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州 사죄행보 ‘전두환 손자’가 끝내 찾지 않은 그곳
  • 정성환 호남본부 기자 (sisa610@sisajournal.com)
  • 승인 2023.04.0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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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비석’ 밟을지에 관심...망월동묘역 패싱 배경은
전우원 “난 미움 증폭보다 사랑을 우선시하는 종교인”
“망월동 ‘전두환 비석’ 밟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사죄”

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 손자 전우원(27)씨가 3월31일 광주를 찾아 사죄행보를 했다. 전씨는 첫 공식행보로 5·18 민주화운동 상흔이 남아있는 곳곳을 선택했다. 하지만 딱 한곳은 비켜갔다. 이른바 ‘전두환 비석’이 입구에 박혀있는 5·18민족민주열사묘역(망월동묘역)이다. 지역사회 일각에선 그가 이 비석을 밟고 지나갈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그는 인근 국립5·18민주묘지만 참배하고 돌아갔다. 전씨가 이곳을 찾지 않은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3월 31일 오전, 광주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옛 망월묘역) 입구에 ‘전두환 대통령 내외분 민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이른바 전두환 비석이 박혀있다. ‘전두환 기념비석’은 1982년 당시 대통령 전두환씨의 전남 담양군 방문을 기념해 세워졌으며 광주·전남 민주동지회가 비석의 일부를 떼어내 가져와 참배객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망월묘역 입구 길바닥에 묻었다. ⓒ시사저널 정성환
3월31일 오전, 광주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옛 망월묘역) 입구에 ‘전두환 대통령 내외분 민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이른바 전두환 비석이 박혀있다. ‘전두환 기념비석’은 1982년 당시 대통령 전두환씨의 전남 담양군 방문을 기념해 세워졌으며 광주·전남민주동지회가 비석의 일부를 떼어내 가져와 참배객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망월동묘역 입구 길바닥에 묻었다. ⓒ시사저널 정성환

전우원씨는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했다. 앞서 5·18 민주화운동 유족과 피해자들을 만나 사죄도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 중 광주 민주화운동 피해자·유족들에게 사죄하고 묘역을 참배한 것은 그가 처음이다. 

전씨는 오전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 1층 리셉션 홀에서 열린 ‘5·18 유족 및 피해자와 만남’ 행사에 참석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행사를 마친 뒤 광주 북구 운정동 5·18민주묘지로 이동해 헌화와 참배로 오월 영령의 넋을 기렸다.

그는 5·18 최초 사망자인 고(故) 김경철 열사, 12살 희생자인 고(故) 전재수군, 행방불명자와 무명 열사 묘역을 차례대로 참배했다. 한 곳도 빠짐없이 묘비 앞에 무릎을 꿇은 전씨는 묘비와 영정 사진을 자신의 검은색 코트로 닦아줬다.

전씨는 이날 오후 3시쯤 광주 동구 아시아문화전당(옛 전남도청사)을 찾았다. 5·18 당시 전남도청이었던 이곳은 광주 시민들과 계엄군이 마지막으로 대치한 최후 항쟁지다. 전씨는 이날 마지막 공식 일정으로 옛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245를 찾았다. 모두 5·18 항쟁의 상흔이 짙게 배어 있는 장소이다. 

