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벤투’ 선임 놓고 여론 눈치에 축구협회 갈팡질팡 행보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1.01 11:05
  • 호수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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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감독 선임 분위기 우세해지자 선수·팬들 반대 목소리 높여
尹 대통령까지 나서 잇단 질타… 정몽규 회장과 축구협회 행보 갈팡질팡

2022년 12월13일 대한축구협회는 카타르월드컵에서 12년 만의 16강 진출을 안긴 파울루 벤투 감독의 뒤를 이을 새 사령탑 선임을 오는 2월까지 마치겠다고 발표했다. 오는 3월 FIFA(국제축구연맹) A매치 스케줄이 잡혀 있는 만큼 4년 뒤 월드컵을 향한 새 출발을 정식 감독으로 치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공교롭게 벤투 감독은 그날 밤 많은 팬과 관계자들의 환송 속에 4년4개월 동안 지냈던 대한민국을 떠나 조국인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축구협회가 내건 신임 대표팀 감독 선임 일정은 이렇다.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회에서 2022년 12월 내에 선임 기준을 확정해 1차 후보군을 추리기로 했다. 2023년 1월엔 최종 후보군을 선정한 뒤 직접 면접을 거친다. 2월부터는 우선협상대상 순위에 따라 순서대로 개별 협상을 진행, 새 사령탑을 결정한다. 원칙적으로 국내외 국적 구분 없이 복수의 감독 후보를 추천한다는 방침이다.

한국 축구의 극적인 16강 진출로 벤투 감독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차기 감독에 대한 관심도 크게 증폭됐다. 월드컵 여정이 끝나자마자 차기 감독 선임에 대한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애국심이 강하고, 연봉 10억원 미만’이라는 정체불명의 기준이 등장하는가 하면 안정환 MBC 해설위원, 박항서 베트남 대표팀 감독 등 언급도 되지 않은 후보군까지 거론됐다. 결국 축구협회는 이런 낭설을 잠재우기 위해 정식으로 일정과 선임 단계를 공지한 것이다.

2022년 11월 축구협회는 전력강화위원회 회의를 진행했다. 차기 감독 선임에 대한 기본 틀을 위한 난상 토론이었다. 크게 두 가지 결론이 나왔다. 하나는 국내 감독 선임 가능성, 또 다른 하나는 외국인 감독을 선임하더라도 사단급 코칭 스태프 운영은 어렵다는 주장이었다.

ⓒ시사저널 최준필
2022 FIFA 카타르월드컵을 마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이 귀국한 12월7일 인천 중구 인천국제공항에서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왼쪽)과 손흥민 선수가 대화를 하고 있다. ⓒ시사저널 최준필

용산 분위기 안 좋자 정 회장 부랴부랴 사재 20억 출연

두 의견은 월드컵 본선 전에 벤투 감독의 지난 4년을 돌아보면서 나온 의견이었다. 4년간 약 200억원에 가까운 인건비가 투자된 만큼의 효과가 있었냐는 반문이었다. 2026년 북중미 3개국(미국·멕시코·캐나다)이 공동 개최하는 차기 월드컵부터 FIFA는 참가국을 48개국으로 늘린다. 아시아에 배정된 출전권도 8.5장으로 현재의 4.5장에서 대폭 증가한다. 국내 감독으로도 본선행 문턱을 넘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얘기다.

외국인 감독 선임 가능성을 지운 것은 아니지만, 벤투 감독 때처럼 각 영역 전문가들을 대동하는 사단 체제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대한축구협회가 코로나 팬데믹 여파로 인해 2021년까지 수익이 감소했고, 2024년 6월 준공 예정인 천안시 소재의 대한민국 축구종합센터 건립비에 1200억원을 대야 하는 만큼 연간 40억원에서 50억원 수준의 코칭 스태프 운영은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결국 모든 상황을 종합할 경우 외국인 감독보다는 한국인 감독이 더 유력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회의 당시에도 대표팀 사령탑을 감당할 만한 한국인 지도자만으로 리스트가 짜였다. 그렇다 보니 벤투 감독이 떠나는 것이 공식화된 뒤 축구협회가 차기 사령탑은 한국인 지도자로 이미 가닥을 잡았다는 정도를 넘어 특정인을 내정했다는 루머까지 나왔다.

