면해 왔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넘어간 아버지는 해방 이후 분단된 고국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받았다. 아들들을 북한으로 보낸 것은 남한보다 살기 좋은 곳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나간 역사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일은 쉽지만, 첨예한 이념의 대립 안에서 강요당한 개인의 선택은 옳고 그름의 평가 대상일 수 없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양 감독의 작품에서 늘 존재했지만 중심에 놓이지 못했던 어머니의 존재를 주목한다. 지금까지가 가족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여정이었다면, 이번 다큐는 어머니의 시선을 오롯이 경유한 그의 역사다. 감독의 어머니는 평생을 뼈가 빠지게 돈을 벌어 자식들을 위한 물자들을 북한에 보냈다. 이 다큐에 이르러 양 감독은 그렇게 아버지를 따라 조총련 활동에 전력을 다했던 어머니의 선택이 이념에 도취됐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2018년, 어머니가 평생을 덮어두었던 기억의 뚜껑을 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오사카에 가기 전인 1948년 4월, 양 감독의 어머니 강정희씨는 제주 4·3의 참상을 목격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첫 장면은 병상에 누워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는 강씨의 모습으로 문을 연다. 그는 무고한 사람들이 군인들이 쏜 총에, 찔러대는 총검에, 내리치는 개머리판에 힘없이 죽어가야 했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죽음의 참상을 목격한 어머니의 선택은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에겐 식민지배를 했던 나라보다, 이해할 수 없는 이념을 뒤집어씌워 국민을 살해하는 고국이 더욱 두려운 대상이었다.

다큐에는 2018년 양영희 감독이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를 찾는 모습도 등장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제주4·3 사건을 공식 사과하고 조선 국적자 입국 허가를 내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열여덟 살에 떠나 70년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은 양 감독의 어머니는 말이 없다. 이전에 활동가들을 만나 4·3 내용을 증언한 후 알츠하이머 증세가 급속하게 진행된다. 과거의 고통 때문인지, 귀향을 실감할 수 없기 때문인지 모를 어머니 대신 양 감독은 땅에서 스러진 수많은 죽음을 떠올리며 오열한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과거를 되짚는 작업에서 나아가 미래를 감지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일본인은 절대 안 된다”고 했던 부모의 신신당부와는 달리 양영희 감독은 느지막한 나이에 일본인 남편을 만난다. 서로의 이념이 달라도, 배경과 역사가 달라도 함께 요리하고 따뜻하게 끓인 백숙을 나눠 먹는 이들의 모습은 새로운 여정의 시작점처럼 보인다. ‘수프’는 정치와 이념보다 필요한 온기 어린 그 무엇을 생각하게 한다.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고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영화는 역사의 변화가 거기서부터 시작이라고 말한다.

카메라 대신 펜을 들고

10월25일 출간된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는 양영희 감독이 직접 쓴 산문을 엮은 책이다. 앞서 펴낸 두 편의 자전소설 《가족의 나라》와 《조선대학교 이야기》는 일본에서 먼저 출간된 바 있다. ‘가족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의 특별한 삶’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번 책은 ‘가족사 삼부작’을 찍으며 그가 영상으로 채 온전하게 기록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적은 글들로 빼곡하다.

그는 이 책에서 “가족을 향해 카메라를 든 이유도, 도망치기보다 그들을 제대로 마주 본 다음에 해방되고 싶어서였다”고 고백한다. ‘영화 하나 만들었다고 무엇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손목·발목에 주렁주렁 차고 있는 그것들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내야 했다’는 것이다. 책을 먼저 읽은 영화감독 박찬욱은 다음과 같은 추천사를 남겼다. “양영희는 (제 가족을) 계속 우려먹고 우리는 계속 곱씹어야 합니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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