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가 불러올 또 다른 양극화, 청년층에 위기이자 기회 [임명묵의 MZ학 개론]
  • 임명묵 작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2.27 11:05
  • 호수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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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 편리함 즐기되, 적당한 수준으로만 활용해야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던 어느 날, 필자는 캠퍼스에서 친구와 커피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날 만난 친구는 필자와 같은 인문대생이 아니라 공과대학에서 연구를 하는 친구였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대화 주제도 그 친구의 연구 분야인 AI였다. 마침 명령어에 따라 그림을 그려주는 프로그램인 ‘NovelAI’의 이미지 생성기가 인터넷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을 때였다. 그림의 미래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친구는 나에게 ‘OpenAI’라는 회사에서 만든 ‘GPT’라는 인공지능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당연하게도 처음 듣는 물건이라고 답하자, 그 친구는 “한번 사용해 보세요. 써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한 번 더 달라질 겁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실제로 그랬다. 당시 필자는 과제물 제출을 앞두고 있었는데, 영어로 작성해야 했기에 다소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GPT를 써보니 이 모든 시간이 정말 획기적으로 단축되었다. GPT는 어색한 문장을 자연스러운 영어로 고쳐주었고, 긴 문장을 두세 개로 쪼개 달라고 하면 완벽히 의미가 통하게 나눠주었다. GPT 덕택에 전과는 달리 여유만만하게 과제를 제출한 필자는 다시 그 친구와 만나 이렇게 좋은 것을 알려줘서 고맙다는 감사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만 해도 ‘챗GPT’가 나와서 세상을 이렇게 뒤흔들어 놓으리라고 상상하진 못했다.

ⓒ연합뉴스
2월13일 정부세종청사 교육부에서 열린 제2차 디지털게릴라 공개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미국 오픈 AI(OpenAI)사의 프로토 타입 대화형 인공지능 챗봇 챗GPT를 체험해 보고 있다. ⓒ연합뉴스

챗GPT 보며 환호와 불안 동시에 느껴  

2016년에 딥마인드의 바둑 인공지능 알파고가 인간 챔피언인 이세돌 9단을 이겼을 때, 한국 사회는 ‘AI 열풍’을 맞이했다. 소위 ‘4차 산업혁명론’이 서점의 매대를 채우고 있었고, AI가 유발할 대규모 자동화와 그에 따른 사회적 충격을 경고하는 책과 방송을 어딜 가나 접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갑자기 컴퓨터공학과의 인기가 급등했고, 어린이들에게 코딩을 가르치는 것도 유행을 탔다. 그런데 이런 대중적 차원의 AI 열풍은 얼마 안 가 수그러들었는데,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천지개벽’이 이뤄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바둑에서 패배했지만, 대부분은 다니던 직장에 그대로 다닐 수 있었고, 운전도 여전히 인간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AI는 우리 삶의 여러 분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미디어와 인간 인식에서 일어났다. 이를테면 알고리즘은 플랫폼 노동을 규율하는 데 적극 사용되어 노동량과 강도를 ‘효율적으로’ 높이는 데 활용되었다. 한편 여행지에서는 외국어를 몰라도 파파고나 구글 번역을 통해 그럭저럭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런 와중에 성큼 다가온 챗GPT의 충격은 다시금 대중적 차원에서 AI 논의를 활성화시켰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문장을 생성하고 질문에 답을 주는 챗GPT를 보면서 환호와 불안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낀 것 같다. 특히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면모 중 하나라고 생각되었던 언어와 작문에서 AI가 약진한 것이 증명되자, 이제 인간성을 무엇이라고 정의해야 할지, AI가 어디까지 인간의 일을 대체할지, 또 앞으로도 인간의 일로서 남게 될 것은 무엇일지에 대한 고전적인 질문들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인간성에 관한 철학적인 질문을 곱씹는 것도 아주 흥미로운 일이지만, 일단은 기술사(技術史)적인 관점에서도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칼 베네딕트 프레이가 2019년 출간한 《테크놀로지의 덫》은 기술의 관점에서 산업혁명을 통시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프레이 교수는 이 책에서 기술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하나는 ‘노동대체 기술’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활성화 기술’이다. 노동대체 기술은 18세기 말에 산업혁명과 함께 방직기와 방적기의 형태로 널리 보급되었는데, 이들은 말 그대로 인간의 노동을 기술이 완전히 대체해 쓸모없게 만드는 기술이었다. 많은 숙련 노동자와 장인들이 일자리를 잃고 저임금 노동력으로 편입되었으며, 경제는 성장했지만 실질 임금은 정체 내지는 감소했다. 

반면 노동활성화 기술은 1870년대 전기와 내연기관을 대표로 2차 산업혁명을 이끈 기술이었는데, 이 기술들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기보다는 그 활용성을 극대화해준 기술이었다. 이 시기에는 반대로 기술의 힘 덕택에 대다수 사람이 숙련 노동력으로 진입할 수 있었고, 이들이 중산층의 중심이 되며 대중사회를 형성했다. 프레이는 컴퓨터와 로봇의 발전으로 인한 자동화가 다시금 노동활성화 기술보다는 노동대체 기술의 시대를 열어젖혔다고 보았다. 그 결과, 노동이 대체된 많은 사람이 중산층 자리에서 밀려났고, 양극화 시대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

 

아날로그적 역량과 기술 활용도 다 갖춰야

챗GPT를 비롯한 여타 AI 기술들은 이러한 시대의 연장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희망과 절망을 섞자면 최근 등장하는 AI들은 노동대체의 면모와 노동활성화의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의 기술보다 더욱 진보한 모델이 나와 인간의 언어활동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분명히 증대된 생산성으로 인해 많은 노동력이 AI로 대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이는 적절한 활용법만 익히게 된다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생산성을 일개인이 갖게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언어를 비롯해 인간의 인지 기능을 부분적으로 모방한 인공지능의 약진은, 인공지능이라는 일꾼에게 적절한 질문을 던지며 ‘일을 시킬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노동력을 양분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사실 이는 30년 전부터 꾸준히 전개되고 있는 방향이 심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발전은 청년층에게는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이고, 청소년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들은 유년기부터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며 성장했기에, 신기술이 만들어내는 변화에도 다른 세대보다 잘 적응할 수 있다. 하지만 유년기부터 디지털 기술과 함께 컸다는 것은,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의존을 더 많이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번역기에만 의존하면 외국어를 배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국 디지털의 파고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아날로그적 역량과 기술 활용도를 동시에 갖춰야만 한다는 교과서적 대답이 다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챗GPT가 글을 대신 써준다 하더라도, 챗GPT가 써주는 글을 복사해 그대로 쓰는 사람은 AI로 대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AI의 충격에 교육과 훈련을 둘러싼 국가와 사회의 고민이 갈수록 깊어지는 지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개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단은 기술의 편리함을 즐기되 적당한 수준으로만 몸을 담그는 지혜를 갖추는 일일 것이다. 귀찮은 노동은 대체하고, 자신의 실력은 활성화할 수 있게끔 말이다. 

임명묵 작가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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