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가고 싶다’…400여 년간 한 가지 성만 쓰고 살아온 심수관
  • 심상기 시사저널 회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2.27 10:05
  • 호수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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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15대 심수관 “아버지의 빚은 23년 걸려서 겨우 다 갚았다”
심수관 후손으로서의 일본에서의 삶, 한국에서의 경험

조선인 도공 심당길은 1598년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일본으로 잡혀갔다. 도자기 기술이 없었던 일본에서 심당길은 ‘사쓰마도기(薩摩燒)’라고 하는 독보적인 도자기 장인 종가의 가계(家系)를 이어나갔다. 그의 12대손 심수관은 1873년 오스트리아만국박람회에 대화병 한 쌍을 출품해 서구사회에 사쓰마도기의 수출 길을 열었다. 사쓰마도기는 오늘날 일본 도자기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심당길의 후손들은 12대부터 대를 이어가며 본명 대신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습명하고 있다. 규슈 가고시마(옛 지명 사쓰마)에서 대대로 가업을 이으며 심수관요를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도자기 명가로 일궈냈다. 과거 필자는 14대 심수관(1926~2019)을 서울에서도 만났고, 가고시마에서도 만났다. 그와 대화를 나눈 후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가 심수관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실화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1969년)를 읽으면서 심수관에 대한 이해를 더할 수 있었다. 이 소설에는 14대 심수관이 어린 시절 일본 사회에서 받은 핍박과 아버지 13대 심수관으로부터 받은 엄한 교육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1988년 한국을 방문해 우먼센스 창간 기념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14대 심수관 ⓒ 우먼센스 제공
1988년 한국을 방문해 우먼센스 창간 기념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14대 심수관 ⓒ우먼센스 제공

“너에겐 조선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싸워서 이겨야 한다”

『기차역에서 2km쯤 떨어진 가고시마 중학교 1학년 때다. 일본인 학생들이 일본 성을 갖지 않은 심수관을 발견하고 교실에 들이닥쳤다. 일본 성을 갖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신을 차리게 하겠다’며 10여 명이 그를 교실 밖으로 불러내 옥상으로 끌고 올라갔다. 쓰러진 심수관의 머리를 때리고 발로 차 그대로 기절했다. 교복이 온통 피로 물들었다. 코피를 흘리며 가까스로 눈을 떴다.  

그날 하굣길에 소년은 깜짝 놀랐다. 집 근처 가까이에 부모님이 서있는 게 아닌가. 그의 양친은 소년에겐 신과 같은 존재였다. 부모님은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말없이 머리를 끄덕이며 아버지(13대 심수관)는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고 흙을 털어주며 대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소년은 소리 내지 않았으나 눈물이 한없이 흘렀다. 어머니가 상처 난 얼굴에 약을 발라주려고 했으나 고개를 저었다. 혼자 우물에 가서 얼굴을 닦았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때 아버지가 등 뒤에 서있었다. 아들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소년은 아버지가 묻는 대로 사정을 얘기하고 그때마다 눈물이 나와 다시 얼굴을 닦았다. 아버지는 “알았다, 알았다” 몇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말이 별로 없는 사람으로 평소 말하는 것을 보기 어려웠으나, 이날은 아버지 자신도 아들처럼 예전 가고시마 중학에 입학한 그날, 똑같은 일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을 염려했는데, 그런 아버지의 생각은 적중했던 것이다. 

소년은 결심했다. 더 이상 이런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집에서 배우겠다고 아버지한테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12대 심수관에게서 들은 똑같은 말을 소년에게 했다. “너의 근성은 싸워서 이기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다시 들어라, 너의 피에는 조선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다시 들어라, 1등이 되어야 한다. 싸움도 1등을 해라. 공부도 1등을 해라.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다른 눈으로 너를 본다.” 소년은 이날 일을 일기로 썼다.

그 후로는 매일 학교의 공터 어딘가에서 소년은 다른 학생들과 싸웠다. 때로는 소년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싸움을 잘하는 상대를 만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나는 죽는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어깨가 부서질 정도로 싸움에 나섰다. 때론 상대방을 기절시키기도 했다.』

2013년 11월 일본 가고시마 미야마를 방문한 시사저널 취재진이 심수관 공방에서 15대 심수관을 만났다. ⓒ시사저널 사진자료

“여주 항아리 공장 시절,  새벽 3시반 일어나 도예 기술 습득”

필자는 1980년 가을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 신문 편집국장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때 일본신문협회 주선으로 가고시마 도자기타운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때 일본 도자기의 원조로 알려진 이삼평(조선 중기의 도공으로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자기의 신으로 추앙되는 인물)의 ‘도자기 원조 기념비’ 등 도자기타운의 곳곳을 둘러봤던 기억이 있다. 