이런 분위기가 되자 이례적으로 선수들이 목소리를 냈다. 김영권·이재성·김민재 등 대표팀 중고참 선수들이 하나같이 차기 감독 선임의 방향성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과거 대표팀 선수들이 민감한 사안에 침묵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지금은 대표팀에 더 수준 높은 훈련과 전술 준비로 선수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외국인 감독이 필요하고, 벤투 감독 사례처럼 일관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4년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선수들의 의견이었다.

이런 목소리는 2022년 12월8일 대통령실 만찬에서도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직접 선수들을 격려했고, 향후 한국 축구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의견에 귀를 기울였는데, 여기서도 외국인 감독 선호에 대한 선수단 분위기가 전달된 것이다. 공교롭게 그날 행사에는 정작 축구협회 수장인 정몽규 회장은 초청받지 못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선수들을 빛내기 위한 자리다 보니 대통령실 초청 대상에서 정 회장이 제외됐다”고 설명했지만 월드컵에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한 정 회장이 배제된 것은 뭔가 석연치 않았다.

 

한국인 감독 유력했던 분위기, 외국인 쪽으로 급선회

게다가 환영만찬 이후 윤 대통령은 잇달아 축구협회를 질타하는 목소리를 냈다. 만찬 다음 날 경제단체장들을 만난 자리에서 “고생은 선수들이 했는데 왜 축구협회가 월드컵 배당금을 더 많이 가져가느냐”고 지적했다. 선수들에게 돌아가는 포상이 적다는 취지였다. 2022년 12월13일 국무회의에서도 같은 내용을 언급했다. 축구협회는 이미 선수 1인당 최대 2억7000만원으로 책정한 상황이었지만 대통령의 연이은 질타에 정 회장이 긴급하게 사재 20억원을 추가로 지급해 최대 3억4000만원으로 증액하는 해프닝까지 연출됐다.

정 회장이 여론의 목소리를 넘어, 대통령의 질타까지 이어지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본업인 HDC그룹 회장 시절이던 2022년 초 광주 화정아이파크 붕괴 사고로 큰 위기를 맞은 정 회장은 10월에는 차기 아시안컵 유치에도 실패했다. 아시안컵은 윤 대통령이 취임 후 2030년 부산 엑스포와 함께 개최에 큰 의욕을 보인 국제 행사였지만, 축구협회는 외교력에서 카타르에 크게 밀리며 유치전에서 참패했다. 그런 상황에서 대통령실 초청에서 제외되자 사재 출연이라는 빠른 대응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국가대표 감독 선임 분위기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축구협회 내부적으로 차기 대표팀 사령탑 선임의 방향이 기존에는 회의적이었던 외국인 감독으로 급선회하는 분위기가 생기고 있다. 수장인 정 회장의 뜻이 한국인 감독이 아닌 외국인 감독으로 향한다는 뜻이다.

차기 감독 선임에 책임을 쥐고 있는 이용수 부회장(전력강화위원장)이 손을 놓고 다른 인물이 주체로 나선다는 얘기도 있다. 이 부회장은 김판곤 전 전력강화위원장이 말레이시아 대표팀 감독직을 맡기 위해 물러나며 전력강화위원장을 겸업했다. 하지만 2014년 그가 선임한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러시아월드컵 최종예선 과정에서 한국을 탈락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 부회장은 책임을 지고 당시에 사임했다가 2021년 초 정 회장의 3선과 함께 집행부에 복귀했다.

이 부회장은 2022년 12월로 기존 계약에 의한 임기가 끝나는데, 2023년 2월 선임을 마무리해야 하는 차기 대표팀 감독 선임은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이 하는 게 맞다는 의견을 축구협회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축구협회 내 기술파트에서 차기 감독 선임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실제 면접과 협상은 새로운 전력강화위원장이 맡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축구협회 부회장을 겸직 중인 이영표 전 강원FC 대표이사 등이 새 위원장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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