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만인에 대한 만인의 증오’만 키운 채 끝낼 것인가 [유창선의 시시비비]
  • 유창선 시사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1.12 14:05
  • 호수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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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비한 시스템 강화’ 없이 진영 간 공방만 난무
정부의 통렬한 반성과 무거운 책임이 이태원 참사의 정치화 막기 위한 선결 조건

156명의 사람이 서울 이태원 골목에서 깔려 숨졌다. 이런 참변이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함께 걸머져야 할 책임의 무게는 가벼울 수 없다. 두말할 것 없이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 있다. 주최자도 없던 축제에 예상을 뛰어넘는 인파가 몰려 생겨난 불가항력이라고 하기에는 관계당국들의 잘못이 너무도 뼈아프다.

압사 위험을 호소하는 신고 전화가 잇따르는데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경찰의 책임은 치명적이다. 사전 예방은 고사하고 참사가 발생한 상황에서 보고조차 제때 이뤄지지 못한 경찰조직의 기강 해이는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경찰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릴 일은 아니지만, 경찰이 신고 전화들에 신속한 대응 조치만 취했더라도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인력 부족으로 쩔쩔매던 젊은 경찰관들이 아니라, 그런 공백 상황을 낳은 경찰 수뇌부들이 마땅히 책임져야 할 일이다.

경찰만 책임지고 끝날 일은 아니다. “경찰·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했던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말은 탄식하던 국민 가슴에 불을 질렀다. 뒤늦게 사과하기는 했지만 여론의 비판이 빗발치고 경찰의 잘못이 드러나고 나서야 고개를 숙인 것은 공감능력의 부재를 말해 준다.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다”고 했던 박희영 용산구청장도 마찬가지다. 온 국민이 비통해하던 와중에 외신기자들 앞에서 농담을 한 한덕수 총리의 처신도 가볍기 이를 데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줘야 할 국가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망각한 모습들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참사에 대해 가장 무겁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마땅하다. “왜 4시간 동안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느냐”는 대통령의 질타는 맞는 얘기지만, 그것이 경찰만 문책하고 끝내려는 생각이라면 정부가 져야 할 무한책임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재난 총괄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으며 경찰청을 소속기관으로 두고 있는 행안부 장관의 건재함은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

11월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일어난 현장의 경찰 통제선 밑에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시민들이 가져온 꽃과 술, 과일 등이 놓여 있다.ⓒ시사저널 박정훈
11월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일어난 현장의 경찰 통제선 밑에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시민들이 가져온 꽃과 술, 과일 등이 놓여 있다.ⓒ시사저널 박정훈

‘재난의 정치화’로 얼룩진 세월호의 아픔 반복하지 말아야

하지만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참극의 슬픔을 정치적 무한대결의 장으로 끌고 가는 데 대한 동의는 아니다. 이태원 참사를 가리켜 ‘제2의 세월호 참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두 참사의 내용과 성격은 크게 다르지만, 국가가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닐 수 있다. 그렇다고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애도했던 세월호가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체의 분열과 반목을 낳았던 역사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 문제는 ‘외부충돌설’ 같은 음모론적 상상들이 개입하면서 소모적인 논란의 과정을 반복했다. 9차례의 조사와 수사가 있었지만, 음모론이 제기한 조작 등의 의혹은 확인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밝혀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밝힐 내용이 없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거듭되는 진상 규명 요구에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가 활동했다. 그러나 침몰 원인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결론에 그쳤다. 그 결론을 얻기 위해 사참위가 활동한 기간은 45개월이었고, 사용한 예산은 547억7100억원에 달했다. 그 엄청난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들였지만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지 불과 8년 만에 또 다른 참사는 다시 일어났다.

그 이유가 오로지 보수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라고만 해석한다면 너무 정치적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가 가던 길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상 규명 요구에 갇혀 제자리걸음을 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재난을 막고 안전을 지키기 위한 시스템을 갖추고, 다시 만연된 안전불감증을 막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진상 규명 요구에만 매달린 결과는 ‘아직도 세월호냐’는 국민과 ‘여전히 세월호다’라는 국민을 갈라놓았을 뿐, 정작 필요한 본질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차단시켰다. 재난에 대한 책임이 정치와 분리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재난의 정치화’는 정작 안전사회를 위한 실질적 노력에 사용되었어야 할 사회적 에너지를 음모론과 씨름하는 데 소모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다시 무성한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참사가 발생하자마자 정권퇴진을 위해 촛불을 들자는 목소리도 이어졌고 ‘제노사이드(집단학살)’라는 말도 등장한다. 하지만 그런 ‘악마 만들기’식 접근법은 정치적 갈등만 증폭시킨 채 막상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음을 지난 경험들은 말해 주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누군가들의 정치적 책임을 묻는 판을 키우는 데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태원 참사는 서로에 대한 증오만이 넘치는 결말로 끝나기 쉽다.

 

경찰에게만 책임 묻는 문책, 정치적 판 커지는 상황 조장하는 꼴

너도나도 ‘예견된 참사’였다며 사후적 책임 추궁을 하고 있지만, 막상 참사를 ‘예견’했던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우리 사회의 어디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없다. 특히 참사가 일어나기 하루 전, 심지어 한 시간 전에 뉴스를 통해 현장의 축제 분위기를 전했던 방송들도 참사를 ‘예견’하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죄를 추궁하기에 앞서 나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우리 공동체의 윤리가 되어야 한다.

경찰 수뇌부들이 문책당하고 행안부 장관, 아니 국무총리까지라도 물러난다면 앞으로 이런 재난은 없다고 믿어도 되는 것일까. 만약 지금이 민주당 정부였다면 이런 재난은 없었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일까. 문제는 몇 사람이 책임지고 사퇴한다 해도 시스템의 미비와 안전불감증이 계속되는 한 대형 재난 사고는 언제든 예고 없이 닥쳐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전체적 고민은 없이 참사를 기화로 오직 정치적 판만 키우려는 모습들은 ‘재난의 정치화’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경찰에게만 책임을 묻고 끝낼 것 같은 윤 대통령의 ‘좁고 약한 문책’은 그런 정치적 판이 커지는 상황을 오히려 조장하는 일이다. 국민의힘 이태원 사고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의 입에서 “불순세력 개입 얘기도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여당판 ‘재난의 정치화’라 할 만하다.

지금 우려되는 것은 이태원 참사마저도 세월호의 전철을 밟아 ‘만인에 대한 만인의 증오’만 키운 채 끝날지 모른다는 점이다. 미비한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진영 간 정치적 공방만이 난무하는 판으로 가고 있다. 우리가 참사를 슬퍼하고 애도하는 것은 진영 간 증오를 키우기 위함이 아니다. 들에 버려진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 앞에서 안티고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증오를 나누어 갖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우리 정치도 증오를 키우려고 생겨난 것은 아니었을 게다. 그런데 여도 야도, 제 길에서 벗어나고 있는 모습이 유감스럽다. 정부가 통렬하게 반성하고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는 것은 이태원 참사의 정치화를 막기 위한 선결 조건이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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