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성폭행 피해자에 “내일 오세요” 저녁에 문 닫은 해바라기센터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22.11.27 16:05
  • 호수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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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에는 ‘24시간 운영’, 상반기에만 209일 ‘야간 공백’
“의료진 없어 피해자들 밤길 헤매” 정부, 내년 인건비 사실상 동결

#. 자정이 지난 늦은 밤 성폭행 피해를 당한 A씨는 당장 도움의 손길이 절실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112 경찰 신고. A씨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절차대로 성폭력 상담기관인 ‘해바라기센터’와의 연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365일 24시간 운영’을 내건 인근 해바라기센터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지금 피해자의 신체에 대한 ‘응급 증거채취’를 진행할 의료진이 없다”는 것이었다. “몸을 씻지 않은 상태로 내일 아침 9시에 다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A씨는 피해가 발생한 곳으로부터 차로 40분 떨어진 다른 센터를 찾았고, 여기에서 3시간여에 걸친 증거채취를 마쳤다. 길고 아득한 밤을 보낸 A씨는 동이 틀 무렵에야 귀가할 수 있었다.

해바라기센터는 성폭력을 당한 후 모든 것이 막막한 피해자들을 위해 ‘언제든지’ ‘무엇이든’ 지원하겠다는 취지로 세워진 여성가족부 산하 ‘성폭력 피해자 통합 지원센터’다. 2003년, 길 가던 50대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한 초등학생이 약 20시간 동안 경찰·병원·상담소 등을 옮겨 다니며 피해를 진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항시 원스톱 지원기관’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됐다.

해바라기센터 전경. 사진 속 센터는 기사 내용과 무관함 ⓒ시사저널 임준석
해바라기센터 전경. 사진 속 센터는 기사 내용과 무관함 ⓒ시사저널 임준석

성범죄 밤에 빈번한데 “24시간 근무 불가”

이듬해 서울에서 처음 출범한 해바라기센터는 현재 전국 39개소로 늘어났다. 여가부는 ‘365일 24시간,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상담·의료·법률·수사·심리치료 지원 등을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기관’이라고 해바라기센터를 명시하고 있다. 즉 성폭력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줄 수 있는 모든 시간적·공간적 공백을 차단하겠다는 게 센터 운영의 제1 원칙이다.

그런데 지금 이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 센터마다 야간에 근무할 인력이 부족해 피해자가 시급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리는 일이 잦다. 센터 홈페이지엔 예외 없이 ‘365일 24시간 운영’이라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정작 저녁이 되면 전화 연결이 되지 않거나, 연결이 이뤄지더라도 성폭력 증거 채취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할 의료 직원이 부재해 다음 날을 기약해야 하는 상황이 적지 않다.

시사저널 취재 결과 전국 해바라기센터에서 올 상반기(7월15일까지)에만 총 209일 야간 지원이 이뤄지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24시간 운영’이 원칙인 통합형·위기지원형 센터 32개소 중 9개소에서 야간 공백이 나타났으며, 이 중에는 106일 동안 야간에 문을 닫은 센터도 있었다.

정작 성폭력 피해자들의 SOS 요청은 오히려 야간에 더 빈번해진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발생한 강간·유사강간 범죄 10건 중 약 6건(57%)이 밤 9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 사이에 발생했다(사건 발생 시간 미상 제외). 무너진 원칙의 틈 사이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 공백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센터 직원들도 이러한 문제점과 피해자들을 위한 야간 지원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늦은 밤 센터 문을 두드리는 피해자를 그대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에 그저 눈감을 수밖에 없다고 전한다. 24시간 운영을 요구하면서, 물리적으로 24시간 운영이 불가능한 예산과 인력을 지원하고 있다는 게 이유다.

