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불허의 에르도안 행보, 전 세계가 촉각 [오은경 기고]
  •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 (유라시아투르크연구소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6.03 10:05
  • 호수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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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갈등,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에서 튀르키예의 국제무대 영향력 점차 확대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집중되었던 튀르키예 대선이 막을 내렸다.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벌인 끝에 에르도안 대통령이 52.2%의 득표율로 47.8%를 얻은 6개 야당 연합 대표 케말 클르츠다로을루를 누르고 승리했다. 사실상 그는 튀르키예공화국 건립 이후 ‘30년 집권’이라는 최장기 지도자가 될 수 있다.

ⓒAFP 연합
5월28일 튀르키예 대선에서 승리가 확정된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스탄불 대통령 관저 밖에 모인 지지자들을 향해 연설하고 있다. ⓒAFP 연합

40% 가까운 이슬람주의 강력한 지지층

유례없는 고물가와 인플레이션, 5만 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대지진, 이에 대한 정부의 부실 대응과 부패 문제가 대두돼 선거 전만 해도 정권 심판론이 유력했던 상황에서 예상을 뒤엎은 놀라운 결과다. 20년 만에 정권을 내줄 수 있다는 외신 분석이 쏟아지던 상황에서 튀르키예 국민이 다시 에르도안 대통령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에르도안 대통령에게는 거의 40%에 가까운 확고한 불변의 지지층이 있다. 이들에게 에르도안은 단순한 정치인이나 대통령이 아니다. 이슬람교도인 이들에게는 거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대신할 ‘구원자’다. 2016년 쿠데타 시도가 있었을 당시 “모두 거리로 나와 나라의 위기를 막아 달라”는 에르도안의 호소에 맨몸으로 탱크와 맞서는 남성들의 사진이 공개된 바 있다. 그들에게 에르도안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이다.

에르도안이 40% 표심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포퓰리즘 정책 때문이 아니다. 그는 대선 전에도 가정용 천연가스 무상 공급, 공공근로자 임금 인상 등 강력하고도 획기적인 대안을 쏟아냈다. 인플레이션이 75%를 넘어서자 공무원 급여를 45% 대폭 인상하는 등 통 큰 대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지진 발생 지역 11곳 중 8곳이 모두 에르도안에게 표를 던졌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원래 이곳은 에르도안의 표밭이기도 했지만, 야당 당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 재난 복구를 소홀히 할까 봐 에르도안을 선택했다는 의지할 곳 없는 재난 피해자들의 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에르도안이야말로 자신들과 고통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고한 신뢰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신뢰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보여주었던 카리스마와 추진력, 참신한 경제 부흥 및 개혁정책 그리고 강력한 이슬람주의에 기인한다. 이런 그의 행보는 당시 튀르키예에서 세속주의와 서구화 정책으로 인해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이슬람주의자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국제사회가 튀르키예 대선에 그토록 관심을 보였던 이유는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외교 노선과 국제관계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은근히 정권교체를 기대했던 서방국가로서는 에르도안 대통령과의 ‘불편한 동맹’이 계속될 전망이다. 나토 회원국인 튀르키예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2019년에는 러시아제 방공 미사일 시스템 ‘S-400’을 수입하며 미국의 반감을 샀고, ‘F-35’ 전투기 개발 공동 국제 프로그램에서 퇴출당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나토 가입을 고대하고 있는 스웨덴으로서는 당혹스럽기만 하다. 가입 비준안 처리를 미뤄오던 에르도안 대통령은 당선이 확정된 이후 6월1일부터 양일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개최되는 나토 외교장관회의에 불참한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나토가 스웨덴의 가입 목표 시점으로 잡은 7월 정상회의에 앞서 열리는 사실상 거의 마지막 공식 회의라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튀르키예는 미국산 F-16 전투기 판매 문제를 두고 미국과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거래’할 것으로 보이는데 바이든 대통령이 어떻게 나올지는 두고 볼 일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집권 연장으로 가장 안도한 사람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집권 실패는 권위주의 정권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러시아 국내정치에도 일파만파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중국·친중동으로 기울 가능성 커

에르도안 대통령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으나 그럴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아 보인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던 튀르키예는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이후부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 중이다. 무엇보다도 튀르키예는 우크라이나에 자국산 군용 드론 무인기 ‘바아락타르 TB2’를 수출하고 있다. 그렇다고 서방 세계의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는 않는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최근에도 서방의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사를 표명했다. 이는 러시아와 지난해 150억 달러 규모의 원자력발전소 건설 계약을 체결했고, 러시아가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천연가스 대금 지급을 연기해준 데다 매년 러시아 관광객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여부는 전적으로 푸틴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흑해 해상운송을 통한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선박의 안전을 러시아가 보장하도록 하는 ‘흑해 곡물 이니셔티브’ 체결을 성사시키는 데 튀르키예가 중재자 역할을 했지만, 현재로서는 전쟁 종식에 이바지할 중재자로는 중국이 유력해 보인다.   

한편 최근 G7 정상회의에 맞대응하는 방편으로 중국이 중앙아시아 정상들과 회담을 가지면서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역할이 부각되고 있는데, 역시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는 튀르키예는 미·중 관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으로부터 받은 차관을 리라 환율을 떠받치는 데 쓰고 있는 튀르키예가 미국보다는 중국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이스라엘 등 중동 역시 튀르키예의 리라 가치 방어에 큰 역할을 해주고 있어 외교정책은 당연히 친중동으로 기울게 될 전망이다.

2023년 튀르키예는 공화국 수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향후 100년의 역사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비전과 전략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지진 피해 복구, 경제난 극복, 난민 문제 등 국내에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국제사회에서도 미·중 갈등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한 미·러 경쟁 구도에 에르도안 대통령이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전 세계가 예측불허인 에르도안 대통령의 행보를 주목하는 것에 대해 튀르키예 국민이 기대감을 갖고 그를 지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슬람 종교학교 출신들과 함께 정의개발당(AKP) 창당

에르도안 대통령은 1954년 흑해 동부 소도시 리제에서 태어났다. 13세 때는 가족들과 함께 이스탄불로 이주해 빈곤층 거주지에서 자라며 가난을 경험했다. 독실한 무슬림 가정에서 자란 그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삶과 아랍어 과정이 커리큘럼에 포함된 종교 지도자 양성학교를 다녔다.

종교학교 재학 시절부터 민족주의 학생운동으로 정치적 감각을 키웠다. 뛰어난 대중연설 능력 등으로 주목받자 1976년부터는 무슬림 정당에 입당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본격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은 1994년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면서다.

마흔 살 젊은 시장이 낙후된 상수도와 쓰레기 처리시설 및 대중교통 현대화를 추진해 결과적으로 시민들의 거주 환경을 개선했기 때문에 열악한 도시 주거 환경에 시달리던 서민층과 빈민층을 강력한 지지 기반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게다가 1997년 종교적 내용이 담긴 시를 낭송했다가 증오를 선동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시장직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그의 인지도는 더욱 높아졌다.

급기야 2001년에는 이슬람 종교학교 출신들과 함께 정의개발당(AKP)을 창당하고 보수층 지지 기반을 다지면서 그는 투르크 민족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민족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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