하지만 전씨는 딱 한곳만은 비켜갔다. 이른바 ‘전두환 비석’이 있는 망월동 5·18묘역이다. 이 비석은 현재 광주 북구 옛 망월동묘역으로 향하는 길바닥에 묻혀 참배객들이 밟고 지나가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비석 안내문에는 '영령들의 원혼을 달래는 마음으로 이 비석을 짓밟아 달라'고 적혀있다.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은 전씨의 이름이라도 짓밟아야 민주화를 외치다 숨진 영령들 앞에 설 수 있다는 산 자의 울분과 부끄러움이 담겼다. 이 비석은 1982년 3월 광주를 찾은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전남 담양군 고서면 한 마을에서 숙박한 것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마을 주민들의 주도로 ‘전두환 각하 내외분 민박 마을’이라는 각인을 새겨 마을 입구 도로변에 세워놓았다. 이때 만들어진 비석은 현재 망월동 묘역 입구 길바닥에 묻혀있는 것보다는 더 큰 크기의 비석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두환 대통령 각하 ㅐ외분 민박 마으“라는 글자만 빛바랜 채 남아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전씨가 정권에서 물러나자 그를 향한 분노를 참지 못했던 한 청년이 깊은 밤을 틈타 해머로 표지석 일부를 깨뜨려 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행동으로 이 때 비석에 새겨진 전두환의 '전' 글자가 훼손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 전우원씨가 31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무명열사의 묘비의 먼지를 자신의 겉옷으로 닦고 있다. 전씨는 이른바 ‘전두환 비석’이 박혀있는 인근 민족민주열사묘역(옛 망월묘역)은 찾지 않았다. ⓒ연합뉴스
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 전우원씨가 31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무명열사의 묘비의 먼지를 자신의 겉옷으로 닦고 있다. 전씨는 이른바 ‘전두환 비석’이 박혀있는 인근 민족민주열사묘역(옛 망월묘역)은 찾지 않았다. ⓒ연합뉴스

당시 망월동 묘역엔 5·18 희생자들의 시신이 묻혀있었다. 시간이 지나 5·18 희생자들은 국립묘지로 옮겨가고 지금은 이한열 열사 등 민주화운동을 하다 숨진 민주열사들이 영면하고 있다. 이곳을 참배하러 온 주요 인사들이 ’전두환 비석‘을 밟고 지나가는지 여부는 항상 관심의 대상이 됐다. 

지난해 12월22일 오전, 당시 야권 유력 대선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전두환 옹호 발언’으로 거센 비판을 받는 상황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가 보란 듯이 이 비석을 밟고 지나갔다. 이 후보는 비석을 밟지 않은 채 지나간 윤 전 총장을 향해 “(전두환을) 존경하는 분이라 밟기 어려우셨을 것”이라며 비꼬기도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 후보 시절 묘역 참배를 마치고 나오다 비석의 존재를 듣고 가던 길을 되돌아와 발로 밟고 지나갔다. 2016년 4월 제20대 총선을 앞두고 이한열 열사를 참배하기 위해 찾아왔을 때 역시 비석을 밟고 지나갔다. 문 대통령을 포함해 이낙연·추미애·심상정 등 진보 성향 정치인들은 대부분 비석 밟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반면 보수 성향 정치인들은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까지 방문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그러나 2016년 8월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김무성 전 대표는 이곳을 찾았다가 “나는 밟을 수 없지”라며 비켜 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비석을 밟았거나 밟지 않아 논란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은 2018년 대법원장 재임 시절 이 비석을 밟고 지나갔다가 '정치적 중립 논란'에 휩싸였다. 논란이 커지자 그는 “모르고 밟았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전씨가 이곳을 찾아 비공개로 비석을 밟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공개적으로는 망월동묘역을 아예 방문하지 않았다. 그리고 묘역 입구에 박힌 전두환 기념비석을 밟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그가 밝힌 명분이 뭘까. 30일 심야에 광주에 도착한 전씨가 광주 서구 상무지구 자신이 묵고 있는 한 숙박업소 앞에서 취재진을 만나 한 말이다.

“망월동묘역 입구에 묻힌 전두환 기념비를 밟지 않겠다. 평화로운 방식으로 모든 게 진행될 수 있길 바란다. 사죄를 하러 온 제가 그런 것도 못하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제가 무릎을 꿇는 등 (광주시민들이) 저를 어떻게 하는 것은 자유다. 저는 미움이 증폭되는 것보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을 우선하는 종교인이다. 다른 방식으로 사죄를 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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