정부는 센터 한 곳당 평균 3~5명의 간호사를 채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들은 하루 2교대로 12시간씩 돌아가며 근무하고 있다. 보통 3교대로 돌아가는 일반 병원 간호사들과 비교해 당장 업무 시간부터 큰 차이가 난다. 게다가 인력 유출이 빈번한 탓에 그나마 3~5명이 전부 채워져 돌아가는 날도 드물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실제 각 센터 홈페이지엔 1년에만 수차례씩 간호사를 구하는 채용 공고가 올라오고 있다. 일례로 올해 충남해바라기센터는 지난 9월 기준 10차례나 간호사 채용 공고를 띄웠고 그 사이사이 센터 내 간호사가 1명도 근무하지 않은 기간도 발생했다. 센터 관계자들은 정부가 세운 ‘365일 24시간 운영’ 원칙은 사실상 격주로 쉬며 2교대로 꼬박 근무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토로한다.

인력난은 단연 열악한 처우로부터 온다. 익명을 요청한 수도권 내 해바라기센터 직원은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센터 인력들에 대한 복지후생은 단언컨대 ‘제로(0)’”라고 얘기했다. 그는 “업무 강도는 높은데 월급은 최저임금에 가깝고 야간 수당도 턱없이 적다”며 “올해 들어서야 겨우 간호사 인력이 채워졌는데, 벌써부터 모두가 끊임없이 이직을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간호사 채용을 진행한 한 센터의 채용 공고에 따르면, 실무 경험 2년 이상의 경력을 조건으로 내걸면서도 연봉은 2700만원 선에서 책정됐다. 일반 병원 등 타 의료 현장보다도 한참 낮은 수준이다.

취재에 따르면, 센터 한 곳당 배정되는 예산은 한 해 약 7억원 남짓이다. 현장 직원들에 따르면 예산 중 상당 부분을 피해자 지원에 사용한다. 여기에 센터 임대료도 다달이 부담해야 한다. 대형 병원 내에 상주하고 있는 센터의 경우 비교적 임대료가 저렴하지만, 센터가 병원 밖에 별도로 위치해 있는 경우엔 예산에서 임대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커진다. 직원 인건비 등 업무 지원을 위한 비용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인건비 사실상 동결…“결국 피해는 피해자에게”

최근 물가 상승 등의 영향으로 각 센터의 운영 사정 또한 어려워졌다. 하지만 2023년도 정부 예산안에 따르면 센터 직원들의 인건비는 전년 대비 불과 1.7% 올랐다. 물가상승률 등을 고려했을 때 사실상 깎인 것이다. 피해자를 지원하는 직원들의 처우가 보장되지 않을 경우, 결국 피해자에 대한 지원에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익명을 요구한 수도권 외 지역의 한 센터 직원은 “센터마다 주어진 예산 안에서 최대한 많은 피해자에게 최대한으로 지원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피해자에게 안정적인 지원을 제공해야 하는 센터 운영이 계속 불안정하다면, 종래엔 피해자를 선택적으로 받거나 피해자 지원을 더욱 까다롭게 할 가능성이 생긴다”며 “결국 도움을 받기 위해 어렵게 센터를 찾은 피해자들에게 센터가 또 다른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도 ‘2023년도 여가부 예산안 검토보고’를 통해 해바라기센터 운영 문제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했다. 예결위는 “성폭력 피해자가 센터의 24시간 운영을 믿고 방문했다가 야간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될 경우, 성폭력 피해자 지원제도 자체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며 “내년도 계획액 집행 과정에서 필수 의료·상담 인력이 원활하게 채용될 수 있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여가부는 센터가 호소하는 어려움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가부 관계자는 통화에서 “코로나19 영향으로 의료 인력난이 심해지면서 지난 2~3년 동안 해바라기센터 내 의료 공백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병원에 대해 센터 지원 실적에 따라 가점을 부여하는 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각 센터의 인원 현황과 야간 지원 공백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관계자는 “항시 조사를 하는 게 아니라서 현재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진 못한다”며 “센터 종사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예산 확보에 노력했지만 인건비 시세에 맞춰 충분히 챙겨주지 못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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