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의 ‘출구전략 찾기’ 다급해진 푸틴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1.05 10:05
  • 호수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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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체면 세워 달라’ 호소하는 듯한 발언 이어져…美 중간선거 후 바이든과 정전 협상 벌일 가능성 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자신이 벌인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황이 갈수록 불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국 영토라고 선언했던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은 교착상태이고, 서남부 헤르손에선 철수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핵심적인 문제는 땅에 있지 않다. 문제는 물자다. 우크라이나 전황을 매일 전하는 미국의 전쟁학연구소(ISW)는 11월1일 이란이 러시아에 더 많은 전투용 드론과 신형 탄도미사일을 공급해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사용하게 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전했다. 개전 이후 계속된 서방의 경제제재로 러시아의 군수업체가 무기체계 제조와 수리·정비에 필수적인 반도체와 소재·부품·장비 등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 공급이 원활하지 못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러시아가 재고 무기와 탄약이 소진되는데도 이를 제대로 보충하지 못한다는 증거는 쌓이고 있다. 러시아는 10월9일 본토와 크림반도를 잇는 크림대교가 폭파되자 탄도미사일에 이어 군사용 드론을 동원해 우크라이나의 도시 등 민간인 지역을 무차별 공격했다. 탄도미사일은 정확한 목표물을 전술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정밀 유도되는 게 특징인데, 이번에 발사한 것들은 정밀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이는 정밀무기의 재고가 부족하든지, 정밀성을 확보해줄 반도체 등 부품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폭 공격에 동원한 드론은 자국산이 아니라 이란제 샤헤드-129로 알려졌다.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러시아는 이란으로부터 장거리 공격용 드론인 모하제르-6은 물론, 사거리 300km의 마테110이나 사거리 700km의 졸파가르 등 탄도미사일도 들여올 전망이다. 러시아가 전쟁 수행에 핵심적인 군수 조달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증거다.

11월2일엔 러시아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뉴스가 전해졌다. 미국 CNN은 이날 북한이 중동과 북아프리카 국가로 선적한 것처럼 위장해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쓸 포탄의 상당량을 비밀리에 보내왔다고 기밀 해제 문서를 인용해 보도했다. 미국 백악관은 이를 확인하고 유엔에서 북한의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다.

ⓒEPA 연합·TASS·pixabay·디자인 양선영

러 군수업체의 공급능력 부족 여실히 드러나

어쩌다 러시아가 이런 상황이 됐을까. 사실 러시아 군수산업은 상당 기간 푸틴과 이너서클의 든든한 ‘금고’ 역할을 해왔다. 러시아 군수산업은 2007년 푸틴이 서명한 통합법에 따라 로스텍(Rostec)이라는 단일 슈퍼기업으로 통합됐기 때문이다. 로스텍은 14개 지주회사를 통해 700개가 넘는 군수업체를 통합 관리한다.

그런데 이 로스텍의 CEO는 2007년 통합 발족 직후부터 세르게이 체메조프라는 인물이 줄곧 맡아왔다. 체메조프는 동갑인 푸틴과 함께 소련 시절 국가보안위원회(KGB)에 들어가 동독에서 같이 근무한 절친이자 동료다. 이른바 ‘실로비키’의 핵심이자 푸틴의 심복이다. 실로비키는 ‘제복을 입은 사람’이란 뜻으로 푸틴이 좋아하는 KGB 같은 정보기관이나 군 출신 이너서클을 가리킨다. 체메조프는 2021년 공개된 ‘판도라 문서’(조세회피처에 재산을 은닉한 인물 명단)에 약 6억 달러짜리 슈퍼요트를 보유한 부패인물로 나타났다.

국영기업인 로스텍의 데니스 만투로프 회장은 푸틴 아래서 2012년 5월부터 무역산업부 장관을 맡아왔으며 2022년 7월부터는 부총리도 겸하고 있다. 체메조프와 만투로프는 푸틴의 이너서클이 군수산업체인 로스텍을 바탕으로 권력과 돈이 얽힌 부패의 먹이사슬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푸틴이 무리한 전쟁을 시작한 배경에 거대한 군수산업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란과 북한에도 손을 벌릴 정도로 러시아 군수업체의 공급 능력이 달린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전쟁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10월17~30일 벨기에의 클레이너브로헐 공군기지를 중심으로 북해와 영국 상공 일대에서 연례 핵전쟁 연습인 ‘스테드패스트 눈 2022’를 진행하자 러시아는 그달 26일 즉각 맞불작전을 벌였다. 그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전략폭격기 등 이른바 핵무기 운반수단 삼위일체를 동시에 선보이며 육해공 합동 정례 핵전쟁 훈련인 ‘그롬(우레)’을 진행했다. 통상 연 1회 실시했지만 올해는 지난 연초에 이어 두 번째다. 거기에 기존 방공 무기로 요격이 힘든 극초음속미사일도 동원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 훈련을 화상으로 참관하면서 핵보유국 지도자임을 과시했다.

 

바이든, 젤렌스키에 제동 거는 모습도 보여

하지만 가만히 보면 푸틴의 행동은 뭔가 부자연스럽다. 부자가 돈 자랑하는 형국이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데 그렇게까지 한다면 뭔가 보이지 않는 문제가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푸틴은 재래식 전력에서 밀리고, 내부적으로는 군수산업을 맡은 이너서클이 전쟁 수행을 위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아 사면초가에 빠진 상황을 숨기기 위해 핵보유국임을 심할 정도로 과시한다고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재래식 전쟁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자 푸틴은 갖은 수단으로 서방 압박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에서 북해를 거쳐 독일로 직송되는 노르트스트림1을 비롯해 유럽으로 가는 가스 파이프라인을 잇달아 막으면서 올겨울 유럽에 가스 공급 대란을 획책하는 것은 ‘에너지 차르’로 불리는 푸틴의 기본적인 꼼수다. 러시아는 10월29일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의 흑해함대와 민간 선박을 드론 등으로 공격했다며 흑해 항로를 통한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다시 막았다.

푸틴 대통령은 10월27일 국제 러시아 전문가 모임인 ‘발다이 클럽’ 회의에서 “서방이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다”며 “미국과 동맹국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위험하고 피비린내 나는 게임을 하고 있지만 결국은 우리와 대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 백미다.

얼핏 러시아와 미국의 대화에 무게를 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 서방을 향해 핵보유국 러시아가 원하는 것을 주는 시늉이라도 해서 체면을 살려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국내적으로는 권위를 유지하고, 국제적으로는 어서 빨리 출구를 찾게 도와 달라는 말이나 다름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푸틴이 다급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 정도에서 멈추되, 체면은 지키고 싶은 것이다. 러시아를 더 밀어붙이고 싶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대해 미국이 제동을 거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의 카운터파트인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도 11월8일의 중간선거 때문에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차가운 겨울 앞에 유럽 지도자들도 속이 타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결국 현재의 전선에서 정전을 하는 방안을 채택할 가능성도 커 보인다. 한반도의 휴전선처럼 말이다. 초조한 푸틴이 11월 중간선거를 마친 바이든과 접촉할 가능성이 무르익고 있다. 그럴 경우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이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크다. 전 세계가 지쳐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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