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 심수관 “아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랍니다”
  • 감명국 기자 (kham@sisajournal.com)
  • 승인 2023.02.27 10:05
  • 호수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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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14대 심수관이 1988년 8월 우먼센스 창간호에 남긴 말들
김이연씨와의 인터뷰에서 ‘강렬한 정신’ ‘불굴의 힘’ 보여줘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끌려가 일본 도예의 명문가가 된 심수관은 4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에 가장 널리 알려진 심수관은 14대 혜길(惠吉)씨다. 그는 2019년 작고했지만 35년 전인 1988년 월간 우먼센스 8월 창간호에서 여류 작가 김이연씨와 인터뷰한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61세. 14대 심수관 혜길은 가고시마대학 의학부를 나와 다시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한때 가업 잇기를 거부하다 아버지 13대 심수관의 엄명으로 도공의 길에 들어선 뒤엔 무서운 정신의 힘으로 심수관 가문의 빛을 밝혔다. 그는 어딜 가나 망원경을 들고 다녔는데 “모든 사물을 확실하게 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우먼센스 창간 인터뷰에서 14대 심수관이 남긴 말들을 모아봤다. 치열한 장인정신이 느껴진다.

1988년 비가 내리는 가운데 14대 심수관과 여류작가 김이연씨가 만났다. ⓒ우먼센스 제공

“(15대 아들도 도공인데, 가문의 반란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저는 아들에게 도공이 되라고 강요하진 않았습니다. 아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에게 도공이 되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아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도공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아버님이 제게 가업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셨을 때, 400년 동안 설움 받으며 이어온 도자기를 제 대에서 끊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마 아들도 마찬가지였겠죠.”

“물레가 제게 인생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빙빙 도는 물레라는 세계 속에 조선인의 피를 이어가는 도공의 신이 있었습니다. 저는 큰 문제가 닥쳐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게 되었지요. …아버님은 ‘지식 없이 손재주만 익히면 그것은 아무런 혼이 없는, 그야말로 재주에 불과하다’고 하셨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어머님은 제가 일하는 모습을 뒤에서 잠자코 30~40분 지켜보셨습니다. ‘아직 더 해야 한다. 아직 더’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심수관의 작품 경향에 변화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물론 1대 때는 이조백자 그대로였겠지요. 작품 경향이 대마다 특색이 있습니다. 할아버님 대에는 화사함이 깃들어 있고, 13대인 아버님 대에는 이조백자의 청아한 맛이 깃들어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건너온 이조 자기만을 계승하는 것이 소원이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의 습관이 다르고, 원하는 작품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라는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것을 만듭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도공입니다. 며칠씩 손을 쉬고 있으면 손끝이 일에 대한 감각을 잊어버리지나 않을까, 일을 못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합니다. 작업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한국에 와서 도자기 작품을 만들고 싶지 않냐는 질문에 대해) 물론 하고 싶지요. 만일 하게 되면 우리 선조들의 넋이 서려 있는 전북 남원(심수관 1대가 일본군에 포로로 붙잡혀 끌려간 곳)에서, 남원의 흙과 소나무를 갖고 해보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100대 정도는 계승할 것입니다. 제가 못 하면 아들이, 아들이 못 하면 손자가 대대로 이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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