올해 1월말 필자는 도쿄 다카시마야에서 열린 도자기 전시회를 찾았다. 이 자리에서 14대 심수관의 아들인 15대 심수관(63)을 만났다. 그가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던 이야기를 시작으로 심수관 후손으로서의 일본에서의 삶, 한국에서의 경험,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 등을 화제로 얘기를 나누었다. 

ⓒ시사저널 사진자료
1월말 일본 도쿄 다카시마야 도자기 전시회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심상기 회장(왼쪽)과 15대 심수관 ⓒ시사저널 사진자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번 기회에 시사저널에 심수관 내용을 쓰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우리는 청송(靑松) 심씨인데, 지난해 7월 한국에 들어가서 저희 집안의 시조, 즉 일본에서 시작된 시조입니다만, 제1대 심당길의 부모님 묘가 김포에 있다고 해서 갔었습니다. 거기서 대단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시조인 심당길이라는 분은 이게 어릴 때 이름이고, 진짜 이름은 심찬입니다. 찬은 칭찬하다 할 때 찬(讚)입니다.”

거기에 심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나요?

“예, 맞아요. 심당길의 백부, 아마 심당길 아버지의 형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분이 조선 의병대 대장이었어요. 심당길은 백부를 따라 진주성에 들어갔어요.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백부는 거기서 전사했습니다만, 심당길 그분은 살아남아 나중에 남원성에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런 연유로 묘소에 참배하러 갔었습니다.”

선생은 한국에서도 도자기 공부를 하셨죠?

“공부라고 할까, 항아리를 만드는 공장에서 1년 정도 생활하면서 매일 새벽 3시 반부터 저녁 6시까지 일했었습니다. 좋은 경험이라면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는 몇 년 정도 계셨죠?

“2년입니다. 25세에 결혼하고 바로 이탈리아로 갔습니다. 28세 되기 전에 졸업하고 나서 쭉 아내와 둘이서 배낭 메고 터키(튀르키예), 시리아, 인도, 네팔, 미얀마, 태국 그리고 한국도 6개월 정도 여행했습니다. 방랑하는 백패커였죠. 그 후 일본으로 돌아왔다가 서른 살 때 다시 한국에 가서 이런저런 일을 경험했죠. 결국 경기도 여주의 항아리 독 공장에 들어갔어요.” 

한국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그때 제가 한국말도 잘 못하지, 글도 못 쓰지, 아무것도 몰랐던지라, 여기저기 다녀봤지만 어느 공장에서도 일본인이라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 여주 공장에서만은 다행히 일본 사람이라 해도 옛날 뿌리가 한국인이면 괜찮다며 허락해 줬어요. 그래서 1.5평 크기의 작은 방에서 그 공장 사장의 아들과 함께 자며 생활했습니다.

정말 가난한 곳이었어요. 온돌이 있었습니다만 열을 보내는 파이프에 구멍이 나 가스가 새기 때문에 창문을 열고 자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배는 추운데 등은 따뜻했죠. 하지만 새벽 3시 반이면 일이 시작돼 정말 열심히 했었습니다. 일이 끝나면 손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어요. 젓가락을 못 쥐었으니까요. 한국의 금속 젓가락을… 그래서 보리밥에 물을 부어 숟가락으로 떠먹었어요.

자기 전에 양초 촛농을 계속 손에 흘리고 자면, 아침에 일어날 때 젓가락을 제대로 쥘 수가 있어요. 그런 생활을 했었습니다. 욕실이 없고 화장실도 없었죠. 그때 제가 30세였는데, 34년 전 그때 그곳은 당시의 서울과 비교해도 50년 정도 낙후돼 있었어요. 날씨가 조금 따뜻해지면 한강에서 목욕(웃음), 한강 목욕을 했어요. 씻고 나서 그물을 던져서 물고기를 잡고 다 함께 먹었어요. 일본에서 경험할 수 없는 1년간이었습니다. 

지금도 그곳 공장은 한국에 갈 때마다 찾아갑니다. 지금은 훌륭한 공장이 되었어요. 정부로부터 전통적인 기술을 지키고 있다며 지원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한번 제가 그 공장을 방문했을 때 사장의 아들에게 한국도 앞으로 소비자단체의 목소리가 커지는 시대가 올 테니 제조 과정을 옛날 방식으로 되돌려 놓는 게 반드시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라고 조언해 줬습니다. 그 아들은 정직하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어서 고맙게도 제 말을 따라 그대로 해줬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네. 지금은 그러한 점들이 인정을 받아 그 공장의 사장은 인간문화재(김일만 옹기장: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7호 옹기장이자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가 되고, 아들은 정부에서 받은 지원금으로 훌륭한 한옥 공장을 지었습니다. 잘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부자 옹기’라는 곳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네 명이 함께 해서.”

