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변해 버린 스포츠 해설위원들의 말, 말, 말
  • 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5.27 11:05
  • 호수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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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원의 저격으로 구설 오른 박찬호
제갈성렬, 김보름을 ‘왕따 가해자’ 내몰기도

“해설하면서 바보 만든 선수가 한두 명이 아니지만, 책임은 져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재원 SPOTV 야구해설위원이 최근 유튜브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다. “저는 코리안 특급을 너무 싫어한다”고 운을 떼 국제경기가 있을 때마다 KBS에서 야구 해설을 하는 박찬호를 겨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 한국 야구 대표팀이 9월24일 인천 문학야구장에서 대만과 예선전을 가졌다. 해설을 하던 박찬호가 팬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뉴스뱅크이미지

야구 대표팀에게 오리배 타고 오라고 한 양준혁 해설위원

박찬호와 오재원의 앙금은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천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 경기를 해설하던 박찬호는 오재원이 타석에 들어서자 “과거에 오재원이 땅볼 타구를 몸에 맞았다고 우겨 파울이 됐다”면서 “할리우드 액션이 재치로 포장돼서는 안 된다”고 힐난했다. 박찬호가 언급한 과거는 2012년 8월7일 한화 이글스와 두산 베어스 경기 때로, 풀카운트에서 오재원은 박찬호의 공을 쳐서 땅볼 타구를 만들었는데 몸에 맞으면서 파울이 선언됐다. 몸에 안 맞았다면 아웃이 되는 타구였다. 이후 오재원은 볼넷으로 출루했다. 

박찬호의 ‘입’으로 소환된 과거에 야구팬들은 들끓었고, 오재원은 비양심적 선수가 됐다. 이후 팬들이 보내준 당시 경기 장면(땅볼에 몸 맞는 것)을 확인한 박찬호는 중계방송 도중 “오해로 후배를 힘들게 한 것 같다”고 사과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당시 오재원은 심각하게 은퇴를 고민할 정도로 온라인상에서 온갖 욕설에 시달려야 했다. 

강백호 또한 박찬호로 인해 심한 마음고생을 했다. 2020 도쿄올림픽 도미니카공화국과의 동메달 결정전 때 강백호는 팀이 역전당하자 거의 넋이 나간 상태로 있었다. 후에 “너무 허탈해서 넋 놓고 있었다. 너무 긴장해서 껌을 8개나 씹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박찬호는 해설하면서 “이러면 안 된다. 보여줘서는 안 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강하게 질책했다. 또다시 박찬호의 ‘말’이 도화선이 되어 강백호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야구 국가대표팀의 저조한 성적(4위)과 맞물려 마녀사냥은 더욱 극에 달했다. 이 때문인지 도쿄올림픽 전 4할에 가까웠던 강백호의 KBO리그 타율(0.395)은 후반기 동안 0.294에 그쳤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후 강백호가 엉성하거나 다소 어이없는 플레이를 할 때마다 다른 선수의 배 이상 비난을 받는다는 점이다. 도쿄올림픽 껌 사건 이후 ‘문제아’라는 주홍글씨가 찍힌 탓이 크다. 오재원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박찬호의 말 한마디로 ‘바보 선수’가 됐다. 

야구 전문가의 말이 선을 넘은 사례는 또 있었다. 양준혁 MBC스포츠플러스 야구해설위원은 자신의 유튜브에서 2023 세계야구클래식(WBC) 일본전에 대해 “지금까지 국제대회를 하면 경쟁력이 있었다. (이번 한일전은) 내가 본 최고의 졸전”이라고 평하면서 이강철 대표팀 감독에 대해서는 “이런 식으로 경기 운영을 하면 국대 감독은 안 하는 게 맞을 것 같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양준혁은 한발 더 나아가 “중국에 지면 들어오지 마라. 그냥 일본에서 사회인 야구나 뛰고, 국가대표도 때려치워야 한다”면서 댓글 창을 보고는 “배는 타고 와야죠. 오리배”라고 조롱했다. 개인 방송에서 한 말이라고는 하지만 프로야구 레전드 출신 전문가가 할 말은 아니었다. 양준혁의 ‘오리배’ 발언에 한 야구인은 “사적인 자리에서나 할 말을 너무 쉽게 했다. 클릭 수 올리려고 야구 후배들을 조롱거리로 만든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해설위원의 주관적 평가로 선수가 상처를 입는 경우는 프로야구에서만 있는 게 아니다. 2018년 평창겨울올림픽 때도 잘못된 중계로 선수를 사지로 몰았던 예가 있다.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김보름 선수가 2018년 2월20일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단체 팀추월 스피드스케이팅 준준결승전 관련 기자회견에서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보이고 있다. 전날 진행된 네덜란드와의 준준결승 경기에서 김보름·박지우 선수가 팀 동료인 노선영 선수보다 한참 먼저 결승점을 통과해 논란이 됐다. ⓒ뉴스1

법원 판결로 김보름이 ‘가해자 아닌 피해자’인 사실 드러나

SBS 제갈성렬 빙상해설위원은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 준결승전을 중계하며 한참 뒤처진 노선영을 뒤에 두고 결승선을 통과한 김보름과 박지우를 강하게 비난했다. 소위 ‘왕따 주행 논란’에 불을 지피며 “이런 모습이 나온 것에 대해서는 선배로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함께한 캐스터 배성재 또한 “팀추월에서 최악의 모습이 연출됐다”고 거들었다. 사실 김보름·박지우의 주행은 팀추월에서는 종종 나오는 장면이었다. 팀추월 경기 진행 방식에 다소 무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스피드스케이팅에서는 나름 전문가로 이름이 알려진 제갈성렬의 말에 여론은 크게 동요했다.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김보름이 지은 허탈한 웃음은 노선영을 향한 비웃음으로 탈바꿈됐다. 김보름은 어느새 ‘왕따 주범’이 됐고,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동계올림픽인데도 야유를 받으며 개인전을 치러야 했다. 유시민·안민석 등 정치권 또한 김보름을 향한 마녀사냥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갈성렬의 말 한마디에 온 나라가 들썩인 셈이다. 온갖 비난에 시달린 김보름은 한동안 심리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이후 진행된 재판에서 김보름이 평상시 노선영에게 갑질과 폭언을 당한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여론은 뒤집혔다. 최근 법원은 “노선영이 김보름에게 3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하기도 했다. 김보름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나 제갈성렬이나 배성재 모두 지상파 방송에서 뱉은 말에 대해 책임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2026년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 때도 이들은 중계석에 앉아있을 것이다. 이들로 인해 지금까지도 김보름을 왕따 가해자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말이다.

유튜브 등의 영향으로 스포츠 해설위원들 말의 강도가 점점 세진다. 시청률과 클릭 수 등에 매몰되면서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으면서도 이성적이 아닌 감성적인 대응이 나온다. 때로는 정확히 확인된 사실이 아닌데도 시청자나 구독자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말한다. 정작 그릇된 사실을 바로잡아야 할 때는 여론의 물줄기를 거스르기 두려워 입을 닫기도 한다.

오재원이 박찬호를 저격한 방식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 또한 지금은 방송사 해설위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진짜 말하고자 했던 게 무엇인지 곱씹을 필요는 있다. 말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말이 칼이 됐을 때, 베이고 찔려 상처받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나 깨나 불조심? 아니다. 자나 깨나 말조심이다. 전문가라면 응당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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