아버지 되시는 14대 심수관과는 젊을 때부터 이 일을 계속 이어가기로 약속했었나요? 아니면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건가요? 

“아버지는 사실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고, 어머니가 당부하셨어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달라고. 처음에는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 일이 저한테 적성에 맞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면서 심수관이라는 한국 이름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 생각했을 때, 어머니께서 이어 달라는 당부도 있고 하셔서, 교토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시작해 보니까 또 나름 재미가 있더라고요, 이게 이상하게도. 그러고 나서 이탈리아에 갔습니다. 이탈리아에 간 것은 커리어를 쌓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일본은 장인을 키울 때 사람을 거의 기계로 만듭니다. 즉 같은 폭, 같은 깊이, 같은 모양, 같은 무게의 것을 하루 300개 만들 수 있는 그러한 장인이 일본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겁니다. 그러한 장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다들 정확하게 재면서 같은 물건을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훈련을 받아왔기에, 설계도가 있으면 어떠한 것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제 어머니가 접시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그걸 만들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걸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는 겁니다. 이걸 만들 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설명서가 있으면 할 수 있겠는데 그게 없으니, 제 스스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이탈리아로 도망갔습니다. 이탈리아의 국립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여러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널 강하게 키우려고 그런 거야”

지금 자녀분에게도 16대로 가업을 잇게 하실 생각인가요?

“예. 함께 하고 있어요. 제 신념인데, 어릴 때부터 제 자식들에게 가마 불을 피울 때엔 학교를 쉬게 한 채 제 일을 돕도록 했습니다. 학교에선 시키는 것만 하면 되지만, 가마 앞에선 자신이 어디에 서있어야 하고, 다음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마에 불을 땔 때 아버지와 함께 하자며 장남과 차남이 초등학교 2학년 될 때부터 같이 했어요. 가마에 불을 지필 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면 곁에서 아이들도 이를 조용히 듣게 했어요. 불을 지피는 것이 끝나고 3일 동안 식히고 나서 가마를 열 때면 또 학교를 쉬게 합니다. 그리고 가마를 같이 열게 합니다. 가마가 잘 지펴졌다면서 저희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연스럽게 일이 내 일처럼 되는 거죠. 고객들이 기뻐하는 그런 표정을 보여주고 싶은 거죠.”

실례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하고 있는 일로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나요? 생활이 곤란하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일이니까요. 물론 (곤란은) 있죠. 아버지가 많은 빚을 남기고 가셨어요. 하지만 그 빚이 있어서 또 열심히 일했습니다. 아버지는 옛날 사람이라 돈은 은행에 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아무것도 생각 안 하셨죠.”

현재는 빚으로 인한 문제가 없나요? 

“아버지의 빚은 23년 걸려서 겨우 다 갚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의 지인 분이 장례식에 와 주셨어요. 그분과 생전 아버지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가 ‘상냥하실 때는 상냥하셨지만, 때로는 또 부당한 아버지셨다. 화가 나시면 코피가 날 정도로 절 때리셨다’고 얘기하니까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라고 물으시더라고요. ‘모르겠다’고 하니까 ‘널 강하게 키우려고 그런 거야’라고 하시더군요.”

현재 일본 가고시마와 한국의 관계로 총영사 일을 하고 계시죠?

“예, 명예총영사입니다.”(그는 아버지 14대 심수관에 이어 202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명예총영사에 임명되었다.) 

한국과의 관계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선생이 앞에 나서서….

“저는 정치적인 문제를 관여하는 입장은 아니고, 문화 교류와 사람들 간 교류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고민하고 있는 건 장애인처럼 어떤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교류입니다. 지금도 30년 넘게 그러한 교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뇌성마비 일본인과 뇌성마비 한국인의 교류 같은 것 말이죠. 그런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들만으로는 교류할 수 없습니다.” 

일은 언제까지 계속하실 예정인가요?

“제가 현재 63세입니다. 70세 정도에 은퇴할 수 있다면 은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7년간은 계획이 다 짜여 있어요. 그래서 도망칠 수도 없어요.”

그 이후엔 아드님께서 대를 잇게 되는 거죠?

“예, 그렇죠.”

그러면 심수관 20대, 30대, 50대도 있을 수 있겠죠?

“(웃음) 하지만 제 아들은 아직 독신입니다. ‘총가’입니다(한국의 총각이라는 단어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발음하기 힘든 ‘각’의 받침 부분이 사라지고 총가라는 단어가 됐다). 아들은 제가 한국에서 공부할 때 생긴 애입니다. ‘메이드 인 코리아’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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